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1:10-20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함께 옥중 서신으로 분류되는 서신으로서 기록 시기는 바울이 로마에 감옥에 있었던 A.D. 62년경으로 추정됩니다.

[빌레몬서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돕는 자 가운데 몇몇을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했고, 디도를 믿음의 참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 출신으로 이교도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도주한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서신을 접한 빌레몬은 본절에서 오네시모란 이름을 대했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즉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도망자 노예가 바울의 영적 아들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유익한’이라는 의미로 당시 주인들에게 유익한 자가 되라는 의미에서 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본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종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가 된 후로는 ‘나와 네게 유익한 자’ 라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전에는 다른 노예들처럼 눈가림만 하는 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뒤에는 진정한 순종과 봉사로 모든 일에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1:12] “저는 내 심복이라말하고 있습니다. ‘심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특별히 주인의 마음을 알아주고 충실 된 협력자로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계속하여 자신 곁에 머물러 두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바울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는 매인 몸이었기 때문에 전심으로 자신을 돕는 오네시모가 더욱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오네시모는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오네시모의 법적 소유권이 주인 빌레몬에게 있었기 때문에 빌레몬에게 용서함을 받아 온전한 신분을 회복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 여기서 바울이 [1:13]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란 표현에서 바울은 자신을 섬기고자 하는 빌레몬의 마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의 허락 없이 오네시모를 자신 곁에 머물게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네시모를 일단 빌레몬에게 돌려보내 그의 동의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매사에 일을 자의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바울이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세워주고, 가까운 사이였으며,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에게 정중히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모든 일에 삼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바울이 신앙적으로 대선배이고 세상에 명망을 가진 사람이고, 은혜를 끼친 사람이지만 바울은 내가 필요하다고 사람을 데리고 있고, 편지 한 장 보내서 “이렇게 되었다.” 통지하는 것으로 대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강제적으로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의사를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뭇사람에게 자발적인 마음을 끌어내는 것이고, 한마음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빌레몬서 1: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원문에 헬라어 ‘타카(τάχα)’ 즉 ‘아마’를 의미하는 말로 시작하면서 그가 잠시 빌레몬을 떠나 있었던 기간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종으로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주인을 떠나 로마에 와서 새사람이 되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록 오네시모가 좋지 않은 동기로 빌레몬에게서 도망쳤지만, 그 가운데 은밀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오네시모를 구원하신 전 과정을 보면서 이를 하나님의 섭리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불의를 조장하고 버려두나?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섭리란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시고 용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와 실수조차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 이성계(李成桂)가 우리의 국토를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시켰다. 그는 역사의 죄인이다. 박정희가 남로당원(南劳党员)이었다. 그는 5.16구테타를 일으켰다. 독재하였다. 물론 이는 역사에 남을 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로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국가의 혼란을 평정하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아니었으면 이 나라는 더욱더 부강하였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의 추론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나 세상에서는 쓸모없다고 생각한 재주도 귀한 것으로 바꾸어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 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이전의 한 가지 행적만을 콕 집어서 문제 삼는 것입니까? 지금 오네시모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받으셨는데 사람이 부정하는 것, 이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 제가 보기에 김일성 왕조는 역사에서 지워야 하는, 100번을 사형하여도 부족한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남쪽의 부흥은 남과 북의 경쟁구도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6.25전쟁 속에서 우리에게 통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인생과 역사에는 과거 악이 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공로와 과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람의 공과 실을 다루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과 우리의 미래를 축복된 역사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사람을 평가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으셨는가?”입니다.

 

○ 우리는 한 사람 오네시모의 인생의 과정을 보면서 바울이 ‘아마’ 즉 ‘타카(τάχα)’라는 말로 시작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분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시대를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나라 교회에 맡기신 한가지 사명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동남아.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에서 노동자로 이주민으로 대한민국에 오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부족이나 출산율의 저하로 대한민국이 당한 큰 위기를 헤쳐나가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이민을 받아들인다면 그동안의 유럽이 당한 혼란과 비효율처럼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 지금 온 세계는 자국 보호주의로 인해 복음의 문이 닫히는 시대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대한민국으로 많은 사람을 보내어 복음 전파의 대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들을 바꾸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저들에게 동화되고 온 세계를 향하여 ‘평화를 알리고 복음을 전하라’ 하신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사라질 것입니다.

[빌레몬서 1:18,19]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 오네시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 속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복음을 위한 신실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복음과 바울에게 매우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고 그의 과거를 용서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울은 자신이 빌레몬에게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하면서 오네시모를 받아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네시모에게 마음껏 사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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