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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3:1-10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린도후서 13:1-10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 본문은 고린도 교회 내에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부 고린도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한여 바울은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너희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구나!” “너희는 나의 은사와 능력을 보지 못하였느냐?” 하고 말하겠습니까? 바울의 제3차 고린도 방문을 준비하면서 바울은 제2차 고린도 교회 방문 때와 같은 소위 근심의 방문이 재현되지 않기를 간절히 열망하였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가면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번째 방문할 때에는 대적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가 방문하기 전에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랑의 권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진지한 자기인식과 반성을 거쳐 자신이 참된 사도임을 자각하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라는 말로 권면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갑자기 상황을 벗어난 비약적인 말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말은 부활의 때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함은 곧 모든 구원에 이르는 대원칙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지금 약한자의 모습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고 있으나 하나님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무리를 칠 때 떨기나무 불꽃 안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네발에 신을 벗으라 명을 들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종의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명예도 부귀도 자랑도 없습니다. 그때 사자는 모세에게 가나안 백성을 구원하라는 사명과 함께 증거를 주시는데 네 지팡이를 던지라 하였습니다.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의지하던 지팡이는 하잘 것 없는 마른 인생 막대기였습니다. 우리도 내가 자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 드리는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쓰시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내 혈기대로 내 감정대로 내 주장이 앞서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했습니다. 십자가는 낮아짐과 수치와 약함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진정 약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공회보다 더 약하셔서 그들에게 수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10:18]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실제로 그리스도는 강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자원하여 약한 자의 모습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여 약해지신 그리스도를 부활의 권능으로 일으키사 그의 강함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금 나의 일거수일투족 미세한 마음까지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 이용규 더 내려놓음 중에서 - 선교사의 책에 몽골인 벌러르 자매가 예배 도중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듣기 위해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이다. 소가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며 예배를 마치는 순간,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믿음의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경험입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회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나의 믿음을 확증하겠습니까? 그것은 내려놓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 말은 헬라어 원형이 ‘도키마조’ 인데 이는 마치 보석 세공사가 금덩어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그 금덩이를 불속 용광로에 집어넣어 제련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까다롭게 심사하여 그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하여 철저한 ‘자기 인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어떠한 삶의 변화를 경험했는지를… 그리하여 지금 자신들의 믿음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빈손들고 나올 때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바울의 사도직에 증거를 구하며 자신을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6]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고린도후서 13: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①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인들에게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 즉, ‘하나님 앞에인정된 자’ 된 것을 알기를 바란다.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옳음을 말하며 바울을 폄하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교인들 앞에서 인정을 받고 안 받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지금 일부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을 향하여 ‘사도적 권위’를 묻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 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말합니다. 왜 복음전파를 위해 힘써 수고한 사람을 두고 판단합니까? 바울을 판단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높이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은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자신 정죄를 당하리라 했습니다.
[로마서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바울은 자신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8] 말합니다. 가르침은 억압으로 주입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삶의 인내와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고,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원한 것은 단 하나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람은 고린도교인들이 진리 가운데 바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고,선을 행하는 자’ 가 되는 것입니다.
○ 거짓 사도들의 꾀임에 빠져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섭섭하게 하였으나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악을 행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모든 결단 속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음을 믿었고,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만지시기를 바랐습니다.
[고린도후서 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 바울은 고난 중에, 약한 자의 모습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는 사도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주장하는 자세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 왜 대한민국의 가정에 부모와 자식간에 대화가 없고 거리가 있는 줄 아시나요? 미국에서는 나이에 관계 없이 친구가 되고 가족이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정에서는 어린아이가 따로 청년들이 따로 부모가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 충성과 순종을 요구하는 권위주위의 유교의 영향을 받은 까닭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어린아이에게도 젊은이들에게도 그들 모두가 우리의 섬김의 대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낮은 자로 임해야 합니다.
○ 교회 안에 교인이 몇 명이고,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감당하는가? 교회 안에 누가 공로자이고 영향력이 있느냐?
수고했느냐? 이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바울이 진정한 사도인가?’ 라는 사도권을 입증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중요한 일은 나도 모든 성도도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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