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35-41  <그가 누구이기에>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무려 200미터 이상 낮고 주변 사방에는 높은 산들로 둘러 쌓여 있어서 갑자기 큰 돌풍이 발생하는 일들이 잦았습니다. 해가 지고 나면 헬몬산에서 요단 계곡에 있는 갈릴리 바다로 바람이 불어 큰 파도를 일으키곤 합니다. 이런 갈릴리 바다는 마치 우리 인생에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바다와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도 재난을 당하고 병이 들 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다 소용없다. 믿음을 가진 자나 믿음을 갖지 않은 자나 다 똑같다”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당하는 고난이 다 같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과 이 세상의 사람을 확연히 구분하는 근거는 믿음이 크든 작든, 성도는 자기 인생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36]에 보면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제자들이 탄 배에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배에 모셨다는 것은 내 마음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고, 문제가 생기니 주님을 깨우는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광풍으로 인해 침몰 위기에 직면하여 다급해진 제자들은 배의 뒤편에서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면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를 잘 아는,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경험 많은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 목수로 살아온 예수님을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기도란 모든 인생의 문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단지 목수로 생각했다면 예수님을 깨우며 간청했겠습니까? 그들은 혹시나 도움을 기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라고 하셨습니다. 구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 야곱은 얍복 나루를 건너기 전에 밤이 맞도록 천사와 씨름하였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원한을 품고 군사 사백을 이끌고 다가오는 형 에서를 대하기 전에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도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곱 칠십 평생에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로써 형 에서의 얼음 같은 마음은 녹아지고 형제는 화해하였던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가 위기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마가복음 4: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 광풍을 만난 제자들의 상황은 구약성경에서 요나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요나 1:4]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하는 표현은 오늘 본문의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하는 표현처럼 배가 파선 직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또 유사한 점은 광풍으로 인해 배가 침몰의 위기 때, 요나 역시 배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역시 다른 사람에 의해 잠에서 깨어납니다. [요나 1:6]

○ 그러나 요나와 예수님의 대처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 폭풍이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일어난 줄을 알고 그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 하였지만 [요나 1:12] 반면에 예수께서는 권세 있는 말씀으로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만드신 것입니다. [39절] 요나는 풍랑을 일으킨 요인이었고 예수께서는 풍랑을 잠잠케 하신 요인이셨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종이었지만 주 예수님은 순종의 종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마침내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마가복음 4: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여기서 ‘고물’은 ‘선미(船尾)’ 즉 배의 뒤쪽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은 "고물을 베개하여 주무셨다" 했습니다. 예수께서 풍랑 중에 평안하게 주무셨다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모습과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지니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한 제자들의 상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람의 마음의 평안은 사람이 가진 것이 많고 배경이 있고, 재주가 있어서 평안을 얻기도 하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바람 앞 등불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춤추는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만족에 ‘하하’ 하며 크게 기뻐 득의양양하다가도 작은 실패에 낙심하여 곧바로 위축된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흥분하여 원망하는 태도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선생님’이란 호칭을 마태는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8:25]에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며 κύριος ‘주여’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는 노예에 대한 반대로서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눅 8:24]에서는 정중히 도움을 요청하는 태도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여’란 호칭은 κύριος ‘퀴리오스’가 아닌 일반적인 관계에서 높임말로의 ‘주’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입니다. 왜 이처럼 복음서마다 표현이 다른 것일까요? 이는 아마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그의 강조점은 현장 그대로의 전달이 아닌 청중을 향한 ‘기도’의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며 이제까지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광경들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 죄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로 믿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마가 본문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여’ 부르는데 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자신들과 함께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 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이 내려 구원받은 놀라운 일들이 있었고, 광야에서 만나 양식을 먹고 메추라기 고기를 배불리 먹었으며 외적의 위협에서 보호를 받았음에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망하다가 멸망 받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로 돌아갈 수 있는지~ 제자들이 그 많은 이적을 눈으로 보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는데도 두려움에 빠져 주님 앞에 원망하고 있는지~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명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도움만을 구하여 살아왔습니다. [40절]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41]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순종하는 사건을 보며 “그가 누구이기에” 생각하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때마다 순간마다 믿음이 부족하여 좌절하고 두려움에 빠지기를 수차례, 그때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인내로 받아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헤롯에게 체포되어 옥에 갇혔을 때 내일이면 끌려나가 처형이 될 것을 알면서도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일이 있습니다(행 12:6). 과연 보통 사람들이 처형되기 전날 이처럼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까요? 이는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 위로부터 임하는 평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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