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설교2022에 해당되는 글 50건
- 2022.09.11 로마서 4:1-8 <의롭다 여기심> 1
- 2022.09.03 사도행전 19:1-10 <성령을 받았느냐>
- 2022.08.27 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에 전도하다>
- 2022.08.21 사도행전 2:14-27 <선지자 다윗>
- 2022.08.13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2022.08.07 요한복음 15:1-10 <참 포도나무>
- 2022.07.31 요한복음 4:1-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2022.07.24 누가복음 18:1-8 <불의한 재판장>
- 2022.07.16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와 누룩>
- 2022.07.10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 2022.07.02 마가복음 9:14-29 <기도 외에는>
- 2022.06.26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 2022.06.19 마태복음 22:34-46 <가장 큰 계명>
- 2022.06.12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
- 2022.06.04 마태복음 9:9-13 <긍휼을 원하심>
글
로마서 4:1-8 <의롭다 여기심>
로마서 4:1-8 <의롭다 여기심>
◉ 저는 얼마전에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며 아 우리도 이런 때가 있었구나 새삼 알았습니다. 박지원은 다들 아시다시피 조선 후기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그가 압록강을 지나 북경으로 가는 길에 경험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한문 몇 귀절을 써 주면 이를 본 사람들이 그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술과 밥으로 대접하더라 기록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조선의 개화기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한자 글귀 조금 아는 것으로 위세를 부리고 자랑하였는데 많은 사람이 배운 사람을 우러러 보았던 것입니다. 몇 자 아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헛되고 헛되니하고 노래한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는 모든 학문과 지혜 부귀를 누린 자이고 다윗의 하지 못한 성전건축을 마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우상숭배하는 이방여인들을 부인으로 맞아 나라의 분열의 씨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도 결국 헛되게 산 사람입니다. 우리는 참된 힘과 축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잘 붙잡아야 합니다.
○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것을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진실되게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아브라함의 혈통은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존귀한 혈통입니다. 그는 셋과 에노스의 믿음의 혈통을 이어받은 노아의 아들 셈 계열의 10대 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의롭다함을 얻은 근거로 그의 혈통과 인품 그의 신앙적 수고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육신적 노력으로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있다면 아브라함에게 ‘의롭다 잘했다’ 하신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사람은 다 완악하고 죄 많고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구원 받는 길을 주셨으니 이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 바울은 정당한 임금을 받는 일꾼을 예화로 들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떤 사람에게 얼마의 임금을 주기로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다면 그는 그 사람에게 약속된 임금을 지불할 의무를 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포도원 예화에서는 ‘일하는 자’ 의 수고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가 수고의 댓가가 아니라 은혜로써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아주 중요한 명제가 담겨 있습니다. 첫번째 명제는 일한 것이 없어도 이고, 두 번째 명제는 경건치 않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것이 없더라도, 경건치 않은 자일지라도 관계치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이 얼마나 수고하고 얼마나 일했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가 지금 하나님 안에 있느냐 하나님을 믿느냐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진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히려 한 일도 없는 자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 아브라함은 자기 힘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일을 안 하는 자’ ‘못 하는 자’ ‘불능한 자’였습니다. 그가 아내를 누이라고 팔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아내를 구원하여 돌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으로 애굽땅에 내려갔지만 하나님은 애굽의 백성들로 그를 두려워 하게 하였고 아브라함 자신이 수고하지 않은 거대한 부를 이루어 남방 땅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의 힘으로 동방의 왕 그돌라오멜에게 포로로 잡혀간 롯을 구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전쟁에서 이긴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간섭이었습니다. 그가 약속의 자녀를 얻기를 바랐지만 그는 이미 다 늙은 노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무엇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까?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 주 예수님이 하루는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마태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니 따랐다 했습니다. 평생에 이스라엘 백성의 미워하는 일만 하던 마태,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던 마태를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님이 고마워 잔치를 벌였습니다. 잔치에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왔습니다. 거기에 예수님도 함께 하셔서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 후에 마태로 인해 많은 죄인과 세리들이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에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주님이 좋습니다. 잘한 것 하나 없고 못나고 무능한 마태와 같은 나를 불러주신 예수님, ‘내가 너를 안다’ 하시는 주 예수님이 좋습니다.
○ 인간적인 자랑으로 하면 유대인 가운데서 누구도 사도 바울의 배경과 그의 수고와 공로를 따라올 자 없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요 율법의 의로 흠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 최고의 율법 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배웠습니다. 헬라 철학에 정통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런 그가 이런 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가 가진 모든 외적인 스팩들과 배경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했습니다.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육체적인 것으로 자랑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적인 자랑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여러분은 대한민국이 10대 무역국에 들어간 것이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이 우리 국민의 노력과 총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이는 교육열이다 어떤이는 일제식민의 경험이다 어떤이는 미국의 원조다 다양하게 말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무수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국민이 노예의식과 부패에 찌든 대한민국의 성장과정에 수 많은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지금도 세상의 온갖 재해 가운데서 보호받고 있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이 다시금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 다윗은 모든 조건을 갖춘 왕이었습니다. 시인이요,음악가였습니다. 장군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지만 원수들은 그 앞에서 패하여 물러갔습니다. 전쟁을 했다 하면 백전백승이었습니다. 그의 나라는 나날이 확장되었고, 그의 왕위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견고해져 갔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려주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이루어낸 이런 업적으로 그를 의롭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밧세바의 일로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범하기 전까지는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죄를 숨기고 고민할 때, 비로소 이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이 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복의 문이 닫힌 것과 자신이 징벌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자복할 때 말없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이었습니다. 다윗이 노래합니다.
[시편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 저희 아버지가 지금 93세이십니다. 지금은 몸이 불편하여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갈 때마다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제가 가진 사명을 일반으로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성경을 해석하여 성경을 깊이 깨닫도록 도움을 주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무오성(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일성(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일관성)을 알려 주는데 힘을 쓰고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저와 예배드리는 것을 너무 기뻐하십니다. 그동안 교회를 멀리하던 저의 형님도 성경말씀의 해석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예배에 참여합니다. 저의 아버지가 예배를 마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시간처럼 귀하고 기쁜 시간이 없다. 하루에 최소한 5장의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하셨습니다. 그 연세에 눈이 침침하시지만 그래도 성경을 읽으시는 저의 아버지를 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참 대단하다고 여깁니다. 저의 아버지는 저의 가장 큰 기도의 후원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주 예수의 보혈을 힘입고 나올 때 내 모습 이대로 인정하시고 의롭다 선언해 주시는 고마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전서 8:1-1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1) | 2022.09.25 |
---|---|
로마서 9:14-23 <긍휼의 그릇> (0) | 2022.09.18 |
사도행전 19:1-10 <성령을 받았느냐> (0) | 2022.09.03 |
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에 전도하다> (0) | 2022.08.27 |
사도행전 2:14-27 <선지자 다윗> (0) | 2022.08.21 |
글
사도행전 19:1-10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1-10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바울은 왜 ‘예수를 믿는다’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참 껄끄러운 질문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성령의 內住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가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도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 에베소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구약의 율법에 비추어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임을 회개하고 죄씻음을 얻는 세례일 뿐입니다. 세례 요한도 분명히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리라" 언급하였고 성령의 세례를 대망하였던 사람입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성령을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우리 믿는자에게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열심으로 예수에 관하여 구약을 통해 증거하던 아볼로도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습니다. 성경을 알고, 교회생활을 오래하였다 하여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체험을 한다는 것과는 별개의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왜 세상의 재난을 보고 두려워 하고, 왜 서로들 다투고 미워하고 거짓말 합니까?
○ 오늘 여기 "너희기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에 대해 많은 해석과 오해가 있고 충돌이 있습니다. ① 성령체험의 눈에 보이는 현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므로 '제자'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훌륭한 목회자 아볼로에게 양육을 받은 사람들이며 또 뜨거운 열정의 성경교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성령을 알지 못한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결론은 내릴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시대를 산 구약의 사람들처럼 성령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②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자의 증거로 방언이나 또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영적교통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 영지주의라 합니다. 초대교회 안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니골라당이 그 대표적이 케이스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일괄되게 나타나지 않으므로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와 역사는 다양한 것입니다.
○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믿음과 성령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은 믿는 자에게 반드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성령을 모르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사도들은 예수를 믿음과 성령 받음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여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성령의 도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믿음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지금도 성령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사역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많은 주의 자녀들이 성령의 뜻과 능력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 많은 주의 자녀들이 성령의 임재와 사역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탐심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서 본 것입니다. 성령의 內住하심을 모르는 제자들!
◉ 베드로가 옥에 갇히매 교회가 간절히 그를 위하여 기도하니 천사가 쇠사슬을 풀고 베드로를 옥에서 나가게 하였습니다. 이는 교회의 기도를 들으신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성령이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가 새벽시간에 대문을 두두릴 때 놀랐던 것입니다. 성령을 구하는 사람,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도 성령의 사역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음을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령의 임재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나의 인생과 천지만물과 세상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특별히 바울이 알리고 싶어한 것은 내 안에 內住하시는 성령, 내 안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 충만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사단의 지배하에서 내가 나를 주장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주인 되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성령께서 행하실 때 내가 알고 있다는 것과 모르고 있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믿는자라고 해서 다 성령을 자동적으로 충만을 받고 성령의 뜻을 따르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좋은 것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성령충만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말세를 살아가는 악한 시대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 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지 않다면 왜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성령을 보내셨겠습니까?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성령은 구할 때 임하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했습니다(행 1:14).
[사도행전 19:6,7]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의 안수 직후 사람들은 중에 어떤 이는 방언을 하고 어떤 이는 예언을 했는데, 그 수가 열두 명 쯤 되었다 했습니다.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한 것은 아닙니다. 모인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에 눈에 보이는 성령체험을 입은 사람이 열두 사람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방언을 하고 어떤이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성령임재의 체험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사람들의 눈에 현상으로 보이는 성령체험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체험이 있습니다. 이렇거나 저렇거나 중요한 것은 성령의 뜻과 인도하심을 알고 성령의 도우심을 아는 것, 성령을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 지금 대림동에는 많은 조선족 교포들이 모여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천지의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중국 심양에 있을 때는 길을 가다기 부딪치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조선교포와 한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예수 믿는 사람을 거의 보기가 힘이듭니다. 중국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던 사람도 한국에 들어와서는 직장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이곳에 한글을 공부하러 온 사람 중에도 약간의 의사소통을 배우고 나면 돈벌이를 나가 계속공부를 중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생활은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돈을 쫓아가면 결국 후회하는 인생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 당시 에베소는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울 정도로 많은 종족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이교도의 문화가 자리잡은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는 신전을 중심으로 한 이교적 우상숭배와 마술이 범람했고. 종교적 매춘이 성행했는데, 이러한 이교 문화의 중심에는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에서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한 이교적 문화로 많은 수익을 올리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헛된 삶입니다.
○ 성령의 임재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했습니다. [14절]에 에베소에는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들린 자에게 귀신을 내쫓으려 하였습니다. 그 때 악귀가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했다. 했습니다. 이 일을 본 에베소의 수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사도행전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 성령의 사역은 나의 가족을 고치고, 나의 인생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내 안에 內住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이 땅을 고치고 어두움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9:14-23 <긍휼의 그릇> (0) | 2022.09.18 |
---|---|
로마서 4:1-8 <의롭다 여기심> (1) | 2022.09.11 |
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에 전도하다> (0) | 2022.08.27 |
사도행전 2:14-27 <선지자 다윗> (0) | 2022.08.21 |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0) | 2022.08.13 |
글
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에 전도하다>
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에 전도하다>
[1절]을 보면 이고니온에 이른 두 사도는 다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증거합니다. 이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옴을 증거하다가 유대인들에게 호되게 당한 두 사람입니다. 받아들이기 싫다면 차라리 외면이나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박해를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힘만으로 하는 것도 부족해서 이방인의 유력자들까지 동원했습니다. 이쯤되면 아무리 자기 민족이 귀하다 하더라도 신물이 날만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13: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와서 또 다시 유대인 회당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전도란 그저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관용의 마음이 있지 않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편히 살 생각을 한다면 전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리고 하신 말씀이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주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원수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 요즈음 한국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이 관용입니다. 교회 안에 파벌이 있고, 정치적인 색깔이 다른 사람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망해야 한다. 중국이 망해야 한다. 저들에게 재해가 닥치는 것을 기뻐하고 고소해 합니다. 북한의 인민이 죽든 말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될 말입니까? 사람이 비판하고 충고하고, 책망하며 “세상을 바로잡는다” 하기 전에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옳은 소리를 말하기에 앞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의 마음에 관용이 가득할 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 세상에 못난 사람, 인격이 삐딱한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는 “예수천당 불신지옥!” 외치듯이 분노와 열정 지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용을 베풀 때 저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절절 끓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 양육은 복음 전파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3절]을 보면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는 안디옥에서와는 달리 ‘오래’ 있었다고 말합니다. [1절]에 보면 이고니온에서는 이미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양육을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의 특징은 바로 지속적인 양육입니다. 이렇게 두 사도가 성도들을 양육하기에 힘쓴 것은 이고니온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에베소에서는 '두 해'를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을 가르쳤습니다. 수리아 안디옥에서 그는 교회교사로 있었습니다.
○ 아무리 교인수가 많으면 무엇합니까? 교육이 되지 않으면 훈련 받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지식없는 감정적인 신앙에 불과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발걸음마다 죽음의 위협을 마주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고 참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의심하며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 많은 은혜를 입고, 이적과 기적을 많이 보았다고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병에서 치유를 보았다고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들은 모든 말씀과 사건을 믿음과 결부시켜 성숙한 자가 되야 합니다. 성도다운 성도가 되려면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닌,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밥만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과 생각의 집합체이고 말씀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 그런데 교회 교육이 문자적인 지식의 습득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설교의 재료를 얻기 위하여, 혹은 깨달음이라는 만족을 위하여 열심히 배우지만 지식적인 배움에 머무르는 때가 많습니다. 중국에서 공부과정이 있으면 사람들이 한없이 몰려 옵니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배운다 함은 지식을 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쌓이는데 사람이 변화하지 않으면 교만하여질 뿐입니다. 배운다함은 예수님의 뜻을 깨달아 아는 것만 아니고, 그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며, 주님을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교회 안에 많은 교사가 있어 가르침과 양육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훗날 모교희인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도움의 손길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전세계를 향해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양육이 없는 전도는 미완성의 전도인 것입니다. 오직 양육을 통해서만 귀한 주의 자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양육에 심혈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데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3절]을 보면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두 사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전도의 결실을 맺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전도자는 힘 있게 복음을 전하지만 저들의 말을 증거하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를 구원하시고 보내실 자를 보내시고 감동을 주사 마음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한대 때때로 어떤 은사자들은 자신이 사람을 고치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능력자인양 추앙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표적과 기사를 보이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흐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4절]은 복옴 전파의 결과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 전파의 결과 이고니온 사람들은 유대인을 따르는 무리와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는 무리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이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 우리는 흔히 복음은 세상에 평안과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틀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복음은 성도와 세상을 구분하여 둘로 가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진리가 이르렀으므로 참과 거짓이 구분되고 이 땅에 빛이 이르매 광명과 어둠이 나누어 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부끄러워 하지도 않습니다. 아담도 죄의 심각성을 몰랐으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매 그들은 두려워 하였고 부끄러워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이 이르는 곳에서 평안이 이루기까지는 죄가 죄임을 드러내는 아픔과 치료의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51-53]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며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지금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그 자리가 사명의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으로 사람을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곳에 생명의 싹이 나고 자라고 믿음의 열매가 맺혀질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따듯한 아궁이가 있고 참외와 수박을 먹던 애굽의 생활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긴긴 40년의 광야에서의 방황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마르는 일도 배고픈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외적의 위협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라 했습니다. 세상에 이 생명을 구원하는 일보다 귀한 일은 없습니다.
[7절]에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은 도망쳐 루스드라와 더베에 이르러 또 다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4:1-8 <의롭다 여기심> (1) | 2022.09.11 |
---|---|
사도행전 19:1-10 <성령을 받았느냐> (0) | 2022.09.03 |
사도행전 2:14-27 <선지자 다윗> (0) | 2022.08.21 |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0) | 2022.08.13 |
요한복음 15:1-10 <참 포도나무> (0) | 2022.08.07 |
글
사도행전 2:14-27 <선지자 다윗>
사도행전 2:14-27 <선지자 다윗>
베드로는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께서 붙잡히실 때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를 두려워하여 은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와 열한 제자가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소리를 높여’ 복음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배경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바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약속대로 권능을 받고” 라는 약속대로 성령의 권능을 입은 까닭입니다. 그들은 수천 수만의 백성들 앞에서 그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성령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 그런데 요즈음 불행한 것은 세상이 ‘종교는 모두 같다’ 착하게 살면 된다 말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들 앞에서 ‘아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고 ‘주 예수님만이 영생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담대하게 외치고 전하는 일은 사람의 능력으로, 말주변이 있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 주님이 부활 후에 40일만에 승천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는데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내게는 아직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성령이 함께한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주의 약속대로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계시며 자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십니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베드로 사도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신다’ 하였습니다. ○ 먼저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아직 많이 배우지 못한 막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어린 아이들도 성령을 받으면 하늘의 일을 말하고 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환상이란 거룩한 내일의 비전(vision)을 말합니다. 사람들 중에 가장 비판적이며 욕망이 넘치고 낙심도 잘하는 연령층이 젊은이입니다. 의지는 넘치는데 그들의 나아갈 방향을 잃고 상심하기도 합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성령을 받으면 거룩한 비전을 지니게 됩니다. ◉ 소년 다윗이 주의 영이 함께 함으로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였고 비전과 용기를 품은 자가 되었습니다. ○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꿈은 ‘소망’ 을 가리킵니다. 노인은 소망을 상실하기 쉬운 연령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로한 노인도 성령을 받으면 삶의 의미와 활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지만 믿음으로 아들 얻고 열국을 꿈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있다가 80세의 늙은 나이에 믿음으로 민족을 애굽에서 의 구원하는 꿈을 품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여기서 베드로는 ‘내 남종과 여종들’ 에게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요엘서에 보면 “남종과 여종들에게” 라는 말씀에 ‘내’ 라는 소유대명사를 첨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믿습니다” 말 한 마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거짓신앙이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교회를 다니는 것은 좋지만 미치지는 말아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지만 예수님을 닮아 사는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은 자가 되려면 ”세상도 좋고 하나님도 좋다“ 하는 주변인으로의 삶으로서는 영원히 주님을 닮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성령을 내려 주셨지만, 특벌히 제한된 몇몇 사람들에게만 내려 주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령은 성막 기술자였던 브살렐과 오홀리압,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는 사사들,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했던 왕들, 선지자들과 같이 특별한 직임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한정적으로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시대, 말세를 당하여서는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신다’ 했습니다. 주의 일을 자원하는 자에게 한없이 주십니다.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19.20]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마태복음 24:1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사도행전 2:19.20]은 [마태복음 24장]의 인용입니다. 왜 갑자기 종말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령 강림 사건이 말세의 징조와 관련하여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종말의 때에 악에서 보호하시고 신앙을 지켜 나가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망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려줘야 합니다. ○ 사람은 동물도 식물도 아닙니다. 어떤이는 사람을 고등동물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영을 가진 존재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존재이고,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의 자리에 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 지금 세상에 하나님의 종말의 때의 현상들이 이미 보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연환경의 변화나 식량의 위기, 마지막 전쟁의 때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 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도 사람들은 애써 잊으려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세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의 자녀들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에 탐심을 가지고 모으고 쌓는데 골몰하여 살면서 하나님의 종말의 때가 다가 왔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모순된 행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2:23-24]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4절]은 베드로가 마지막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성령강림의 사건들 제자들이 말하는 각 나라의 방언들 기사와 징조들 이 모든 것들이 증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를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 ”우리 주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 라는 것입니다. ○ 베드로는 예수의 구주 되심을 구약성경을 통해 인증하고자 합니다. 다윗을 언급하면서 다윗이 선지자였다고 말합니다. 과연 다윗은 선지자로서 구원자가 오실 것을 알았까요?
[사도행전 2: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했습니다. 이는 [사무엘하 7:12]의 인용입니다.
[사무엘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 우리는 이 말씀을 일차적으로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성전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견고케 할 솔로몬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 이 표현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그리스도를 염두에 둔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① 다윗에게 주신 약속에서 하나님은 ‘아들’ 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 ‘씨’란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많은 자녀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자는 ② ‘내가 세워’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라야 합니다. ○ 이 표현은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인류를 구원하시는 약속의 자녀로 보이신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자녀가 다 상속자가 아닙니다 [단수] 로서의 하나님의 세우신 약속의 자녀라야 합니다.
○ 이는 아담에게 하신 최초의 구원의 언약으로 장차 여자의 후손을 단수형인 ‘씨’로 표현한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 여자의 후손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세력을 멸망시킬 것을 예언한 말씀인 것입니다.
[시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편 110: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 구약 시대에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이해가 미비하였던 시대였으므로 이러한 견해에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실로 다윗은 그리스도의 안에서 부활을 기다리던 왕이요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백성 앞에서 담대히 전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19:1-10 <성령을 받았느냐> (0) | 2022.09.03 |
---|---|
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에 전도하다> (0) | 2022.08.27 |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0) | 2022.08.13 |
요한복음 15:1-10 <참 포도나무> (0) | 2022.08.07 |
요한복음 4:1-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0) | 2022.07.31 |
글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5절] 주님은 떡과 생선을 제자들과 조반으로 드시고 나서 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원어성경의 바른 해석은 ‘이 모든 것들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작은 배와 잡은 물고기들, 명예와 지위 즉 이 세상의 좋은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사랑에는 분량과 크기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를 사랑한다 말할지라도 그 분량과 크기는 다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더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저것을 더 사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 조건도 없이 사랑하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보다도 더 사랑하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타협하지 않는 사랑, 변치 않는 사랑이 아니라면 인간이 인간에 대한 조건없는 사랑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절대자이며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민족과 국경을 초월한 사랑, 지역과 계급을 초월한 사랑, 이해타산을 하지 않는 사랑,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 사랑,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사랑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페'는 인간적인 관계를 넘어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불변의 사랑입니다. 제자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첫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아가파오' 하며 물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필레오)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필레오'는 ‘우정’의 사랑입니다. 함께 동고동락하는 사람, 같은 뜻을 가진 사람, 나의 친구, 나의 민족, 나의 鄕友를 향한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죄인으로 한계를 갖은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부끄러운 죄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명예를 귀하게 생각하고, 세상을 향해 미움과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하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만 ‘필레오’의 사랑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을 때, 그는 요한과 야고보의 집처럼 고용인을 써서 배를 운영할 정도의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배는 깊은 바다에 나갈만한 배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고 물고기가 있는 곳도 아는 사람인데… 주님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 는 말씀에 순종하여 친구들까지 불러 두배에 넘치는 물고기를 잡고 나서 위대한 주님의 존재를 본 것입니다. 그가 사랑의 대상, 존경의 대상을 만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주님을 따라 집과 처자를 버려두고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 후로 그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도 받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뒤로 그의 삶은 180도 완전히 바뀌어진 생각지도 않은 삶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마가복음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 베드로는 처자를 버려두었을 때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병들었을 때에 안식일에 회당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베드로가 제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 앞에 시몬의 장모가 병든 사실을 말하고 인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불편하게 할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누추한 처지를 보이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 그의 소망은 주님을 닮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데가볼리, 심지어는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도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의 사람들까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이 주님의 손에 고침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 베드로는 주의 능력을 사모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빠짐없이 따라다녔습니다. 주님이 벳세다 들녘에서 물고기 두 마리 마른 떡 다섯 개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신 일이 있습니다. 그 밤에 제자들은 노를 저었지만 어두운 바다 가운데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꼼짝 못하고 지쳐있을 때였습니다. 한 밤중에 주님이 물위로 걸어 오시는 데 모든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아주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데,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고만 있는 그 시간에 베드로는 자신도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주님은 원하셨고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 주님 앞으로 나아갔지만 검푸른 물을 보고 믿음이 약해져 물에 빠져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이 말을 우리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주님의 안타까움입니다. 사실 베드로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는 믿음의 훈련과정이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하셨을 때, 주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른 제자들도 생각은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히 나서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장로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때도 누구보다도 먼저 주님을 고백한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직관적이고 자기 의견에 확신을 갖고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 예고의 말씀
[마태복음 16:21-22]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붙들고 항변하여“ 이 말은 매우 분노하며 예수님을 붙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 그 후로 요한과 야고보가 앞에 나서지요.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사탄이라는 말을 듣고 제자들 저 뒤에서 기가 죽어 물러서 있을 때 야고보와 요한이 나선 것입니다. 아는대로 요한과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들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모셨던 세 사람에 속했던 요한과 야고보는 아직도 주의 영광의 나라가 바로 임할 줄 알고 앞에 나선 것입니다.
○ ‘주의 영광의 나라에서 우편’ 이것은 있지 않은 일임을 베드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집도 아내와 자식도 배도 버리고 지금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자신이 포기한 모든 것에 갚음이 있기를 바랬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헛된 망상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꿈과 주님의 가시는 길은 달랐던 것입니다. 지난 3년간 주님을 따르면서 그가 원하고 원했던 어떤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주님을 버린 것 아니었습니다. ○ 영광의 자리 능력의 자리에 이르기 전에, 주님이 보시기에 베드로가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도 질문하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진실로 원하셨던 질문이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이 나라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 베드로는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 앞에서 말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주님이 잡혀가실 때 베드로는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저들을 물리치고 주의 왕국을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다고 혹시나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을 빼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따라 싸움에 나서는 자가 없었고 예수님도 그의 행동을 제재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무엇인가 해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고 무기력한 패배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드로의 혹시나 하는 기대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결국 그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주님의 보시는 면전에서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말했습니다.
[17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찾아와 어떤 책망도 하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고 그의 부족하나마 변함없는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셨는데, 이는 양들이 주님 자신의 소유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양들은 그분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 구원하신 자들입니다(눅 19:10). 주님에게 있어서 이들은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들입니다. 양을 자신의 양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양을 인도하고 기르시는 분은 목자이신 주님이십니다. 내 사람, 내 교회라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편협한 인본주의이고 탐욕일 뿐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무리를 돌보도록 위탁하신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끝까지 신뢰하셨습니다. 그가 회개할 때에 그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다 용서하시고 가장 귀한 양을 맡기셨습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14:1-7 <이고니온에 전도하다> (0) | 2022.08.27 |
---|---|
사도행전 2:14-27 <선지자 다윗> (0) | 2022.08.21 |
요한복음 15:1-10 <참 포도나무> (0) | 2022.08.07 |
요한복음 4:1-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0) | 2022.07.31 |
누가복음 18:1-8 <불의한 재판장> (0) | 2022.07.24 |
글
요한복음 15:1-10 <참 포도나무>
요한복음 15:1-10 <참 포도나무>
1절을 보면 주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포도나무에, 하나님을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사 5:1,2)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포도원에 심고 가꾸신 포도나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좋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량한 ‘들포도나무'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이스라엘을 택하실 때, 모든 세상 민족 가운데 가장 볼품없는 민족의 하나였습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민족으로 특별한 문명이나 학문도 갖지 못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직 아브라함과 맺으신 당신의 약속에 근거하여 그들에게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시고 그들을 택하사 광야에서 기적을 베푸시고, 연단하시며 그들에게 다른 민족이 갖지 못한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으며 시시때때로 각양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싫어하서는 우상승배, 외식, 형식주의와 같은 들포도만을 맺은 것입니다.
○ 그래서 신약에 이르러 농부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포도원에서 제하여 버리시고 새로운 포도나무를 심으셨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 오늘 예수께서도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비유하심으로써, 온전한 순종과 헌신을 드려 포도원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좋은 열매를 맺으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제 더 나아가 가지인 자신의 백성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를 ‘포도나무의 가지’ 로 비유하시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므로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포도나무 백성이 되어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좋은 재목을 얻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조경수로 사용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좋은 재목이나 조경수로는 사용할 수 없는 지극히 볼품 없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만들어 내는 열매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힙니다. 포도열매는 사람들에게 농부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이것이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를 가차없이 제거해 버립니다.
○ 예수님의 외모는 실로 초라하여 진정 볼품없는 포도나무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가진 것도 없었고 학문적 배경도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앙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홈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재미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저자 존 브라이트는 이사야의 이 예언의 대상이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구약의 포도나무를 알고 계셨던 듯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 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주님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지'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5절]에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 버림 받는 자들도 있을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주' 라고 부른다고 하여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으로부터 잘려나가는 심판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영원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 가지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저 줄기에 붙어 있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 그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줄기에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가지가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줄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오히려 열매 맺는 다른 가지에 피해만 입힐 뿐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열매 맺는 가지로 열매를 더 맺게 하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 그렇다고 이것이 견인(堅忍)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견인교리란 하나님이 한번 택하여 구원한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다시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주의 해야 할 것은 성도인 체하면서 성도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거짓 성도를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 가룟 유다는 12제자 중에 속한 자였는데 믿음을 버리고 지옥의 길을 갔는데… ‘믿음은 잃을 수 있는 것이냐’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표면적 유대인이 있고 이면적 유대인이 있으며, 참 믿음이 있고 거짓 믿음이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이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참 자신의 믿음이 형편 없구나“ 하고 깨닫는 때도 있습니다. 결국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판정은 그 열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을 맺으므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신앙의 열매들은 과연 무엇입니까? ① 먼저 회개의 열매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죄인, 부족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지, 얼마나 이웃에 무관심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존재인지, 얼마나 주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살아가는지를 알고 회개하여 돌이켜야 합니다. ②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새로운 품성을 가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입니다(갈 5:22,23). 기쁨이 없는 삶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자가 마음에 평강이 임해야 합니다. 자비와 긍휼이 없는 자가 긍휼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③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교와 봉사의 열매가 있습니다. 아무도 가지않는 산길의 꽃 한송이도 꿀벌을 부르고 향기를 뿜어 냅니다. 묵묵히 수고하는 농부의 땀이 이 땅에 생명의 알곡을 생산하며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한 봉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이웃과 자녀들을 진리로 이끌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 우리의 삶 속에 과연 이런 신앙의 열매들이 있는지, 아니면 잎만 무성한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는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의식주의 문제나 세상의 문물을 즐기며 만들어 가는 등, 세상에 살아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지요. 그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빛과 생명, 진리와 사랑의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저는 어떤 목회자가 “소수자를 위한 차별금지법을 기독교인이 왜 막느냐” 하는 소리를 듣고 경악한 적이 있습니다. 동성애자가 저들끼리 결혼을 하든, 저들 하고 싶은대로 사는데 누가 뭐랍니까? 문제는 차별금지법이 동성애자가 목회자가 되고 동성애자가 교회당에서 결혼식하는 것을 막아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에서 성경에 반한다고 동성애를 금하는 설교를 하지 말라는 반기독교법인 것입니다.
○ 정경심교수가 자기 딸의 스팩을 조작하여 대학에 입학하여 세상의 분노를 일으켰는데 조국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는 여론이 죄를 만든 것이다. 검찰의 과잉 수사다”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일반인은 “그런 일은 학부모라면 다 하는 일 아니냐?”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 세상은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입니다. 지금 세상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도 없는 세상입니다. 이는 사탄 마귀가 세상을 어둠에 빠뜨린 것입니다.
[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세상은 결국 그 자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룬 모든 것들 역시 불에 타 사라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들의 폐부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 조건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입니다. 실제로 이 두 말은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붙들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 이는 주의 말씀을 늘 가까이 읽고 삶 속에서 주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주께서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주의 뜻이 무엇인가?” 귀를 기울이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지키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가지와 줄기가 연합하여 한 그루의 포도나무가 완성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했습니다. 주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주님과 일체된 삶을 살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2:14-27 <선지자 다윗> (0) | 2022.08.21 |
---|---|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0) | 2022.08.13 |
요한복음 4:1-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0) | 2022.07.31 |
누가복음 18:1-8 <불의한 재판장> (0) | 2022.07.24 |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와 누룩> (0) | 2022.07.16 |
글
요한복음 4:1-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4:1-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과 유대 지역을 왕래할 때 두 지역을 잇는 가장 빠른 경로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동쪽의 땅으로 멀리 우회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종교적 혈통적으로 혼합된 사마리아를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마리아로 지나가는 길을 굳이 택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갈릴리로 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곳에도 복음을 전하여 잃은 자들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그의 제자들이 전한 성경말씀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이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공생애의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
이 때도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12제자들도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하리라 기대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늘 신기하게 여기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묘사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땅에 계시는 동안에 호의호식 하였다면 일반 대다수의 교주들이 그랬듯이 세상을 미혹하였던 사람 중의 하나라 여겼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므로 대중을 끌어모으고 그들이 호의호식 하였다면 저는 저들의 증거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모두 이 증거 때문에 고난을 받고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의 제물이 되셔야 했는가?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고 구원의 방식인 모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저 높이 하늘에서 고난 당하는 나를 보시며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 중에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요청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물을 청하신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 상종하기를 거부했고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을 더러운 탐욕을 가진 사람들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요청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들어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물을 대접하는 것은 미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민족적 편견이 있어 예수의 요청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 성도들 가운데 다수가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예수께서 지금 자기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혹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편견이 있어서 이고, 마음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요구하신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직업이 어부인 그로서는 성가신 일이지만 못할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여전히 편견과 고집, 자신의 눈 앞에 이익에 사로잡혀 있었더라면, 그는 그물을 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주의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열려 그물을 내릴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룰 잡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요한복음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여인은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유대의 랍비 정도라고 생각했을 뿐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여인이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을 알고 자신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지금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 예수를 보고 그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도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알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고백하였던 것도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의 말씀을 경청하며, 그분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목도했으나 예수를 메시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인간적인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 인간 예수만 알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사회봉사와 자선, 난민과 인권문제, 노동자들의 권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데 힘을 씁니다. 이를 교회와 성도의 자세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있습니다. 이들은 때로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다. 교인이 더 이기적이다 말하며, 정의를 말하지만 용서와 긍휼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교회라는 곳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곳, 사람이 변화되어 가는 곳임을 알지는 못합니다.
○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누린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솔로몬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엄청난 부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참된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1:2). 이것이 부귀 영화를 누린 그가 인생 말년에 한 고백입니다. 인생의 갈증은 돈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며,지식이나 권력,명예,육체적 향락으로 해갈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마름입니다. 예수 안에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이 자신들에게 남겨준 오랜세월 마르지 않는 깊은 샘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네가 자랑하고 의지하는 이 우물도 너의 인생의 목마름에서 해갈시키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70% 이상이 수분으로 되어 있어서,충분한 양의 물을 마셔야만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물부족으로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과 동남아시아, 이집트와 수단 에디오피아 여러 나라가 물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사하라사막과 고비사막이 커지고 있습니다. 수십년 전에는 비옥하던 중국의 동북삼성이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몽고 지역도 역시 모래사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선사이래로 인류는 물이 있는 곳을 따라 번영했고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물이 있다는 것음 풍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세상의 과학기술은 지구의 목마름을 벗어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은 잠시 육신인 갈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영혼의 갈증,인생의 갈증을 푸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긍휼과 관심이 떠난 곳에는 제아무리 물부족을 해소하는 기술을 전수하고 가르친다 하더라도 물부족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여서 그 땅에 물 문제도 해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엘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7:3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신 것처럼 예수를 믿는 자들이 받게될 성령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16절]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갑작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는 예수께서 여인에게 구원의 생수를 주기 위한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 그녀는 지난날 자신의 더 나의 삶을 위해 결혼과 이혼, 결혼과 이혼이라는 5차례의 순탄치 않은 잘못된 선택의 생활을 해왔습니다. 인기가 있고 멋진 남자를 찾아 보았을 것입니다. 돈 많은 남자를 찾아 보았을 것입니다. 권세와 명성이 있는 남자를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다섯 번이나 이혼을 한 경력이 있었고 지금은 여섯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것입니다.
○ 그녀는 그녀의 실패한 인생을 다시는 말하고 싶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지역 주민들이 그녀를 행실이 더러운 여인으로 점찍고 누구도 그녀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남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인 정오에야 은밀하게 물길러 나온 것입니다.
○ 그런 그녀가 예수께 그런 물을 내게 주어 목마르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정직해져야 합니다. 진실로 나의 목마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지난 일이요. 용서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목마름을 해결할 참 길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21:15-1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0) | 2022.08.13 |
---|---|
요한복음 15:1-10 <참 포도나무> (0) | 2022.08.07 |
누가복음 18:1-8 <불의한 재판장> (0) | 2022.07.24 |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와 누룩> (0) | 2022.07.16 |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0) | 2022.07.10 |
글
누가복음 18:1-8 <불의한 재판장>
누가복음 18:1-8 <불의한 재판장>
[1절]에 보면 주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낙망하다’ 이 말은 ‘모든 기력이 다하여 피곤하고 지친 상태’ 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왜 낙망하게 되는 것입니까? ◯ 사람은 자기가 원하고 도모하는 일에 구하여도 실패했을 때 낙망하게 됩니다.
● [누가복음 11:5-8]에는 ‘한 밤중에 찾아와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 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친구의 간청을 들은 친구가 떡을 내어주는 데 마지못해서 들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잘못 읽으면 마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응답해 주시는데 매우 인색한 하나님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말하는 바는 [기도 응답의 확실성] 입니다. 친구라면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밤중에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 벗이 아닐지라도 강청함을 인하여 요구대로 주었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하나님은 친구보다도 육신의 아버지보다도 나의 사정 형편을 더 잘 아시고 좋은 것으로 채우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 [누가복음 18:2-8]은 ‘불의한 재판장’ 비유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세속적인 마음을 지닌 자로서 뇌물을 받고 악인들을 두둔해 주는 그런 재판관과 다르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또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은 사람을 친절과 호의로 대하지 않고 교만한 마음과 권위의식을 갖고 사람을 대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재판장에게 한 과부가 공정한 재판을 하여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과부는 자기에게 해를 입힌 악한 자에게 벌을 줄 것을 요구했거나, 악한 자에게 탈취 당한 재산이나 권리를 되찾아 줄 것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달리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8:4,5]은 불의한 재판장이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그 재판장은 과부가 매일 찾아와 청원하는 일을 괴롭게 여겼습니다. 결국 이 재판장은 과부의 청원을 들어줍니다. 이 불의한 재판장은 그 과부가 불쌍해서 도와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괴로움을 당하기 싫어서 도와준 것입니다. ◯ 그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불의한 재판장입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과부의 열성과 집념에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하물며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18:6,7]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를 외면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시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 아랍 소년이었던 '무사 알라미'는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받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침 그는 정치적 혼란으로 모든 가진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요르단을 넘어 여리고 변방으로 갔습니다. 요르단 계곡 양쪽에는 황량하여 메마른 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이 뜨거운 사막에서는 몇몇 오아시스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자랄 수 없었습니다. 비참한 삶만이 무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사 알라미는 부족의 어른들께 물었습니다. "지하수를 파면 어떨까요?"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오랫동안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이 뜨거운 사막에서 지하수를 찾으려하다니. 족장들은 한결같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정부의 의견도 그랬고, 해외의 과학자들도 모두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사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홀로 사막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얼마후 여리고 난민 수용소에서 가난에 찌든 몇 명의 피난민들이 나와 같이 일을 했습니다. 샘을 파는 장비가 있느냐구요? 그건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겨우 곡괭이와 삽 몇자루 뿐이었습니다.
이 불굴의 넝마주의들이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어도 계속 파는 동안 그들을 바라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천히, 태초 이래로 한 번도 물을 찾기 위해 파본 적이 없는 그 사막을 깊이 깊이 파들어 갔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으나 [마태복음 28:18] “땅과 하늘의 권세를 지니신 주님”을 의지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파들어 가던 어느 날 드디어 모래는 젖기 시작했고, 마침내 생수가 뿜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둘러섰던 아랍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도 웃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환호성을 터뜨린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쁨에 넘쳐서 울고 있었습니다. 고대의 사막에서 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근처 마을의 족장인 늙은 노인 한분이 이 놀라운 소식을 듣고 몸소 달려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사, 정말 물을 찾았나? 어디 좀 보여주게. 맛좀 보세." "정말 시원하고 맛있군.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무사 알라미는 길이 3마일에 폭 2마일이 되는 농장에 15개의 샘으로 물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농장에는 갖가지 채소와 바나나와 무화과, 그리고 감귤등이 재배되고 있으며, 그가 지은 학교에서는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곧 잘 현실을 보고 좌절합니다. 불가능에 도전하라.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 얼마전 국립박물관에 간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신석기 시대의 배가 전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있었으니 찾았겠지 하며 그것을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2003년 9월 12일.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습니다. 남부지역을 지나, 7시간만에 동해로 빠져나간 태풍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낙동강에서 4km 떨어진, 경남 창녕군 비봉리 배수장. 태풍 때문에 이곳도 침수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빠지고 나서 그곳에서 귀중한 신석기시대의 유물을 발굴하게 됩니다. 그때까지도 신석기 유적은 대개 바닷가에 있어 제대로 보존된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원형이 잘 보존된 도토리, 가래, 솔방울, 조개무지와 빗살무늬 토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에서도 발굴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 나오지 않은 신석기시대의 배였습니다. 배라는 것은 나무로 만든 것이라 저습지 아니면 발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임학종씨는 배를 찾고 싶었습니다. 단원들을 격려하며 계속 찾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성과는 없었고 몇 달이 지나도 한여름에 물구덩이 안에서 발굴단원은 지치고 힘들게 수고하였지만 배를 찾을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원한 포크레인에서 쉬는 기사를 보며 기사를 부러워하는 단원들에게 임실장은 배를 찾는 사람에게 포크레인을 사주겠다. 약속까지 하며 찾고 싶었습니다. 어느날 임학종씨는 꿈에 선명하게 십자가가 보이고 그 위에 끈이 보였습니다. 끈을 따라 갔더니 배를 찾았습니다. 꿈이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발굴단원 중에 한 사람이 집에 일이 생겨 집에 다녀와야 했고 임학종씨가 그 자리에 투입되어 작업하는 과정에서 길이 3m 되는 통나무로 된 기원전 6000년경의 신석기 배를 찾은 것입니다. 그 신석기시대의 배를 찾는 영광을 자신이 갖게 된 것입니다.
◯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집을 떠나 가나안 땅 이르렀지만 그 곳에는 이방인들이 있었고 발 붙일 땅이 없었습니다. 기근을 당하여 애굽까지 내려갔고 그곳에서 목숨을 구하려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가 큰 부를 이루어 가나안에 돌아왔지만 거할 곳이 좁아 조카 롯과 동서로 갈라서야 했습니다. 어느날 동방의 왕들이 쳐들어와서 롯을 포로로 잡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목숨을 걸고 온 집안의 하속들을 거느리고 가서 롯을 구해옵니다. 그에게 환상 중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창세기 15:1,2]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 외적을 물리치고 가나안 땅에서 많은 부를 일구었으나 그에게는 여전히 이루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그는 낙망하여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후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창세기 15:4,5]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했습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5:1-10 <참 포도나무> (0) | 2022.08.07 |
---|---|
요한복음 4:1-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0) | 2022.07.31 |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와 누룩> (0) | 2022.07.16 |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0) | 2022.07.10 |
마가복음 9:14-29 <기도 외에는> (0) | 2022.07.02 |
글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와 누룩>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와 누룩>
[누가복음 13: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바로 18년간 병들었던 여자가 예수의 안수하심으로 치료를 받은 그러한 사건으로 안식일 논쟁이 벌어졌던 그 회당에서 덧붙여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마태복음(13장)의 겨자씨 비유에서의 밭은 곡물을 심기 위한 집에서 떨어져 있는 ‘밭’을 가리키지만 오늘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하는데 겨자씨를 심은 장소를 ‘채소밭’이라 했습니다. 이는 집 근처의 ‘정원’이나 ‘텃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채소밭’은 인간의 삶에 밀착되어 매일의 생활 가운데 접하게 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겨자씨와 누룩, 이 두가지 물건은 모두 사람들에게 실질적 생필품이며 사람들에게 안식과 기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19절b]에 겨자씨 비유에서 새가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했습니다. 이는 새들이 잠시 나뭇가지에서 쉬다가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나무에 둥지를 틀고 계속적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누룩은 신.구약 성경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 전염성이 강한 부도덕한 행위 등에 비유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누룩’에는 이런 부정적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오직 떡반죽에 섞어서 쓰이는 없어서는 안되는 재료이며 그 발효의 강한 힘이 큰 파급력을 가졌다는 특징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가루 서말’ 이란 10인 가족의 하루 식량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루 세 말 속에 들어간 누룩은 지극히 적은 양이지만 그로 인해 밀가루 반죽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지요. 적은 누룩이 모든 사람의 삶의 변화를 가져다 주게 됩니다. 그처럼 복음의 능력은 국경과 인종의 벽을 넘어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 온 세상에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에 다소 차이점이 있습니다. ①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처음에는 작고 보잘 것 없으나 그 속에 생명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점차 자라나 마침내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참 평안과 안식을 제공하게 될 것을 보여 줍니다. ②그런데 누룩의 비유에서는 외적인 성장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내적인 성숙을 말해줍니다. 누룩은 겨자씨처럼 그 자체가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룩은 적은 양이지만 반죽한 밀가루 전체에 골고루 퍼져 그것을 부풀리듯이 천국 복음이 온 사회 전반에 투입되어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누룩의 비유도 겨자씨 비유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말하고 있지만, 은밀하고도 내적인 성장이라는 특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복음에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누룩은 보이지 않는 중에 은밀하게 퍼져서 밀가루 전체 반죽을 부풀리고 부드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 여기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보이지 않는 존재, 누구도 생각지 않은 거대한 영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처음에 겨자씨 만큼 작고 미미하여 보이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커서 모두에게 기쁨과 안식을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이 두 비유는 공통적으로 ‘갖다 넣다’ 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겨자씨도 사람이 채전에 ‘갖다’ 심었으며, 누룩도 여인이 ‘갖다’ 넣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이 동사를 생략하지 않고 삽입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한 알’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갖다’ 심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갖다 심으신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존재에 세상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겨자씨이며 누룩입니다.
○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에 불과한 유대 땅, 이름없는 나사렛 출신이었으며, 당시 유대 사회의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한,가난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당시 어느 누구의 호감도 얻지 못했으며, 나중에는 십자가상에서 마치 죄수의 한 명처럼 죽었을 뿐입니다. 또 그의 제자들은 어떠한 자들이었습니까? 대개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이나 세리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복음의 힘은 불과 몇 세기도 지나기 전에 부패하였던 로마제국을 새롭게 하고 곧이어 유럽 전체를 정복하였던 것입니다.
○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의 과정을 겪은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 복음이 들어가기 전의 에베소는 우상 숭배로 가득찬 도시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이 들어가자 에베소 사람들은 모든 죄를 자복하며 가지고 있는 마술책들을 불태워 버립니다. 죄악의 온상이 복음의 교두보로 변화되어진 것입니다.
◉ 우리는 우리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 사회는 오랜 유교적 인습과 권위주위, 각종 미신에 찌들은 사회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들어오면서 수 많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축첩 제도와 남성의 외도가 만연하고, 여성과 아이들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인권이 무시되던 세상이 변하였고, 음주와 도박으로 날을 새던 농촌이 변화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들이 선교 단체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근대 문명의 빛과 생명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 자고이래로 사람들은 고통과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꿈꾸어 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구원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종교는 모두가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자력구원을 말하지만 인간은 어리석고 죄 많은 존재입니다. 부패한 심성을 가진 인간이 제아무리 노력하고 좋은 발명을 한다 한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죄와 고통, 사망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겠다고 하는 주장은 다 헛된 말에 불과 합니다.
○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그 존재가 미미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지나신 자리에는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었고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듯이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질병과 억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 문제 해결을 받았습니다.
○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교회당이 무도장으로 팔려 나가고, 기적을 말하면 조롱을 받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오. 전쟁터의 대장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회복 해야 합니다. 교회는 수평적인 이동에 의한 교회성장과 대예배 중심의 교회역할, 성도들의 참여가 없는 선교에서 벗어나 성도 개개인이 말씀의 묵상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훈련해야 합니다. 교회의 젊은이들은 재물에 연연하는 탐욕과 무절제한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 옳고 그름을 밝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누룩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장과 변화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어야 하고 하늘문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에 힘씀으로써 주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4:1-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0) | 2022.07.31 |
---|---|
누가복음 18:1-8 <불의한 재판장> (0) | 2022.07.24 |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0) | 2022.07.10 |
마가복음 9:14-29 <기도 외에는> (0) | 2022.07.02 |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0) | 2022.06.26 |
글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그날 잡아 그날 하루를 사는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베드로와 일행들이 잡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해가 뜨자 더 이상 고기를 잡을 때가 지나 베드로와 일행은 바닷가에서 허탈한 심정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사 베드로의 배에 오르기를 청하시고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생각지 않게 베드로도 무리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 베드로는 전문 어부로서 물고기 잡는 데는 많은 경험과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태어나 평생 물고기를 잡아온 사람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명령이었습니다. 대체로 물고기는 밤에 잘 잡힌다고 합니다. 그것도 얕은 물가에서 … 그러니 뱃사람으로 평생을 산 베드로에게 있어 예수님의 명령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지한 자의 말처럼 들렸겠습니까? 지금 목수가 바닷가에 와서 어부에게 고기잡이를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랐습니다.
[누가복음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의 말에 그대로 순종할 생각을 한 것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대로 깊은 데 그물을 내리면 고기를 많이 잡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일까요? ○ 우리는 때로 베드로의 “말씀에 의지하여” 라는 말을 불가능한 일의 주문이며 큰 믿음의 결단이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베드로에게 결과에 대한 큰 기대와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시몬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배 위에서 가르쳐 주시는 예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예수의 말씀에는 어떤 권세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겠다는 결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 예수님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시니 행하는 것, “말씀에 의지하여” 라는 말은 ‘말씀 하시니’ 와 같습니다. ‘나’를 말하지 않고, 나의 자존심을 내려 놓은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 의지하여” 라는 말은 착한 마음이고 자신을 낮추는 자의 모습입니다.
○ 가나의 혼인자리에서 하인들 처럼 착한 마음으로 물을 길어 여섯 항아리에 채운 것과 같습니다. ‘힘들다’ 말하지 아니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니 축복이 임하고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믿음의 유무도 순종에 대한 보답의 기대도 없습니다. ○ 지금은 모든 권위가 부정되는 시대입니다. 학교 선생님의 권위, 부모의 권위, 선배의 권위… 모든 권위가 의심받고 도전 받는 시대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세워주는 시대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누가 나를 무시하지 않는지 예민하여 있습니다.
○ 아브라함이 99세 때, 가나안 땅에서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아 있다가 세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날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냥 보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 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8:3-5]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천사가 떠나기 전에 축복의 말을 합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 모세가 “하나님! 왜 되지도 않을 일을 내게 맡기십니까? 나는 재능도 없고, 백성이 따르지도 않을 것이고, 어찌 애굽이라는 강대한 나라의 통치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아는 모세는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순종은 일이 잘 풀리고.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순종은 순종이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 하라는 대로 하니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물을 올려 배에 실으니 고기가 두 배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오늘 밤에 예수님이 내게도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말씀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열왕기상 2: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중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룻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다윗이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한 말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주님은 은혜를 베푸실 때, 세상의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얼마를 적선(施舍)하듯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말씀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보십니다. ○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제자들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때 한 소년이 자신의 먹을 양식인 오병이어를 들고 왔습니다. 주님은 이를 사용하여 남자 만도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아 큰 광주리 열두 바구니가 남게 하셨습니다. ○ 또 엘리사 때에 선지자 생도의 과부의 집에 엘리사가 기적을 베풀었는데,엘리사는 과부에게 온 동네에서 빌리라 하였고, 빌어 온 그릇들에 기름이 다 차도록 풍성한 은혜를 채웠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5:6,7,8]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 베드로가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합니다. 물가에 서서 저 먼 호수 중간의 깊은 곳에 물고기가 있음을 안다는 것은 보통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고 신적 권능의 소유자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 베드로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갈릴리 바닷가에서의 경험과 지식에 자만했던 베드로, 엄청나게 강한 로마제국 아래서, 가진 자들의 횡포와 권세 아래서, 그리고 무기력한 자신의 한계에 절망한 베드로가 모든 환경과 인간의 한계를 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누가복음 5:10.11]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베드로의 동료들은 주님이 베푸신 기적을 보고 그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고 그 반응이 다릅니다. 그러나 같은 것은 저들은 다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본문의 사건은 주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베드로와 그 일행을 제자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 어떤 사람이 선교사님에게 “선교지에 나간지 언제인데 지금까지 언어가 그 수준 밖에 안됩니까?” 책망을 듣고 많이 부끄러웠답니다. 물론 언어가 잘 준비된 선교사라면 좋겠습니까? 그러나 제 경험으로는 언어가 부족하여 손짓발짓 하며 말해도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은혜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선교사가 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 선교를 잘 한다고 하나님이 더 축복해 주고, 우리에게 수고했다. 감사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선교를 잘하든 못하든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살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 왜 베드로와 그 일행들은 두배가 잠길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 것입니까? “지금껏 고생했다. 이제는 배불리 먹고 즐기라.”는 축복입니까? 왜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놀라는 것을 보고싶어 하신 것입니까?
○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놀라움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에는 자신의 것으로 알고 먹고 마시는데 쓰는 것으로 끝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원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 부르심의 말씀에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즉시 배를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8:1-8 <불의한 재판장> (0) | 2022.07.24 |
---|---|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와 누룩> (0) | 2022.07.16 |
마가복음 9:14-29 <기도 외에는> (0) | 2022.07.02 |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0) | 2022.06.26 |
마태복음 22:34-46 <가장 큰 계명> (0) | 2022.06.19 |
글
마가복음 9:14-29 <기도 외에는>
마가복음 9:14-29 <기도 외에는>
[마가복음 9: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여기 ‘변론하다’란 말은 ‘논쟁하다’ 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어떠한 주제를 놓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합의점을 찾기 위해 토론하며 논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자 이를 빌미로 제자들에게 악의에 찬 조롱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귀신을 쫓아 낸 일은 일종의 사기극이 아니냐는 겁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은 제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귀신이 어린 소년을 괴롭히는 그 현장에서 그 아이에게는 무관심한 채 오직 논쟁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 무능한 종교인들이 논쟁만 일삼는 것입니다. 종교적 논쟁은 다툼과 분열만 일으킬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딤후2:23)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풀 수 없는 많은 난제들이 있습니다. 영.혼.육 외계인. UFO. 종말. 세례. 등등 교파 간에 서로 이견이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능력 있는 성도들은 논쟁할 시간도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들이 가진 능력으로 주님의 진리를 입증합니다.
○ 주님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서기관들에게 유구무언 부끄럼을 당하고 있는 그 자리에 주님이 찾아주셨습니다. 주님은 세 명의 제자만 따로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셨지만 제자들이 있는 곳에 적절한 시간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온 무리는 산 아래 내려오신 예수님을 보고 놀랍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변론하느냐 물으실 때, 무리 중의 하나가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하니 예수님의 처음 반응이
[마가복음 9:19]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하는 탄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너희에게”라는 말은 제자들을 포함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은 고치지 못한 것입니까? 제자들은 일찍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예수님께로부터 부여받아 이미 놀라운 이적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무리에게 둘러싸여 서기관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2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 아이의 아버지는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이미 많은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자에게 첫째로 요구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할 수 있다면, 한 번 고쳐보십시오!’ 이런 자세는 믿음이 아닙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마가복음 9:24]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섬겨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헌신한 제자들이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제 그는 믿음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한 것입니다. ○ 믿음은 갖겠다고 갖는 것이 아닙니다. 큰믿음을 갖기를 원하지만 믿음이 생각대로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하려 동분서주하 하고,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들입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는 우리의 평생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 아이 아버지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데, 예수님은 쫓아내셨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 물었더니,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앞서는 ‘믿음’을 강조하셨는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는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요 14:13] 은 기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야고보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기도의 응답에서 ‘믿음과 기도’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는 믿음이 없거나 의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형식적인 믿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자만과 안일에 빠져서 하나님을 간절히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 생활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가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현실에 만족하고 세상의 부귀와 명예에 마음을 두게 되면 나태해지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믿음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약하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38-40]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 제자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와 위계질서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의 공동체에 함께하지 않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능력 행함의 수단이나 도구 정도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행위를 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께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시며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생각이 독단적인 판단일 수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많은 사람이 예수를 처음 믿기 시작한 이후로 신앙생활의 과정 속에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 혹은 각종 영적체험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기성신앙이 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는 형식이 되고 예수님은 간데 없고 형식적인 신앙만이 남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즉시로’라는 말을 더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은 지속적인 성숙의 시간을 거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진정성은 두고 보아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 주님은 저들에게나 제자들에게나 마찬가지로 관용과 인내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귀신을 쫓음과 이적, 병고침으로 신앙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시기에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있는 저들이 지금 더 ‘생동력 있는 신앙’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지금 나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허울좋은 가면을 쓰고, 기도도 없고, 기도에 능력도 없는 형식적인 기도를 하는 문화적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주의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일찍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주신 바 있습니다.
[마가복음 6:7,13]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 제자들은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귀신이 쫓겨 나가고 병든자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제자들은 기도에 나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여전히 좋은 믿음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는 말해줍니다. 믿음은 사용하므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 신자가 세상에서의 성공과 공명심에 관심이 집중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주님의 이름을 자기 행위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의 이름을, 혹은 기독교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이용하며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 마가복음은 1차적으로 당대의 독자로서 엄청난 시련 가운데 처하여 신앙적 무력감에 빠져 있던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세상의 부귀 영화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면서 세상의 조롱을 당하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만이 능력의 원천임을 말하며 ‘믿음을 가지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3:18-21 <겨자씨와 누룩> (0) | 2022.07.16 |
---|---|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0) | 2022.07.10 |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0) | 2022.06.26 |
마태복음 22:34-46 <가장 큰 계명> (0) | 2022.06.19 |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 (0) | 2022.06.12 |
글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몇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자들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적합니다.
[마가복음 7:3,4]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 그들의 말하는 장로들의 전통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습니다. 흙먼지가 많은 사막 지대에서, 대개는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먹는 당시의 식사 습관을 생각할 때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와 생활에 있어 권고적 차원에 머물러야 할 일을 경건의 수준을 측정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나름대로의 수없이 많은 율례와 규칙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들은 이러한 규정에 근거하여 사람들의 신앙과 인간됨을 평가하였습니다. ○ 주님이 보시면 이처럼 이렇게 외형적 껍데기를 가지고 하는 신앙생활을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으로 사람을 평가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재산과 학벌, 배경과 상식이 있느냐 없느냐로 사람들의 됨됨이와 신앙, 성공과 실패를 말하지 않는지요.
○ 하나님의 시각과 기준과 판단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사람이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고 하나님 앞에 정결하다 인정을 받으려면, 사람의 계명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에 갔다. 교회에서 돌아왔다.’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섬긴다.’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 설교를 들어도 마음으로 듣고, 잊지 않는 사람이 있고, 찬양과 기도를 해도 전심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웅장한 건물과 실내 장식, 깔끔한 진행, 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말씀과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과 만남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 남들이 모두 제 소견에 따라 하나님을 경홀이 여기니~ 나도 대충 하나님을 섬긴다. 교회 대예배에 참여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말 한마디 나누는 사람없이 예배시간에 다녀간다. 일 주일 내내 말씀을 대하는 시간도 없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시간도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명도 변화도 없는 사망의 길입니다.
○ 유대 사회에는 고르반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부모를 공양하기 위한 의무를 회피하는 데 악용하였습니다. 부모에게 드려 봉양해야 할 것을 일단 고르반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만족하고 합리화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하나님이 받으셨다.”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이 세운 규례와 제도 관념이 하나님의 뜻이라 왜곡한 것입니다.
○ 부모에게 할 일은 부모에게 마땅히 준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의 탐욕을 채우는 일은 악한 행동입니다.
○ 갈릴리로 돌아오사 가버나움에 이르셨을 때 세금 걷는 자가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관세와 국세를 내는 사람이 타인이냐 아들이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의 나라에 오신 분이십니다. 세금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명하여 바다에 낚시하여 오르는 물고기의 입을 열면 한 세겔을 얻을 것이라 하시며 세금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라 말씀하셨습니다.
○ 주님이 세례요한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일반으로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통념이 있었던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으나 예수님에게는 이런 행위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말씀하시며 세례요한이 세례식을 행하는 것을 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높고 낮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사함의 표로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일반통념이고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모든 일의 결정은 하나님 앞에서 입니다. 사람의 이목이나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 사람의 관념에 따르는 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 요즈음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즈음 인터넷으로 예배드린다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다 제 소견을 따르는 신앙생활입니다.
○ 사람의 규례와 전통이 중요하고, 혹은 사람들의 얄팍한 지식과 견해에 추종하여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탄은 늘 우리를 다른 일에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두게 하고 집중하게 합니다. ○ 이 세상에 모든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 안에서 새생명을 얻고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얻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나사렛 고향에 방문하셔서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거기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그가 행하는 능력을 보고 놀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사람들은 그의 지혜로운 말씀이나 능력보다는 그의 출신성분과 이력을 보았습니다.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고작 요셉의 아들로 목수일을 하던 예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만을 절대시 하며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못난 사람 잘 난 사람"을 평가하며 차별합니다.
◉ “남루한 옷차림이 경차를 타고 주차장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저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이런 고정관념에 매인 사람은 그 사람의 가능성을 생각지 않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부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지식으로, 고정관념은 사람을 협소하게 하고 경직되게 하는 것입니다.
○ 공산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출신성분에 의해 사람의 재능과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사회는 모든 사람의 가치를 존중해 주고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 어떤 사람은 같은 어떤 물고기의 생김새가 다른 것을 진화과정의 산물이라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동차의 발달을 진화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도체 기술의 발달을 진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진화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으로 진화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잘못된 통념에 쇄뇌 되어 사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사람들에게 잘못된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있습니다. 당장의 현상을 보고, 아니면 지난 습성에 따라 새로운 변화와 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고정관념들과 싸우고 투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잘못된 고정관념은 중대한 문제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고기 잡는 어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리스도 주의 오심을 인간들에게 보이셨지만 당시 사람들은 단지 놀랄 뿐이었습니다.
[마가복음 7:15,16]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무슨 말씀입니까? 인간을 더럽히는 것의 원천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염된 인간의 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된 본성을 통찰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그 안에 죄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손이나 그릇을 깨끗이 씻고, 제도나 사회 환경을 바꾸면 인간의 사악함이 개선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를 緣木求魚 (나무에 올라 고기를 얻으려고 한다)라 합니다. 되지도 않을 불가능한 수고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7:20-23]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레미야 17:9] “민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이 말씀은 어느 특정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정결함을 얻을 어떤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5:1-11 <말씀에 의지하여> (0) | 2022.07.10 |
---|---|
마가복음 9:14-29 <기도 외에는> (0) | 2022.07.02 |
마태복음 22:34-46 <가장 큰 계명> (0) | 2022.06.19 |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 (0) | 2022.06.12 |
마태복음 9:9-13 <긍휼을 원하심> (0) | 2022.06.04 |
글
마태복음 22:34-46 <가장 큰 계명>
마태복음 22:34-46 <가장 큰 계명>
[36절]에 한 율법사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물었습니다. 당시 율법사들은 성경에 능통한 자들로 그들은 성경에 관한한 최고의 지식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가 어떤 의도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반응으로 볼 때 질문 자체에 악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이를 시험과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는 반면 마가는 비교적 긍정적인 측면에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 사실 율법사의 질문은 당시 랍비 세계의 중요한 이슈가 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율법을 613개 조항으로 분류하고 그 중에 248개률 중요한 것으로 나머지 365개를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계명으로 구분한 248개 조항 가운데서도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율법사는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 주님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37절]은 예수님께서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으로 [신 6:5]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주님은 하나님 사랑을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그렇다면 우리가 직장이나 사업을 모두 팽개치고 성전에 엎드려서 살아야 하는가'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 함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 이는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규정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 고백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들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하며, 성경 진리를 논하는 것이 다 헛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로 큰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39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는 [레위기 19:18]의 인용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이 두 계명은 십계명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하 전반부 제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관련한 것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슴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그리고 제5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부터 이후 제10계명까지는 사람과 관련한 것인데, 이를 요약한 것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①'하나님을 사랑하라.' ②'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계명은 전체 십계명의 요약인 것입니다. 율법사는 가장 큰 계명을 물었지만 예수님은 두가지 계명을 함께 말씀하신 것입니다. ○ 이웃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무게로 행해져야 한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 하면서 이웃에 대한 의무는 소홀히 하는데, 우리가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경건 중의 경건은 이웃사랑입니다. 방언을 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하고,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여도 이는 온전한 경건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자들, 인권을 유린 당하고 소외된 수많은 사람들을 외면한 채 종교적 열정에 빠지는 것은 경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하십니다. ○ 사람은 종종 한 편에 치우치는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만 찾는 경우도 있고, 자선만을 강조하여 사는 신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이웃을 향한 돌봄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결여된 하나님 사랑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하나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사랑도, 이웃사랑도 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의 삶이 안정을 이루고, 풍족을 얻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늘 부족한 것이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어떻게 나를 희생하고, 내 것을 내려놓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 마태는 가장 큰 계명을 논한 뒤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를 알지 못하고 계명을 논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물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2:41]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 왜 주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한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 부분을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공격이다.' 즉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다시는 대적하지 못하도록 하신 질문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 실제로 '누구의 자손이냐' 주님의 주도적인 이 질문은 자신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하고 그들의 무지와 편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계통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한 신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입니다.
○ 우리가 알 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 교육을 받아 많은 지식이 있고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진리를 아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진리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진리인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도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셨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했습니다. 이는 배우기는 열심히 배워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진리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한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사람은 상대적이며 변하는 것입니다. 의지할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 예수님 스스로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만이 곧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많은 교회가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가지고, 많은 성도들이 성경공부에 열심을 내지만, 진리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성경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 지식으로는 성경을 잘 알고, 율법과 계명을 잘지키는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 하지만, 지식을 따르는 신앙은 여전히 어둠과 사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 요즈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 안다" 말하며 성경의 지식을 논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논하지만 여전히 계명을 지켜 살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말로는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머리 속에 머물러 있는 지식적인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 어떤 이들은 성령께서 '진리의 영'이므로 성령을 받으면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여전히 초등학문 가운데 매여 있었습니다.
○ 오늘날 이 땅에는 성경 해석의 입장에 따라 많은 교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장로교는 칼빈을, 루터교는 루터를, 감리교는 웨슬리를 선각자로 여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파에 따라 그들 교리를 마치 절대 진리인양 신봉하며 구원이 있다 없다. 말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분열과 미움을 만들어 냅니다. ○ 지식은 편견과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게 하고, 파벌을 조성합니다. ○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했지만 사람은 결국 아무 것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주로 고백하는데 있습니다.
○ 바울이 왜 예수를 믿은 후 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 알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긴다 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9:14-29 <기도 외에는> (0) | 2022.07.02 |
---|---|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0) | 2022.06.26 |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 (0) | 2022.06.12 |
마태복음 9:9-13 <긍휼을 원하심> (0) | 2022.06.04 |
역대하 32:9-23 <너를 지키리라> (0) | 2022.05.29 |
글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
[마태복음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우리는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 길을 여행하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길을 마다하지 않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먼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 모두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본이 되셨습니다.
○ 그런데 당시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을 완전히 벗어나서 이방 지역으로 실제 들어가셨는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곳으로 가신 이유는 유대 종교 지도들과 때이른 충돌을 피하고 조용하게 쉬시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이방으로 가지 말 것을 명하셨다는 것, 그리고 본문 [마태복음 15:24]에서는 예수님 스스로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7:24]에 쓰인 지방이란 헬라어 단어는 ‘경계’ ‘지경’ 이란 의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습니다.
[마가복음 7: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마가는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서 나오셨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더 북쪽의 시돈까지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나다니기를 꺼리던 사마리아 지경에 들어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이방의 갈릴리를 넘어 두로와 시돈의 먼 지역까지도 다니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마태복음 4:23]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다니셨다 했는데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말합니다. ‘온 수리아’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마태의 특별 관심지역이었습니다. [25절]에서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따랐다 말하는데, 그에 앞서 [24절]에서 온 수리아를 언급합니다. 두로와 시돈이 속한 지역입니다. 이 지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예수님은 많은 갈릴리의 가버나움 고라신 벳세다 이런 도시들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치 아니함으로 탄식하고 있는데, 두로와 시돈 지방의 사람들은 적은 권능에도 마음이 열려 있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 마태는 ‘가나안 여자’ 라 말하는데 [마가복음 7장]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말해줍니다. 수로보니게란 수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로, 팔레스타인 북부 쉬리아에 사는 페니키아(뵈니게) 사람을 말합니다.
○ ‘가나안 여자 하나가’ 이를 직역하면 ‘보라 한 가나안 여자가’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라’가 생략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등장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한 눈에 누가 보아도 이 여인이 이스라엘 여인이 아님을 알수 있었습니다.
○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주’ 라 불렀습니다. 헬라어 ‘주’ 에 해당하는 ‘퀴리오스’ 는 물론 다양한 경우에, 또 여러 대상에게 사용되는 호칭이지만 근원적 의미로 볼 때는 주종의 사회 속에서 자신은 ‘종(둘로스)’ 이고 상대는 자신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여 나는 당신을 나의 상전로 인정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다윗의 자손’이라 했는데 이는 당신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오실 메시야라는 호칭입니다. 여인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앞선 1-20절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배척하였습니다. 무엇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메시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한 것일까요?
○ 사람이 좋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많은 성경지식이 있어서, 많은 경험이 있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은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법을 이용하여 부정을 저지르고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탐욕스러운 것을 봅니다.
○ 여인은 얼마나 많이 의원을 찾아 다시며 재산을 허비했겠습니까? 여인은 얼마나 자기 족속들에게 귀신들린 딸의 엄마라고 조롱을 받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철천지 원수의 나라인 이스라엘 유대인인 예수님을 찾아왔겠습니까?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에 예수님을 영적 권세를 가지신 ‘주’로 ‘메시야’로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 [22절]의 ‘그 지경에서 나와서’ 라는 표현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를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먼길을 걸어서 예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 주님 앞에 나온 여인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여인은 한번만 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복하여 외쳤을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나안 여인은 매우 간결한 이 호소의 말에 그녀의 딸을 향한 애틋한 사랑과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병들어 고통 당하는 그 딸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의 불완전함이 나의 불완전함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라의 재난이 나의 재난인 것입니다. 사랑은 몇 푼의 동정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저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 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기도에 함께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 오늘 이 여인의 외침은 우리의 기도에 날마다의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우리는 마음이 굳은 자들입니다. 기도하기 원하지만 기도의 습관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갖기를 바라지만 원망과 불만이 가득한 나입니다.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원하고, 교회를 살리기 원하고, 나라는 위기에 빠져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마태복음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 여인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민망한 제자들이 나와서 예수께 나아와 말합니다. “이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그 여인을 보내야 하는 이유가 계속하여 소리를 지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요청을 하였던 것은 가나안 여인을 불쌍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여인의 고함을 듣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여기서 ‘보내소서’ 라는 말은 빨리 기도를 해주고 보내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응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인에게 하신 대답이 아니고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여인을 무시한 말씀이고, 여인의 귀에 들리도록 거절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옆에서 들은 여인은 이제 예수님 앞에 절하며 말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런데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 심하게 들려집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지겠느냐? 너희들은 개와 같은 인간들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 동안 자신의 민족에게 무시를 당해온 것도 억울한데 이제 원수의 민족에게 절까지 하며 구하는데 무시를 당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 하는 말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합니다.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이 생략되었으나 원어 성경의 서두에는 ‘오’란 감탄사가 나옵니다. 기대를 넘어서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데 “오 네 믿음이 메가톤급이다.” 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 직역하면 ‘네가 바라는 만큼 네게 이루어져라’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딸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0) | 2022.06.26 |
---|---|
마태복음 22:34-46 <가장 큰 계명> (0) | 2022.06.19 |
마태복음 9:9-13 <긍휼을 원하심> (0) | 2022.06.04 |
역대하 32:9-23 <너를 지키리라> (0) | 2022.05.29 |
역대하 20:1-12 <오직 주만 바라> (0) | 2022.05.22 |
글
마태복음 9:9-13 <긍휼을 원하심>
마태복음 9:9-13 <긍휼을 원하심>
[마태복음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 주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일하던 마태를 보시고 아주 단순 명료하게 “나를 좇으라” 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마태도 미련없이 그 하던 일을 멈추고 즉시 일어나 주님을 좇았습니다. ‘주님을 좇는다’ 는 말은 ‘주님을 내 삶의 경배자와 인도자로 택한다’ 는 결단과 의지가 내포한 말입니다. 세상에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많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가장 귀한 삶의 가치로 알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 또한 주님을 좇는다는 말은 주님을 모방하고 답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인격과 삶의 표준으로 여기고 그분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상인을 좇는 자들은 장사꾼이 되고 정치가를 뒤좇는 이들은 정치인이 됩니다. 그리고 강도를 좇는 자는 똑같은 범죄자가 되게 마련입니다. ○ 마지막으로 주님을 좇는다는 말은 그분과 공동 운명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당한 고난을 자신들도 당할 것을 각오하는 것이고, 주님이 영광받으면 자신들도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을 살펴 보려 합니다.
[마태복음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 회심하고 주를 영접한 마태가 그 친구들을 불러 모아 주와 함께 잔치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그는 그 동안 함께 일해왔던 세리 동료들과 작별하는 의미로 또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일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의미로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통해 그의 동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소개하고 전도했을 것입니다. 마태의 동료 세리인 중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 그리스도께서 ‘세리의 친구’ 라는 별명까지 얻으셨습니다.
○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복자 로마의 앞잡이로서 허다한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어 헐벗은 유대 백성들로부터 착취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평민들은 로마가 그들을 통해 수탈해 가는 수많은 명목의 세금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두세는 기본이요 도로세,물품세,수도세 등이 있었고, 그 외에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정한 성전과 관련한 세와 각종 종교적 봉헌 의무가 주어졌기에 유대 민족은 가난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정한 성전세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거두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탄을 면했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이렇게 종교세로 거둬들인 치부하며 호의호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데도 유다백성의 가난의 고통은 모두 로마정권과 세리들에게 뒤집어 씌웠졌던 것입니다.
○ 우리 성도들도 살다보면 때로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예수 믿고 교회에 함께 출석하나’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분노하고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 그런데 비판은 바리새인들의 특징입니다.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일종의 차별의식입니다. 사람은 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것입니다. 사람은 다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위하여 온갖 수고를 다하지만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해 곁길로 나가고 자립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아 하나님 나라의 왕국을 기대했지만 그 역시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나라가 평안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남유다를 구하기 위해 일생을 받친 사람이지만 그 아들 므낫세는 나라을 파멸로 이끌고 갔습니다. ○ 많은 선교사가 주님을 위해 일생을 드리고, 많은 수고를 하지만 외국어만 공부하다가 돌아오는 선교사도 있고, 돌아보면 한 일이 보잘 것 없을 때도 많습니다.
◉ 한국 교회는 연길지역에 300개 정도의 크고 작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연길지역이라 하면 조선족 교회일 것입니다. 삼자교회도 있었을 것이고 가정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족은 중국 전국으로, 혹은 한국으로 이주하였기에 현재 대부분 교회는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거기에다 한국에 온 저들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보면 우리의 지난 날의 수고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 사람의 하는 많은 수고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숲 전체를 보시는데 인간은 나무 밖에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영원한 세월을 두고 계획을 세우시지만 인간은 근시안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을 합니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 이렇게 노래하는 전도자의 말은 자신 스스로 유익한 일을 한다고 수고하고 힘쓰다가 인생의 말년에 내린 결론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자랑할 일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우리의 신분이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 우리는 다 주 예수님의 속죄로 구원을 받고 은혜 받은 자들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10대 무역국이 되고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 것도 내가 수고하여 얻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도 나의 의지로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가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며 성공하라고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성취는 내게 주신 재능과 힘대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 내 의를 말하고 내가 인정받기를 바라고, 나의 공로를 말하고, 자신의 기준과 판단대로만 행하면 불신자와 다름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웃을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언행은 곧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 나도 내 옆의 다른 성도들도 다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 귀한 존재요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할 동등한 형제의식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 대만 방송에서 여러나라의 외국 패널들이 나와 자신의 나라를 자랑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한 중국본토인이 중국은 역사적으로 외국을 침략한 일이 없다는 발언을 하여 많은 참석자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 중국이 얼마나 많은 나라들에 전랑외교를 하며 위협을 하고 있는 것을 다 아는데, 이 사람만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은 다 아는데 저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주위에 도처에서 보여지는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비판하였습니다. 유대교의 규례에 의하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는 곧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일은 율법의 정신에도 어긋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시고 그것을 완성시키려고 오신 분이 율법을 어기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 명하셨습니다. 이는 유대교인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기들 기준대로 율법을 해석하여 죄인으로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겼습니다. 이에 주님은 당시의 속담으로 대답하십니다.
[마태복음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건강한 자만을 상대하려는 의사는 없을 것입니다. ○ 흠 없고 깨끗한 사람, 상식이 통하는 자기 취향에 맞는 사람들만 대하려는 성도와 사역자는 엘리트 의식과 차별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자신의 기준과 취향에 따라 사람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주님이 자기 기준과 취향에 맞는 사람을 상대하시기 원하셨다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 우리 각 사람은 나 자신 역시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허물과 죄가 많고 연약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주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 필요하고 소금은 부패한 곳이나 부패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부패한 세상과 나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닌, 세상 가운데 거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고결하고 비싼 ‘다이아몬드’ 가 아닙니다. 흔하고 싼 ‘소금’입니다. ○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예배를 잘 드리고 헌금을 잘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설교202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22:34-46 <가장 큰 계명> (0) | 2022.06.19 |
---|---|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 (0) | 2022.06.12 |
역대하 32:9-23 <너를 지키리라> (0) | 2022.05.29 |
역대하 20:1-12 <오직 주만 바라> (0) | 2022.05.22 |
역대하 14:1-15 <변치 않는 믿음> (0) | 2022.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