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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자>
[마태복음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 우리는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 길을 여행하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먼길을 마다하지 않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먼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 모두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본이 되셨습니다.
○ 그런데 당시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을 완전히 벗어나서 이방 지역으로 실제 들어가셨는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곳으로 가신 이유는 유대 종교 지도들과 때이른 충돌을 피하고 조용하게 쉬시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이방으로 가지 말 것을 명하셨다는 것, 그리고 본문 [마태복음 15:24]에서는 예수님 스스로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7:24]에 쓰인 지방이란 헬라어 단어는 ‘경계’ ‘지경’ 이란 의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습니다.
[마가복음 7: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마가는 예수님이 두로 지방에서 나오셨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더 북쪽의 시돈까지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나다니기를 꺼리던 사마리아 지경에 들어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이방의 갈릴리를 넘어 두로와 시돈의 먼 지역까지도 다니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마태복음 4:23]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다니셨다 했는데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말합니다. ‘온 수리아’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마태의 특별 관심지역이었습니다. [25절]에서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따랐다 말하는데, 그에 앞서 [24절]에서 온 수리아를 언급합니다. 두로와 시돈이 속한 지역입니다. 이 지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예수님은 많은 갈릴리의 가버나움 고라신 벳세다 이런 도시들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치 아니함으로 탄식하고 있는데, 두로와 시돈 지방의 사람들은 적은 권능에도 마음이 열려 있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 마태는 ‘가나안 여자’ 라 말하는데 [마가복음 7장]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말해줍니다. 수로보니게란 수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로, 팔레스타인 북부 쉬리아에 사는 페니키아(뵈니게) 사람을 말합니다.
○ ‘가나안 여자 하나가’ 이를 직역하면 ‘보라 한 가나안 여자가’입니다. 우리 성경에 ‘보라’가 생략 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등장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한 눈에 누가 보아도 이 여인이 이스라엘 여인이 아님을 알수 있었습니다.
○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를 ‘주’ 라 불렀습니다. 헬라어 ‘주’ 에 해당하는 ‘퀴리오스’ 는 물론 다양한 경우에, 또 여러 대상에게 사용되는 호칭이지만 근원적 의미로 볼 때는 주종의 사회 속에서 자신은 ‘종(둘로스)’ 이고 상대는 자신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여 나는 당신을 나의 상전로 인정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다윗의 자손’이라 했는데 이는 당신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오실 메시야라는 호칭입니다. 여인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앞선 1-20절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배척하였습니다. 무엇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메시야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한 것일까요?
○ 사람이 좋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많은 성경지식이 있어서, 많은 경험이 있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은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법을 이용하여 부정을 저지르고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탐욕스러운 것을 봅니다.
○ 여인은 얼마나 많이 의원을 찾아 다시며 재산을 허비했겠습니까? 여인은 얼마나 자기 족속들에게 귀신들린 딸의 엄마라고 조롱을 받았겠습니까? 오죽하면 철천지 원수의 나라인 이스라엘 유대인인 예수님을 찾아왔겠습니까?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에 예수님을 영적 권세를 가지신 ‘주’로 ‘메시야’로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 [22절]의 ‘그 지경에서 나와서’ 라는 표현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를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먼길을 걸어서 예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 주님 앞에 나온 여인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쳤습니다. 여인은 한번만 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복하여 외쳤을 것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나안 여인은 매우 간결한 이 호소의 말에 그녀의 딸을 향한 애틋한 사랑과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 여인이 병들어 고통 당하는 그 딸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의 불완전함이 나의 불완전함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나라의 재난이 나의 재난인 것입니다. 사랑은 몇 푼의 동정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저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 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기도에 함께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 오늘 이 여인의 외침은 우리의 기도에 날마다의 외침이 되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우리는 마음이 굳은 자들입니다. 기도하기 원하지만 기도의 습관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갖기를 바라지만 원망과 불만이 가득한 나입니다.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원하고, 교회를 살리기 원하고, 나라는 위기에 빠져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마태복음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 여인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민망한 제자들이 나와서 예수께 나아와 말합니다. “이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그 여인을 보내야 하는 이유가 계속하여 소리를 지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요청을 하였던 것은 가나안 여인을 불쌍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여인의 고함을 듣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여기서 ‘보내소서’ 라는 말은 빨리 기도를 해주고 보내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응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인에게 하신 대답이 아니고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여인을 무시한 말씀이고, 여인의 귀에 들리도록 거절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옆에서 들은 여인은 이제 예수님 앞에 절하며 말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런데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 심하게 들려집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지겠느냐? 너희들은 개와 같은 인간들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 동안 자신의 민족에게 무시를 당해온 것도 억울한데 이제 원수의 민족에게 절까지 하며 구하는데 무시를 당한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 여인 하는 말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합니다.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이 생략되었으나 원어 성경의 서두에는 ‘오’란 감탄사가 나옵니다. 기대를 넘어서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데 “오 네 믿음이 메가톤급이다.” 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 직역하면 ‘네가 바라는 만큼 네게 이루어져라’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딸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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