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1-11 <범사에 양심을 따라>

1-3절을 보면 바울 외에 다른 두 부류의 종교인이 나옵니다. 하나는 사두개인이고 하나는 바리새인입니다. 사두개인은 당시의 종교적 지위를 장악한 사람들로 성전예배를 강조하였고 바리새인은 회당예배를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의 대표가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대제사장은 유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제사를 총괄하는 인물이며 율법으로 백성을 가르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전해석은 자유분방하였고 자의적이었지만 그들은 성전을 신성시하며 그들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축복으로 여겨 지켜나가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산헤드린의 모든 공희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의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아마 당시의 사두개인들은 당시 대제사장들은 스스로를 경건한 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 그런데 바울이 산헤드린 재판정에서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말을 했다는 이유 만으로 제사장은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바울의 입을 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산헤드린 심판정의 권위에 대항한다. 대제사장의 권위에 대항한다는 말이지요. 바울은 이에 대하여 ‘회칠한 담'이란 책망을 합니다. ’회칠한 담'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한 기초 위에 세운 흙벽돌 담을 단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겉에 회를 바른 것입니다. 외적으로 경건하여 보기에 좋으나 실제로는 자신의 불의를 감추는 표리부동한 행동을 말합니다.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 바울은 공의로운 재판이 율법의 정신임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율법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지켜져야 하리라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 분명 대제사장인 아나니아는 이방인 로마 군인도 하지 않는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잡아 죽이는 것이 산헤드린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고, 유대종교가 분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성전예배가 방해받지 않는 것이 민족을 구하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의였습니다. ○ 그러나 실제로는 이 모든 행위가 자신의 영예와 부귀 권세를 지키려는 내면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런데 그는 지금 자신의 하는 일이 민족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바울은 자신을 어떤 인물로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 했습니다. 이 말에서 바울은 자기 안에 내재된 도덕률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이 회심한 이후 마음에 다시 심긴 복음의 진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마음에 양심을 주심으로 그릇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보통 양심이란 일반적인 의미로 개인의 도덕적 기준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양심이 다 다릅니다. 베드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 말했고 바울은 디모데서에 화인 맞은 양심이 있다 했고, 디도서에는 더러운 양심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양심은 가치관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보고 배운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에게 선한 양심은 만들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선을 분별하게 하셨으나 사람은 죄로 인하여 이러한 양심의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 요즈음 노년들이 황혼이혼을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왜요? 많은 부부들이 주장만하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성내고 큰소리 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줄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그리고 이전 세대에게 그렇게 보고 배웠으니까요. 사람은 본대로 배우게 됩니다. 부모가 늘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들도 부부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해하고 인내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3:5]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 사도 바울은 그러한 그들을 향해 적대 감정을 가지고 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연민외 마옴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부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해 모였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을 형제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그는 말하기를 " 동족은 그를 핍박하였지만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길 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롬9장) ○ 주의 자녀는 아무리 상대가 원수를 대하 듯 할지라도 끝까지 선대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 이삭은 아비멜렉과 그랄의 목자들이 끝없이 그를을 괴롭히고 무리하게 대하였지만 그들에게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세우신 왕을 끝까지 선대하였습니다.

○ 저는 최근까지 "지금시대는 군주시대가 아니다. 국민이 주인이다. 부정선거를 행한 자는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 미쳤다. 제 정신이 아니다." 함부로 말했습니다. 저는 최근까지도 "김일성과 김정일은 왜 고이 갔을까? 왜 천벌을 받지 않았나? 불공평하다. 마귀의 자식들이다." 말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어떤 미국의 목사님이 “김정은을 위해 기도한다. 환상 중에 주님이 저를 두고 심히 슬퍼하신다.” 라고 간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과거에 한국교회도 김일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기도가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 사실 제 마음은 그동안 정치권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차 있었고, 제 입에는 비판과 분노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도의 바람직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 물론 바른 정의를 밝히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 바울의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향한 "회칠한 담이여" 이 책망은 실제로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는 그가 유대신앙 최고의 권위를 가진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모른 상태에서 한 말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다 했습니다. ○ 나의 정의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내가 저 사람을 깨우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사과하는 데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 다윗은 일찍이 자기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의 문을 지켜달라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습니다. ○ 입술의 열매를 짓는 여호와라 했습니다.

[사도행전 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 그러므로 ‘그날 밤'은 바울에게 있어서 외롭고 힘들고 지쳐서 두려움이 엄습하는 밤이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격려가 있었기에 바울은 이후에 로마에 갈 때까지 고난 중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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