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마가복음 7:1-1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몇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자들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적합니다.
[마가복음 7:3,4]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 그들의 말하는 장로들의 전통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습니다. 흙먼지가 많은 사막 지대에서, 대개는 손으로 직접 음식을 집어먹는 당시의 식사 습관을 생각할 때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와 생활에 있어 권고적 차원에 머물러야 할 일을 경건의 수준을 측정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나름대로의 수없이 많은 율례와 규칙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들은 이러한 규정에 근거하여 사람들의 신앙과 인간됨을 평가하였습니다. ○ 주님이 보시면 이처럼 이렇게 외형적 껍데기를 가지고 하는 신앙생활을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으로 사람을 평가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재산과 학벌, 배경과 상식이 있느냐 없느냐로 사람들의 됨됨이와 신앙, 성공과 실패를 말하지 않는지요.
○ 하나님의 시각과 기준과 판단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사람이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고 하나님 앞에 정결하다 인정을 받으려면, 사람의 계명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에 갔다. 교회에서 돌아왔다.’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섬긴다.’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 설교를 들어도 마음으로 듣고, 잊지 않는 사람이 있고, 찬양과 기도를 해도 전심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웅장한 건물과 실내 장식, 깔끔한 진행, 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말씀과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과 만남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 남들이 모두 제 소견에 따라 하나님을 경홀이 여기니~ 나도 대충 하나님을 섬긴다. 교회 대예배에 참여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말 한마디 나누는 사람없이 예배시간에 다녀간다. 일 주일 내내 말씀을 대하는 시간도 없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시간도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명도 변화도 없는 사망의 길입니다.
○ 유대 사회에는 고르반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부모를 공양하기 위한 의무를 회피하는 데 악용하였습니다. 부모에게 드려 봉양해야 할 것을 일단 고르반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만족하고 합리화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하나님이 받으셨다.”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이 세운 규례와 제도 관념이 하나님의 뜻이라 왜곡한 것입니다.
○ 부모에게 할 일은 부모에게 마땅히 준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의 탐욕을 채우는 일은 악한 행동입니다.
○ 갈릴리로 돌아오사 가버나움에 이르셨을 때 세금 걷는 자가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관세와 국세를 내는 사람이 타인이냐 아들이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의 나라에 오신 분이십니다. 세금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명하여 바다에 낚시하여 오르는 물고기의 입을 열면 한 세겔을 얻을 것이라 하시며 세금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라 말씀하셨습니다.
○ 주님이 세례요한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일반으로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통념이 있었던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으나 예수님에게는 이런 행위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말씀하시며 세례요한이 세례식을 행하는 것을 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높고 낮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사함의 표로 세례에 참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일반통념이고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모든 일의 결정은 하나님 앞에서 입니다. 사람의 이목이나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 사람의 관념에 따르는 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 요즈음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즈음 인터넷으로 예배드린다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는 다 제 소견을 따르는 신앙생활입니다.
○ 사람의 규례와 전통이 중요하고, 혹은 사람들의 얄팍한 지식과 견해에 추종하여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탄은 늘 우리를 다른 일에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두게 하고 집중하게 합니다. ○ 이 세상에 모든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 안에서 새생명을 얻고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얻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나사렛 고향에 방문하셔서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거기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그가 행하는 능력을 보고 놀라 "이 사람의 이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사람들은 그의 지혜로운 말씀이나 능력보다는 그의 출신성분과 이력을 보았습니다.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고작 요셉의 아들로 목수일을 하던 예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만을 절대시 하며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못난 사람 잘 난 사람"을 평가하며 차별합니다.
◉ “남루한 옷차림이 경차를 타고 주차장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저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이런 고정관념에 매인 사람은 그 사람의 가능성을 생각지 않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부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지식으로, 고정관념은 사람을 협소하게 하고 경직되게 하는 것입니다.
○ 공산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출신성분에 의해 사람의 재능과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사회는 모든 사람의 가치를 존중해 주고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 어떤 사람은 같은 어떤 물고기의 생김새가 다른 것을 진화과정의 산물이라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동차의 발달을 진화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도체 기술의 발달을 진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진화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으로 진화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잘못된 통념에 쇄뇌 되어 사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사람들에게 잘못된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있습니다. 당장의 현상을 보고, 아니면 지난 습성에 따라 새로운 변화와 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고정관념들과 싸우고 투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잘못된 고정관념은 중대한 문제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고기 잡는 어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리스도 주의 오심을 인간들에게 보이셨지만 당시 사람들은 단지 놀랄 뿐이었습니다.
[마가복음 7:15,16]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무슨 말씀입니까? 인간을 더럽히는 것의 원천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염된 인간의 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된 본성을 통찰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그 안에 죄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손이나 그릇을 깨끗이 씻고, 제도나 사회 환경을 바꾸면 인간의 사악함이 개선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를 緣木求魚 (나무에 올라 고기를 얻으려고 한다)라 합니다. 되지도 않을 불가능한 수고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7:20-23]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레미야 17:9] “민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이 말씀은 어느 특정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정결함을 얻을 어떤 가능성도 없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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