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12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 사건은 실로암의 사건은 제자들이 맹인을 보고 그 사람의 실명 원인에 대하여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인간의 불행과 고난을 죄의 결과로 이해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불행과 고난이 반드시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치유하시면서 또 한편으로 원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셨는데 이는 제8장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 이라고 증거하신 것을 구체적으로 확증해 보이신 사건입니다.

○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우리가’ 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이 빛과 구원이 되셨으니 나는 나의 만족을 이루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리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를 영접하고 믿는다’ 함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라는 단순한 이기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주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주님을 닮겠습니다’ ‘주님을 힘입어 살겠습니다.’ 하는 약속입니다.

○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을 영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잘 알고 성경을 외우고 연구하고 계명을 지킨다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책망받는 자가 된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탐심이 가득하여 세상의 부귀영화를 구하여 산 까닭입니다.

○ 왜 이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고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의 명예와 부귀 쾌락을 따라 살아가는 까닭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지금 정계에 기독교인이고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 60%에 이른다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왜요? 자신이 기독교인 답게 살지 않고, 자신이 기독교인 임을 밝히지 않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실제로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요한복음 8:12]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의 빛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을 부인한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주님을 따른다’ ‘자기를 부인한다’ 함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주의 종입니다. 그것은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향하여 자신을 ‘주의 여종’이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1:37,38]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안전과 꿈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말대로 자신의 몸에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랬습니다. ○ 요셉은 자신의 일평생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린 예수와 그 모친 마리아를 보호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자기부정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의 문제는 자신의 만족을 구하여 살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귀한 것이 나의 뜻이고 나의 만족입니다.

○ 오늘의 주제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입니다. 

[요한복음 9:6,7]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식수원입니다. 그 못은 구약 시대 히스기야왕이 앗수르 왕 산헤립 군대가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하여 예루살렘 성밖의 수원지 기혼샘물을 지하수로를 파서 성안으로 끌어들여 만든 못입니다(사 22:9-11). 그래서 그 실로암 연못의 이름의 뜻이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로 지어진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소경이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아 구원에 이른 것처럼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의 샘으로 보냄을 받아 눈이 밝아 주님을 보라 하는 것입니다.

○ 주님은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했습니다. 이러한 치유 방법 때문에 甲論乙駁 이 있습니다. ○ 주님은 사람들을 치유할 때에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한 귀머거리에게는 손가락을 그의 양귀에 넣고 또 침을 뱉아 혀에 대시는 방법으로 치유하셨고, 다른 소경에 대해서는 직접 그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는 방법을 쓰기도 하셨습니다. 문둥병자에게는 그 몸에 직접 손을 대사 치유해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말씀만으로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점잖게 말씀으로 치유하시면 될 것을 저런 불결한 방식까지 사용하나? 화가 나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소경의 눈이 밝아져 밝은 눈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순종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는 굴욕이라 생각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 세상에는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있고 무익한 사람이 있습니다. 무익한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한 사람입니다.

○ 예수님은 한 자루 양초처럼 사신 분이십니다. 어두운 곳을 밝히려 기꺼이 자신을 태워 드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 이 세상은 희생을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과 이익 편리를 찾아 분주합니다. 그들의 삶은 불나방과도 같습니다. 한 순간의 영화를 찾아 헤이다가 마지막에는 자신까지 헛되이 불살라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목사 선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평범한 회사의 부장입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늘 “어찌하면 교회가 평안할까. 어찌하면 모든 이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할까.” 근심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의 직업은 어느 회사의 부장이라 하기 보다는 그의 직업은 그가 가장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곳인 교회와 교우들이었고 가정의 아버지였습니다.

○ 자신이 선 자리에서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자리가 어디이든지 우리는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기쁘심을 구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과 출세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하나님의 자녀는 힘있고 눈밝은 젊었을 때에 온전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섬기는 생활도 섬김의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가 지나가면 충성하고 싶어도 충성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나의 시간과 내게 주신 은사를 주를 위하여 쓰기 원합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 인도 하실 것입니다. 피하여 물러가지 마십시오. 

[에베소서 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해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자같이 하여 세월을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