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4:1-14  <판단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절]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절]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우리는 늘 판단하며 분별하며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판단하지 말라’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했고, ○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을 때,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례를 범했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정죄해 죽이려 하였습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명하셨습니다. (출 31:15) 외형적으로 율법 준수라는 규정만을 가지고 볼 때, 예수의 병 고치는 행동이 안식일을 어긴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안식일 규례를 허무는 것은 유대교 신앙의 기초를 흔드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규례를 강제해서라도 지킴으로 유대민족의 신앙을 지켜야 축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규례를 생명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에 병자를 고치시며 안식일의 규례를 흔들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공의로 판단하라’ 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안식일 치유 사역을 변론하시며, 유대인이 안식일에도 할례 행한 것을 예로 드십니다. 유대인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제 8일에 언약 백성의 표시로 할례를 행합니다(레 12:3). 할례를 행할 시기가 안식일과 겹치는 경우, 할례 규례를 더 중시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할례는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할례의 규정을 지키기 위하여 안식일의 규정을 보류하지 않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판단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강제적으로 지키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했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 ‘외모’는 보이는 것, ‘겉모습’입니다. ‘율법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하는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 ‘공의로 판단하라’ ‘바르게 판단하라’ 말씀입니다. ○ 주님은 우리에게 율법보다는 긍휼을 가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오류투성이며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 바울은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말합니다.

[야고보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말합니다. 야고보는 가장 먼저 ‘서로 비방하지 말라’ 말하는데, 비방이란 'To speak against' , ‘다른 사람을 대적하여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비방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 는 말을 병행했을까요? 이는 동일한 의미에서 사람을 결론지어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말고 대충 넘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판단'은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 심판을 의미합니다. 사실 비방'과 '판단’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으로 사람이 사람을 비방할 때, 사람을 결정지어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방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는 율법의 가르침에 선을 넘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했습니다.

야고보는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을 준행하는 사람이지 재판관이 될 수 없다” 말합니다.

◎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 말은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을 비난하기보다, 그가 왜 그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라는 말입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 안에 선함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은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연약함과 환경에 따라 죄인의 자리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본질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사람은 죄인임과 동시에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죄와 사람을 분리함으로써 인간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고, 죄와 사람을 분리해 봄으로써 내 마음에 분노를 멀리하여 나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는 악이 단지 개인의 악한 의지에서만 비롯되지 않음을 지적했습니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백만의 유태인을 가스 수용소로 보낸 나치 전범입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기자는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기자는 아이히만이 독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자가 만난 아이히만은 너무도 평범하고 친절한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악이란 비판적 사고 없이 관습과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쉽게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잘못된 모든 행동이 반드시 악한 의지, 악한 성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능력 혹은 의지력의 부족이나 환경적 요인에서도 비롯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것은 한 사람의 문제를 보며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한 사람의 실수를 그 사람 인격 전체로 확대해석하지 말고, 그 사람 행동의 맥락과 원인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원천이 마귀의 궤계에 있음을 알고, 이를 대적하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정의로우시며, 불의를 심판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불의하다면 그가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틀림없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은혜 없었더라면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미련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문에서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죄는 미워하더라도 감히 선을 넘어 교만한 마음을 품고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하여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죄를 옹호하거나 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죄를 드러내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는 마치 어항의 바닥을 뒤집으면 물이 흐려져 물고기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 역시 부끄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죄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워하여야 할 대상은 사탄의 궤계로부터 온 죄입니다. ○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바르게 판단하라.’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가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사랑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누군가의 죄와 사람을 하나로 뭉쳐서 본다면 이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까닭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사람을 분리하여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을 가진다면 이는 성령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