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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1:1-10 <믿음의 교제가 있는 교회>
빌레몬서 1:1-10 <믿음의 교제가 있는 교회>
[빌레몬서 1:1,2]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바울은 빌레몬 뿐만 아니라 자매 압비아와 아킵보 그리고 빌레몬 집에 있는 교회의 모든 사람을 수신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압비아’는 ‘가장 사랑하는 자매’라는 뜻으로 빌레몬의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2절에 언급하는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입니다. 그를 말하면서 ‘우리와 함께 군사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복음의 최전선에서 자신과 더불어 맹렬히 싸우는 전우로 묘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아킵보에 대해서 골로새서에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권면한 바가 있습니다(골 4:17). 이는 아킵보가 에바브라의 뒤를 이어 골로새교회의 지도자가 될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본 서신의 수신인으로 교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에 모인 가정 교회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빌레몬과 더불어 온 교회가 함께 깊이 생각하고 결정을 내려주기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 초대 교회는 A.D.3세기 이전까지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특별한 건물을 세웠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다만 가정마다 30명 가량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믿음과 사랑 가운데서 똘똘 뭉쳐 신앙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많습니다. 예루살렘의 요한 마가의 집은 투옥된 베드로를 위해 모여 기도했던 모임 장소였고, 빌립보의 자주 장사 루디아도 자신의 집을 교회의 모임 장소로 드렸으며, 에베소의 아굴라 부부의 집에 있는 교회는 (고전 16:19)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그리고 라오디게아의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가(골4:15) 그랬습니다. 그들은 작은 교회였으나 당시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당시의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 교회들이 구제연보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연보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는 당시 로마 제국의 착취로 동일하게 경제난과 박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 연보를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였던 것입니다
○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조금이라도 재정적인 여유를 가지면, 땅 사기에 바쁘고 새로 건물을 짓기에 바쁩니다. 물론 그것이 전도를 위한 좋은 전략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수가 늘어나서 넓은 예배당을 갖게 된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가 지나쳐 빚을 많이 지면서까지 땅을 매입하여 건물을 짓는 교회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 본질적 사명인 선교와 구제를 위한 재정조차 바닥이 나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교인수 증대를 위하여 거대하고 웅장한 교회당, 교회 주차장, 교회 묘지, 교회 기도원, 사회 봉사관, 등의 편의시설 확충에 너무 많은 재정지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편하게 하려는 철새 신자들의 안식처로 전락하거나, 수준 낮고 영향력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만 양산한 것입니다. ○ 오늘날 많은 한국의 대교회에는 인적교제가 없이 주일예배만 참여하는 나홀로 신앙인 넘쳐나고 있습니다. 중직자를 선거할 때는 그 사람의 신앙, 인품, 봉사경력에 대하여 많은 성도들이 알지 못합니다. 실제 통계 수치로 보면 대교회 안에서 봉사하며 열심히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의 비율은 20%에 불과하다 합니다. ○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인 사역은 안으로는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는 일이며 밖으로는 구제와 선교를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할 때 교회는 영향력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명목상의 공동체가 아닌,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어떻게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졌습니까?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된 모습, 본연의 모습을 잘 감당할 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부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 지금의 세상은 1인 단독거주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정을 만들려 하지 않고 서로에게 부담주지 않고 간섭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의 사람들은 이웃 없이 살아가다가 고독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는 사탄이 기뻐하는 생활방식입니다. 주의 자녀들은 영적공동체, 삶의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를 통하여 배우며 고난을 극복하고 주의 일을 합력하여 이루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협력하지 않고 서로 다툰다면 주의 일을 감당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단지 나 한 사람 구원 받으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에 보냄 받은 방주로서의 사명 공동체(요 20:22). 악한 영적 존재들과 싸우도록 부르신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딤전 6:12).
○ 소그룹의 교회는 서로간에 신앙과 인품 그 사람의 직업과 생활상, 가정에 대하여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노출에 의하여 서로간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제와 연합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개인 신상노출은 어쩔수 없는 것이며 나를 비움으로 상호 배움과 교정, 성숙이 이루어지고 진정한 협력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 과거 30여년전 중국 연변지역에는 지역마다 작은 처소들이 수백개가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시내에 큰교회가 세워지면서 근방의 수많은 예배처소들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수만명이 모이는 한 개의 교회가 영향력이 크겠습니까? 100명씩 모이는 수백개의 교회가 그 지역에 영향력이 크겠습니까? 인적교제가 없는 수만명의 교회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큰교회의 장점이 있지만 작은 교회는 영적교제가 있습니다. 영적교제를 통하여 서로를 권면하고 용서하며 품을 때, 연합하여 사랑을 실천할 때 신자는 성숙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회복하는 길은 영적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내 이웃교회의 형편을 알지 못하고 내 교회만의 편리와 확대만을 꾀하는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 교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작은 교회에 사람을 보내어 수년 간 인적지원하는 모습도 필요합니다.
○ 연합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 고난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10절]에서도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대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빌레몬을 향해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즉 바울이 빌레몬에게 희생을 요구한 것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한 자신의 희생의 본을 말함으로써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너그러운 용서를 끌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의 노예로서 그 주인에게 해를 끼치고 도망쳤다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을 만나 성도가 되고 바울에게 유익한 동역자까지 된 사람입니다. 만일 빌레몬이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당시 로마법에 의해 오네시모는 사형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한 사람의 동역자는 너무 귀한 존재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희생과 사랑 용서는 신앙의 기본 윤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희생적 사랑을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 하나됨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서 1:5,6]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 바울은 빌레몬에 대하여 ‘네 믿음의 교제' 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 '믿음의 교제' 라는 말에서 우리는 빌레몬이 주님을 믿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자신 불편을 감수하고 아낌없이 나누는 삶을 살았고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위로의 말과 기도로써 힘을 북돋우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교제'는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믿음의 교제'를 통해 모든 구성원이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할 때 국가를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고 지역을 초월하여 학벌과 빈부를 초월하여 교회에 활력을 얻게 하고 역사를 이루어 낼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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