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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4:5-13 <경건을 위한 연단>
디모데전서 4:5-13 <경건을 위한 연단>
[디모데전서 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바울은 형제를 깨우치면 선한 일군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늘 읽는 쇠마의 말씀에서 [신 6:7]의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우리 모두는 우리의 후배를 가르치고 자녀들을 가르치고 이웃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는 다 큰 사람이니 네가 알아서 해라 나는 나만 정직하고 바르면 된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세상사람은 바른 길을 알지 못하고 어둠에 다니고 사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대의 파수군이 되어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라 하십니다. ○ 그리고 그 가르침은 내게 큰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강단에서 가르치므로 더 깊이 기억 되고 반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보다 3배를 배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6절] 본문에도 네가 형제들을 가르치면 ‘양육을 받으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학원에서 자신의 풍족한 삶을 위한 전문지식를 배우는 데만 힘쓰지 다른 것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의 충고나 권고를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가르치는 일’은 중단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입니다.
◉ 한 목회자가 어느 교회에 협력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이 목회자는 큰 열정을 가지고 늘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배움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성도들은 그의 가르침에 거부감을 가지고 멀리 하더랍니다. 그 이유는 그냥 부담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목회자는 그 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교회마다 배우기를 즐겨하는 성도는 많지 않습니다. 신자들이 교회에 성경공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경공부 시간에 참여율은 찬양모임보다 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히브리서 5: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 성도 스스로 성경을 대하며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성도가 성숙한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허황된 거짓 교훈에도 미혹 되지 않고 바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가르치지 못하는 교인을 향하여 바울은 말씀의 초보부터 다시 배우라 말합니다. ○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과 지혜입니다. ○ ‘가르친다’의 원어적 의미는 ‘무엇 아래에 둔다’ 입니다. 이는 곧 바른 교훈을 성도들의 발 아래에 두라는 말입니다. 즉 성도들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교훈을 디딤돌처럼 성도들의 발 아래 둠으로써 스스로 판단하고 깨우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앞에 둠으로써 스스로 깨닫도록 만드는 것, 이런 교사가 지혜로운 교사입니다.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 가르치는 자가 붙들어야 하는 것이 말씀이고 기도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습니다. 사람이 들어야 할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고리가 되어서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성경을 바르게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진리이십니다. 말씀의 시간은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 연습은 운동경기에 참가는 운동 선수들에게 너무 중요합니다. 손흥민 선수가 경기가 있기 전에 연습이 부족하다면 골문을 향하여 차는 볼이 골인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약간의 볼감각에 따라 공은 골문을 맞고 튀어나오기도 하고 골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미세한 골감각을 살리기 위하여는 하루도 쉼 없이 땀을 흘리는 육체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늘 민감하여야 합니다.
○ 우리 안에는 셀수 없이 많은 옛사람이 있습니다. 게으름과 나쁜 습성들 악한 생각들, 이 전의 선입견들이 있습니다. 신자는 말씀을 대하는 날마다의 경건의 시간을 갖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기도록 연단하라.” 이를 위하여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망령되고 허황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우상 숭배 및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했던 시대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 그러면 이 시대의 우리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가 무엇일까요? 주의 제자들은 절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신조어, 음악과 유명인이 넘치고 새로운 풍조와 사상 지식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신기한 주술와 과학과 문물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이런 것들을 말하면 뭔가 아는 사람같고 스타가 된 느낌입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분주하고 복잡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 이런 것들에 전혀 담 쌓고 몰라라 해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불신의 세상 사람과 똑같이 경쟁하며, 세상의 문화와 공존을 말하고, 세상에서의 명성과 향락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향락과 명성 부귀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를 우리는 ‘두 마음을 가진 사람’ 이라 말합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명에 따라 자리와 목숨을 지키는데 연연 했더라면 오늘날의 이순신 장군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살기를 구했다면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전쟁를 감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죽기로 싸우지 않았더라면 그의 부하 제장들도 싸움을 두려워하여 바다에서 도망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에 앞서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라’ 입니다. 육체의 연단과 경건의 연단은 다 ‘유익이 있다’ 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유익의 범위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8절]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 바울과 그 일행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와 혼신의 힘을 다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었다’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란 표현은 자신의 경건이 단지 내생, 즉 천국에 가는데 유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만이 아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현재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고 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 안에 참 소망이 있습니다. ○ 과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구주가 되시면서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가 되신다” 했는데 왜 ‘모든 자’와 ‘믿는 자’를 구분한 것일까요? 여기서 ‘특히’ 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자면’ 또는 ‘다른 말로 하자면’ 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로는 구원의 대상이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 이지만 ‘믿음을 사용하는 자들’ 에 강조를 둔 말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세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는 나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경건의 목적은 성경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지금 나와 함께하사 말씀하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 모든 사람의 존경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끌어내기 위하여는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 말씀에 권위를 갖고자 한다면 첫째로 중요한 것이 ‘언행’입니다. 즉 ‘말과 행동의 일치’는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을 보는 첫 번째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세상의 믿지 않는 친구들은“뭐 어떠냐 예수님도 술을 먹었다”“술 담배 한다고 믿음에 무슨 영향이 있냐? “한 잔이 뭐 그리 문제냐? 술은 술이고 신앙은 신앙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술을 먹고 나면 뒤에서 그들 속으로 말합니다. “네가 무슨 신앙인이냐?”“신앙인이나 비신앙이나 다 똑같은 것이다.”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웃음거리가 되면 않됩니다. 나의 신앙이 뭇사람의 평가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늘 신앙인의 말이 헛된 소리, 빈말만 하는 사람인지 그 말에 진실성이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다음으로 본을 이루어야 할 항목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단지 허물 없이 아무 소리나 하고 ‘희롱’하는 말을 하고 깍아 낮추는 말을 해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우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들만의 관계인 ‘우정’을 넘어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인 ‘아가페’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정’도 만들어 가는데 벅찬 세상인데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배운다는 말입니까? ‘아가페 사랑’은 나의 이익과 무관한 보편적인 무조건의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은 참으로 배우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한다” 말하면서 상대방에 부담을 주고 상대방에 상처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사랑은 나의 수고와 희생을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행하니까 또 하나님의 증거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증진과 믿음의 열매를 모든 사람 앞에서 증거하고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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