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로마서 10:1-10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로마서 10:1-10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민족 사랑의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기를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는 민족의 차별이 없고 결국 온 민족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역사 한 문화 속에서 아픔과 기쁨을 함께한 사람들입니다. 돈 때문에 민족을 외면하고 자기민족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에스더 8:6] 내가 어찌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
○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곳은 바울 사도에게는 사지와도 같았습니다. 바울 사도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교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가 동족들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에서 자신의 황폐한 고토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날 자신들이 나라를 빼앗겨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유리 방황하는 생활을 한 원인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은 까닭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로 율법의 완전한 성취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 받으려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특별한 열심이 있어 성수주일은 물론이요. 율법의 말씀을 늘 읖조리며 외우고 연구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10: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사람들은 ‘자기 의’를 말합니다. ‘자기 의’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옳음’ ‘자신의 공로’ ‘자신의 주장과 방식’입니다. ‘자기 의’와 노력으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들은 맹인과도 같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고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로 구원받으려는 시도는 모든 인본주의 종교와 타락한 인간의 특징입니다. 모든 죄의 근본이 교만인데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고,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구하는 죄입니다. 이는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타락한 아담과 하와로부터 유전받은 죄입니다.
◉ 어리석은 인간의 노력과 열정이 때로 자식을 망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저는 어떤 이주민 엄마가 돈을 버는데 바빠 자녀를 돌볼 시간이 없어 어린 자녀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나중에는 차라리 일터로 보냈다는 말을 듣고 탄식했습니다. 많은 이주민들이 헌금의 부담으로 교회에 발을 딛지 못합니다. 경제적으로 계산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더 풍성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롭다’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이 지나쳐 ‘하나님의 의’를 가리는 역기능을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주의 자녀들이 ‘내 열심’ ‘내 수고’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인정 받으려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다.” “주를 믿는 자는 이래야 한다.” 말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정죄의 도구가 되고, 자랑의 도구가 되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아 지키라고 주어진 법이지 자랑과 판단의 도구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결국 세상의 불신자나 이스라엘이나 동일하게 육신의 생각에 잡힌 자들이었습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여기서의 ‘올바른 지식’ 이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복음을 가리킵니다. 주를 위한 열심도 좋지만 우리는 잠시 멈추어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찌 하셨을까?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지식을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요즈음 지연과 혈연 이익에 매여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성전을 건축하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소망을 거절하셨습니다. 이에 다윗은 바로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에서 ‘의(義)’ 字를 분해하면 나(我) 자신을 양(羊)으로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려놓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사람이 자기를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여기는 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고 다 아는데 그리스도를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요 자기 스스로는 결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침이 되었다.’ 란 말은 ‘완성’ 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10:6,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7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신명기 30:13-14]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 바울 사도가 모세의 말을 인용하여 인간이 구원의 진리에 이르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님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바울이 신명기서에서 인용한 이 말은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한 후 그 율법을 지키기가 쉽다는 뜻으로 말한 것인데 바울은 이를 모세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일로 해석한 것입니다. ○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기 위해 하늘로 올라 가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그리스도 주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죄인이며 무능력합니다. 주님이 내 대신 죄짐을 지고 가셨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심을 이루기 위해 음부 땅 속 아래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친히 땅 속 깊은 음부까지 가셨고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나의 할 일은 오로지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일입니다.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 하였습니다. 믿음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머리로 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나와 그리스도의 전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주님의 인격과 나의 인격이 만나는 것이 곧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입술로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은 앵무새도 훈련시키면 할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일은 믿지 않는 종교 연구가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외식함으로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여 장애인 시설에 가서 봉사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은 성도들 외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라는 말은 주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 헬라어 ‘퀴리오스’입니다. 주는 종의 생사가 권한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죽음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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