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1-11 <범사에 양심을 따라>

1-3절을 보면 바울 외에 다른 두 부류의 종교인이 나옵니다. 하나는 사두개인이고 하나는 바리새인입니다. 사두개인은 당시의 종교적 지위를 장악한 사람들로 성전예배를 강조하였고 바리새인은 회당예배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대표가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대제사장은 유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제사를 총괄하는 인물이며 율법으로 백성을 가르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전해석은 자유분방하였고 자의적이었지만 그들은 성전을 신성시하며 그들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축복으로 여겨 지켜나가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산헤드린의 모든 공희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의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아마 당시의 사두개인들은 당시 대제사장들은 스스로를 경건한 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 그런데 바울이 산헤드린 재판정에서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말을 했다는 이유 만으로 제사장은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바울의 입을 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산헤드린 심판정의 권위에 대항한다. 대제사장의 권위에 대항한다는 말이지요. 바울은 이에 대하여 ‘회칠한 담'이란 책망을 합니다. ’회칠한 담'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한 기초 위에 세운 흙벽돌 담을 단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겉에 회를 바른 것입니다. 외적으로 경건하여 보기에 좋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불의를 감추는 표리부동한 행동을 말합니다.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 바울은 공의로운 재판이 율법의 정신임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율법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지켜져야 하리라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 분명 대제사장인 아나니아는 이방인 로마 군인도 하지 않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잡아 죽이는 것이 산헤드린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고, 유대종교가 분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성전예배가 방해받지 않는 것이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의였습니다. ○ 그러나 실제로는 이 모든 행위가 자신의 영예와 부귀 권세를 지키려는 내면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 그는 지금 자신의 하는 일이 민족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바울은 자신을 어떤 인물로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했습니다. 이 말에서 바울은 자기 안에 내재된 도덕률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이 회심한 이후 마음에 다시 심긴 복음의 진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마음에 양심을 주심으로 그릇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보통 양심이란 일반적인 의미로 개인의 도덕적 기준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양심이 다 다릅니다.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 말했고 바울은 디모데서에 화인 맞은 양심이 있다 했고, 디도서에는 더러운 양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양심은 가치관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보고 배운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에게 선한 양심은 만들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선을 분별하게 하셨으나 사람은 죄로 인하여 이러한 양심의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 요즈음 노년들이 황혼이혼을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왜요? 많은 부부들이 주장만하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성내고 큰소리 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줄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그리고 이전 세대에게 그렇게 보고 배웠으니까요. 사람은 본대로 배우게 됩니다. 부모가 늘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들도 부부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해하고 인내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3: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 사도 바울은 그러한 그들을 향해 적대 감정을 가지고 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연민외 마옴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부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해 모였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을 형제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그는 말하기를 " 동족은 그를 핍박하였지만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길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롬9장) ○ 주의 자녀는 아무리 상대가 원수를 대하 듯 할지라도 끝까지 선대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 이삭은 아비멜렉과 그랄의 목자들이 끝없이 그를을 괴롭히고 무리하게 대하였지만 그들에게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세우신 왕을 끝까지 선대하였습니다.

○ 저는 최근까지 "지금시대는 군주시대가 아니다. 국민이 주인이다. 부정선거를 행한 자는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 미쳤다. 제 정신이 아니다." 함부로 말했습니다. 저는 최근까지도 "김일성과 김정일은 왜 고이 갔을까? 왜 천벌을 받지 않았나? 불공평하다. 마귀의 자식들이다." 말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어떤 미국의 목사님이 “김정은을 위해 기도한다. 환상 중에 주님이 저를 두고 심히 슬퍼하신다.” 라고 간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과거에 한국교회도 김일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기도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 사실 제 마음은 그동안 정치권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차 있었고, 제 입에는 비판과 분노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도의 바람직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 물론 바른 정의를 밝히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 바울의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향한 "회칠한 담이여" 이 책망은 실제로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는 그가 유대신앙 최고의 권위를 가진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모른 상태에서 한 말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다 했습니다. ○ 나의 정의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저 사람을 깨우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사과하는 데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 다윗은 일찍이 자기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의 문을 지켜달라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습니다. ○ 입술의 열매를 짓는 여호와라 했습니다.

[사도행전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그러므로 ‘그날 밤'은 바울에게 있어서 외롭고 힘들고 지쳐서 두려움이 엄습하는 밤이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격려가 있었기에 바울은 이후에 로마에 갈 때까지 고난 중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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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14-25 <바울의 설교>

○ 바울 일행이 버가에 도착했으나 그곳에 정착하지 않고, 곧바로 그 도시를 관통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산악길에 올라갑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과는 다른 곳으로, 버가로부터는 정북으로 약 160km 떨어져 있었으며, 해발 1.200m 의 높은 산악 지방입니다. 안디옥은 갈라디아 각 지방으로 가는 군사 및 교통의 요층지였으며,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회당이 있는 곳입니다.

○ 회당은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과 성전 파괴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이방 지역에서 율법을 지키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 위해 만든 장소로서, 유대인들의 신앙 구심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안디옥에 도착한 첫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사도행전 13: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당시 회당 예배는 먼저 [신 6:4-13] 의 쉐마의 말씀을 읽습니다.

[신명기 64-13]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12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 ‘쉐마' 문구를 낭독하고 나서 회당장들 중 한 사람이 율법이나 선지자의 글을 낭독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회당장이 일반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을 지명하여 적절한 교훈을 베푸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멀리 고국 예루살렘에서 온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율법학자였으며, 바나바는 레위인으로 모든 이의 존망의 대상이었었습니다. ○ 지금 많은 중국인과 조선족들이 한국땅에 오지만 주 목적이 돈벌이에 관심을 갖습니다. 먹고 사는 일입니다. 이런 일로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먼저 회당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미국이 지금의 미국이 된 것은 그들이 아메리카 땅에 발을 딛고 제일 먼저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운 까닭입니다. ○ 회당장의 권유를 받은 바울은 일어서서 말씀을 전하는데 출애굽의 구속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유대인의 죄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강조하며 마지작으로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놓아주지 않는 애굽에 우박과 화염을 내리시고 애굽의 곡식 채소와 열매를 황충과 수많은 메뚜기가 몰려와 먹게 하셨지만 애굽의 고센 땅의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하시어 해를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니요. 그들의 수고로 얻은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 이는 지금 우리의 이웃나라에 일어나는 모든 자연재해와 같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구별하시어 구원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민수기 25:17,18] 미디안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

○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광야에서 음행과 탐욕에 쩔어 살았습니다. 과거의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오자 바로 우상숭배를 행합니다. 이는 아론이 백성의 요구에 따라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든 것인데 말로는 하나님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살만해지니 브올의 유혹을 좇아서 이방여인을 들여 음행을 행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한 사람이 있으니 비느하스입니다. 그는 레위지파의 제사장으로 간음한 지파의 아들과 이방여인을 죽인 것입니다.

○ 내 집에 하나님을 모르는 여인이 들어오면 그 집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남자가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자녀에게 믿음을 말한다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여인을 들이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민수기 25:15]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

[사도행전 13:19] ‘가나안 땅 일곱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 이스라엘이 범죄하는 중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사 가나안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그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며 인내이십니다.

[민수기 13:32,33]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 우리 대한민국은 우리의 힘으로 일본을 이기고 독립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우리와 함께 일본에 침략을 받은 만주와 오끼나와는 독립을 하지 못하고 중국에 먹히고 일본에 먹히었습니다. 우리가 3.1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포가 있을 것을 알려줌으로 시작된 것인데 이승만이 미국에서 학업할 당시의 동료가 윌슨이었던 것입니다. 이승만은 이조왕정에 반대하여 감옥에 갖혔던 사람이었고 3.1운동은 대한의 국민들로 하여금 독립운동에 나서도록 한 기폭제가 된 사건입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까닭입니다.

[사도행전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우리 민족의 선조는 과거에 생각하기를 인류가 바이칼 호수에서 세상에 흩어질 때 시베리아를 통하여 들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여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인류가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거치는 남방을 통하여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이 시기가 주전 1만년 경으로 북쪽은 빙하기였고 해수면은 지금보다 100m는 낮았으므로 동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잇는 많은 섬들은 하나의 대륙이었는데 이를 순다랜드라 말합니다. 이 순다랜드는 대만에서 한반도의 서해까지 육지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반도와 동북지방에 들어온 인류가 문명을 이룬 것이 주전 4500년 경의 홍산문명입니다. 이 홍산문명이 동이족의 문명이고 고조선의 뿌리입니다. 이 문명은 시베리아의 동쪽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다시 남으로는 산동지방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은 모든 인류의 DNA는 한 사람의 DNA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단언컨대 바로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할 때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이 최초의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었고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스라엘 땅의 다윗을 택하셔서 다윗의 자손을 통한 세계 열방의 구원의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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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5-21 <사마리아성에 큰 기쁨>

본문은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당하는 핍박을 계기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이제는 땅끝까지 복음전파가 시작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의인이 그리고 교회가 핍박을 당하나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정하신 일을 이루십니다.

○ 당시 헬라계 유대인으로 여겨지는 빌립이 이 지역의 전도자가 된 것은 그가 정통 유대인보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감이 적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적재적소에 파송하여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출발(出发)에는 耶稣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당시 유대인들이 꺼리던 사마리아 지역을 몸소 찾아 복음을 전(传)하신 일이 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 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간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는 지역간의 대립과 갈등이 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도 영향을 미쳐 사람들이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 갈라지고, 민감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는데도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복음이 뭇 사람들의 정치상 견해를 이겨야 합니다.

[4절]에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했는데 [5절]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고 기록하여 ’복음의 말씀‘ 내용을 더 구체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전도 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막연히 하나님을 믿으라” 교회에 가면 좋다 이렇게 전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좀더 과감하게 살아계신 주 예수님을 전해야할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8: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여기 ’한마음으로‘ 호모뒤마돈(ὁμοθυμαδόν) 이 단어는 신약에서 [11회] 쓰였는데 그 중 [10회]가 사도행전에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다른 본문에서는 ‘다 같이 기도하다' ’만장일치로 가결하다' 혹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상황에서 ’일제히' (행 7:57;18:12;19:29)라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 [11회]의 [10회]의 사용이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한 사람의 언어습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우리가 알기로 [누가]라는 한 사람의 기록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랐으나 [마가]의 이적의 기사들을 그대로 인용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에서 그는 <가나의 청년을 살리심> <깊은 데로 그믈을 던지라> 등 몇가지 외에 새로운 많은 이적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 할 정도로 수많은 제자들이 행한 이적들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는 발견하는 것은 그는 그가 알고 있는 사건들에 집중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빌립은 성령의 놀라운 권능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그를 따랐다’ 했습니다. 즉 빌립의 전도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목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며 그들의 믿음과 교회성장을 이끌어냈습니다. 교회성장과 부흥은 말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입니다.

[민수기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땅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시고 홍해와 광야에서 많은 이적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잊고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를 행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14:17]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권능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도 자연현상도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내게 권능을 주옵소서 하지 않았습니다.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지금의 번영과 자유, 인근 나라들의 무수한 자연재해 중에도 보호하심을 그저 우연의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왜요? 마음이 완악한 때문입니다.  감사를 알고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만왕의 왕되신 주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면 하나님도 나를 소홀히 여기십니다.

 

[사도행전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사도행전 28: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당시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들에게 전한 것은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12]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라 했는데 그가 행한 이적들  [7] ’귀신이 소리지르며 떠나가고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음을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임을 밝인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말은 예수의 이름이 어떤 기적을 나타내는데 주술에 쓰이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능력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라는 말과 같습니다.

 

[8: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했습니다. 사마리아성에 복음이 전파되고, 성에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때 곳에 기쁨이 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마음의 평화가 임하고 담대함과 형통함이 임하는 것입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에 평안과 담대함입니다.

[8: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자칭 큰 자라 하니’ 이 말은 [행 19:27]에 에베소의 우상 ‘큰 여신 아데미’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시몬은 ‘마술'을 행하여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자신을 스스로’큰 자'로 말하며, 자신을 신적인 존재인 양 가장하였습니다. 이는 사단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놀라게 하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시몬의 마술에 놀라 ‘정신을 잃다' 라는 뜻으로 이성을 혼미케 하여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판단 능력을 상실한 것을 말합니다. 시몬의 마술은 단순한 손장난이나 속임수라기보다는 그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빼앗는 것입니다. 단순한 마술에 놀랄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마치 모세가 기적을 행할 때 애굽의 마술사들이 방해하고 혼동하게 하였듯이 사물에 판단능력을 상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단이 하는 일의 특성은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마음이 혼미하여 있습니다. 어떤 대선 후보가 국민들을 상대로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혹세무민하는지 우리의 자유와 화합을 해치고 있는지를 비교해야 합니다. 이 사람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다. 라는 양비론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사람은 지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와 국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김일성 일가를 지지하는 사람을 반대합니다.

 

 시몬도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 했습니다. 이처럼 그의 외형적 모습은 아주 신앙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는 시몬의 열심이 대단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시몬의 순수한 신앙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인격적인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빌립이 행하는 표적과 큰 능력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만족과 세상에서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원래 사마리아인들의 종교는 혼합 종교로 우상 숭배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는 가증스러운 죄악이었고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더러운 자로 여겼습니다. 그런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옴 안에서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바르게 섬기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된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케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종과 지역 정치적인 이념을 초월하여 하나 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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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6-17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 사람은 식물도 고등동물도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입니다. 모든 인간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을 본적이 없으므로 자기 나름대로의 신을 만들어 섬기고 있으니 그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려면 네 마음 속을 들여다보라' 하며 내면의 여행과 명상을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을 찾다가 절망하여 '하나님은 없다' 외치며무신론을 말하며 무한한 우주에서 생명체를 찾아 진화론을 증명하려 하지만 이 또한 헛된 일입니다.

◯ 그러면 사람이 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죄로 더러워진 존재이며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 간혹 성경을 좀 안다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구약성경을 들추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질투하고 화를 내는 무서운 하나님이다' 라며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신과 우리의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일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이 알려주는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구원의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대적하는 세력이 많습니다. 마귀는 거짓말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좋은 음식일수록 빨리 상합니다. 바른 하나님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41:21]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하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 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① 우리가 참 하나님을 아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의 하신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 신 외에는 누구도 장래의 일을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하시고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 예수님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이방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주이십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분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예수님이 행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실 때 이적을 통하여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임을 증거하셨습니다. 모세를 애굽으로 보낼 때,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증거할 때, 하나님은 이적을 통하여 선지자 됨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사탄 마귀도 이적을 행한다. 어찌 구분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를 대적한 마술사들은 사람을 미혹할 뿐입니다. 참 능력이 그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8절]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말하며 하나님을 보여달라 청합니다.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미 자신의 바로 곁에 있음에도 알지 못합니다. 그 분은 늘 우리 곁에 함께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하신 일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 1:18] "본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었는 득생하신 하나님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 오순절 사건 이후 제자들은 능력 있는 선포를 통해 삼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고(행 2:41) 사람들은 병자들을 메고 나와 그 위에 베드로의 그림자만이라도 지나가기를 원할 정도였습니다(행 5:15). 또한 사도 바울 역시 얼마나 그 능력이 컸던지 그분이 지녔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가져다가 병든 자 위에 덮어도 병과 악귀가 떠나같 정도였습니다(행 19:12).  ◯ 역사 이래로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안에 사람을 살리는 끝임없는 이적과 증거가 있었으므로 가능했습니다.

◉ 서머나교회 폴리갑의 제자 이레뇨 (주후 130-200) ; 주 예수의 진실된 제자들은 각 사람이 분명히 주께로부터 은사를 받아 기적을 행하였다. 은혜를 베풀고 기적을 행하니 이 일로 해서 어떤 이들은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고 정결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가입하였다. 또 어떤 제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를 알았으니 그들은 이상을 보고 또 예언을 한다. 어떤 제자들은 치료의 은사가 있어,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고쳤고, 심지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일도 있었다! 그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이 지금 아직도 우리 가운데 살아 여러 해가 지났다.

◉ 어거스틴은 또 가슴에 종양이 생겨 의사가 속수무책인 경건한 귀부인을 언급했다. 그녀가 후에 신의 도움 치료하였다. 하자 의사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참말로! 나는 또 어떤 놀라운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알았네! 부인은 의사의 못 마땅해 하는 모습에 “예수님은 죽은 지 4일 된 사람을 살렸는데, 내 종양 쯤이야 무슨 어려운 일이냐 했습니다.

◉ 영국의 역사가 기번(Edward Gibbons)은 - 로마 제국의 쇠망사 - 기독교가 급격히 발전한 다섯 가지 원인 중 하나는 초기 교회 안에서의 신기한 권능이 있다. 사도시대 이래로 방언, 이상, 예언, 축사가 있었고 죽은 자가 회생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기번은 계속해서 그가 몸 담고 있는 이 세대에서는 가장 독실한 기독교인들조차도 기적의 진실을 은근히 의심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 그러나 사람들은 끝없이 표적을 보고 싶어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본다면 믿겠다"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본다고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27]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들을 완벽하게 수행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주님의 하고자 하시는 일이 철저하게 하나님과 뜻과 일치하고 계셨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마음과 그의 일이 하나님의 뜻과 그의 길에 일치하는 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일을 가는 길이 하나님 뜻과 일치하지 않고는 결단코 그 길이 결코 형통할 수 없습니다.

◯ 믿음과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기 위하여는 그의 말씀을 늘 가까이 대하여 읽고 그 분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원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영으로 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자신을 보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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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1-12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 사건은 실로암의 사건은 제자들이 맹인을 보고 그 사람의 실명 원인에 대하여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인간의 불행과 고난을 죄의 결과로 이해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불행과 고난이 반드시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치유하시면서 또 한편으로 원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셨는데 이는 제8장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 이라고 증거하신 것을 구체적으로 확증해 보이신 사건입니다.

○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우리가’ 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이 빛과 구원이 되셨으니 나는 나의 만족을 이루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리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를 영접하고 믿는다’ 함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라는 단순한 이기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주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주님을 닮겠습니다’ ‘주님을 힘입어 살겠습니다.’ 하는 약속입니다.

○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성경을 외우고 연구하고 계명을 지킨다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책망받는 자가 된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탐심이 가득하여 세상의 부귀영화를 구하여 산 까닭입니다.

○ 왜 이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고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의 명예와 부귀 쾌락을 따라 살아가는 까닭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지금 정계에 기독교인이고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 60%에 이른다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왜요? 자신이 기독교인 답게 살지 않고, 자신이 기독교인 임을 밝히지 않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로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요한복음 8:12]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의 빛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부인한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주님을 따른다’ ‘자기를 부인한다’ 함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주의 종입니다. 그것은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향하여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1:37,38]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안전과 꿈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말대로 자신의 몸에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랬습니다. ○ 요셉은 자신의 일평생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린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를 보호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자기부정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문제는 자신의 만족을 구하여 살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귀한 것이 나의 뜻이고 나의 만족입니다.

○ 오늘의 주제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입니다. 

[요한복음 9: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식수원입니다. 그 못은 구약 시대 히스기야왕이 앗수르 왕 산헤립 군대가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하여 예루살렘 성밖의 수원지 기혼샘물을 지하수로를 파서 성안으로 끌어들여 만든 못입니다(사 22:9-11). 그래서 그 실로암 연못의 이름의 뜻이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로 지어진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소경이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아 구원에 이른 것처럼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의 샘으로 보냄을 받아 눈이 밝아 주님을 보라 하는 것입니다.

○ 주님은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했습니다. 이러한 치유 방법 때문에 甲論乙駁 이 있습니다. ○ 주님은 사람들을 치유할 때에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한 귀머거리에게는 손가락을 그의 양귀에 넣고 또 침을 뱉아 혀에 대시는 방법으로 치유하셨고, 다른 소경에 대해서는 직접 그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는 방법을 쓰기도 하셨습니다. 문둥병자에게는 그 몸에 직접 손을 대사 치유해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말씀만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점잖게 말씀으로 치유하시면 될 것을 저런 불결한 방식까지 사용하나? 화가 나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이 밝아져 밝은 눈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순종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는 굴욕이라 생각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 세상에는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있고 무익한 사람이 있습니다. 무익한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한 사람입니다.

○ 예수님은 한 자루 양초처럼 사신 분이십니다. 어두운 곳을 밝히려 기꺼이 자신을 태워 드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 이 세상은 희생을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과 이익 편리를 찾아 분주합니다. 그들의 삶은 불나방과도 같습니다. 한 순간의 영화를 찾아 헤이다가 마지막에는 자신까지 헛되이 불살라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목사 선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평범한 회사의 부장입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늘 “어찌하면 교회가 평안할까. 어찌하면 모든 이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할까.” 근심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의 직업은 어느 회사의 부장이라 하기 보다는 그의 직업은 그가 가장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곳인 교회와 교우들이었고 가정의 아버지였습니다.

○ 자신이 선 자리에서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자리가 어디이든지 우리는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기쁘심을 구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과 출세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하나님의 자녀는 힘있고 눈밝은 젊었을 때에 온전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섬기는 생활도 섬김의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가 지나가면 충성하고 싶어도 충성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나의 시간과 내게 주신 은사를 주를 위하여 쓰기 원합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 인도 하실 것입니다. 피하여 물러가지 마십시오. 

[에베소서 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해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자같이 하여 세월을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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