디모데후서 1:1-14 <복음과 함께 고난을>

[6절]에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은사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염려가 아니라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라’ 하나님의 주신 은사를 사용함에 더욱 분발하여 목회에 힘을 내라는 뜻입니다. ○ 어떤 사람들은 은사하면 병고침이나 예언 방언 이런 눈에 보이는 은사만을 생각하지만 은사는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각기 그들에게 맞는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행정을 잘하는 것도 은사요. 운동을 잘하는 것도 은사이고, 어떤 사람은 남을 위로, 중재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바르게 사용하므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며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 은사는 실제적인 사용을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사용되지 않는 도구는 곧 녹슬어 버리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은사는 장식용이나 과시용에 불과한 것이고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 지속적인 은사의 개발과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을 위해서 은사를 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은사가 다른 사람에게 강하게 역사 하도록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기쁨과 큰 유익을 이루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 한국 교회 많은 성도들이 ‘은사’에 대해서 잘못 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사’ 하면 무조건 많이 받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언을 받았으면 통역을 받아야 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았으면 예언의 은사를 받아야 더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슨 은사를 얼마나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결코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말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라고 하였습니다. ○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주 두려움에 빠지곤 합니다. 특히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비웃음, 비판,반대,냉소 모욕을 생각하고 지레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꾼된 자가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간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음을 의미합니다. ○ 모세가 처음에 그러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모세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 다윗도 한 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그의 곁에 있었지만 다시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말합니다. [시편 3:6]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했습니다.

[7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마음이 나옵니다. 곧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능력’은 성령의 능력을 힘 입는 <크고 굳센 믿음>을 가리킵니다. 여기 굳센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로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하는 큰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큰 권능을 받고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능력과 권능의 영으로 성도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이 성령의 임하심은 어느날에 임하시고 어느날에는 떠나시는 그런 성령이 아니십니다. 성령은 이미 이 땅에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환경과 시대 조건을 따라 쉽게 변하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항상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 성도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사탄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여…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에게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넘침으로 인해 우리도 능히 형제를 사랑하는 생활이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 중국에서 한 여인이 예수를 믿고 나니 얼마 전에 이혼한 남편이 그렇게 불쌍하게 생각되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복혼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이 천만을 넘는 우리 사회에 점점 사랑이 메말라 가고 미움과 분쟁이 팽배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먼저 우리 성도들이 마음에 인자한 마음과 사랑이 식은 까닭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작은 일로 분내고 따지고 마음 상해하고 법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 사회가 사랑이 풍성하고, 사람 사는 사회가 되게 하려면 누구보다도 먼저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대접하여야 합니다.

○ 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번째 마음은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근신하는 마음이란 주의 뜻을 지켜 변함없이 자신의 생활에 절제하고, 자신을 돌아보아 겸손함으로 주를 섬기며, 맡기신 일을 감당 하는 마음입니다.

○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이르렀으나 매장지 하나 없고, 자식도 없고 가뭄으로 고생만 있었습니다. 그는 희망 없이 애굽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돌아와 헤브론에서 제단을 쌓고,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이삭을 하란으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권합니다.

 

[8절]에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주를 전하는 자로서 조금도 부끄러움을 갖지 말라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전파를 금지시키고 그리스도교를 범법 단체로 낙인 찍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의 대화재를 그리스도인들의 소행으로 몰아부쳐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잠시 고난이 지나기까지 소나기를 피할 것이다.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다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기 보다는 세상의 군왕과 세상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입다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 예수를 믿는 자임을 자랑하지 않고, 쭈뼛거리면서 그럭저럭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지금 고난의 때에, 성령은 더욱 강하게 우리를 권고하며 도우시는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뭇 사람의 믿음을 체로 거르듯, 알곡을 키질하며 거르고 계신 때입니다. 이런 때 주의 자녀들은 자신이 성도임을 당당히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8]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비정상인의 소리다. 말이 너무 과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성도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천국길을 가는 자의 필수 관문과도 같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삭, 야곱, 요셉,다윗,세례 요한,바울, 폴리캅, 어거스틴, 루터, 칼빈 이들은 모두 고난 당하므로 복음을 지킨 사람들이고 세상을 구원한 사람들입니다.

 

[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실로 인류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놀랄 만한 과학적 진보를 이루어 우주를 탐험하고, 의학적인 발전을 통하여 인류를 괴롭히는 수많은 질병을 퇴치해 왔고, 평균 수명을 향상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모든 일을 해결 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영적인 측면에서 인류는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의 죄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전혀 무능한 존재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모진 마음을 먹고 세상을 단절하고 산 속에 들어가 참선하고 수행한다고 해서 사람이 새로 거듭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수천 번 읽고 성경 속의 진리를 찾아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들이 거듭난 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는 결연한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스스로는 거듭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노력은 계속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큰 공허와 절망감만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귀한 일은 없습니다.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맘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1절]에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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