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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1-11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1-11 <이 마음을 품으라.>
교회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교회는 마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러한 정의는 오늘날에도 개신교 교회론의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눈에 보이는 건물과 직접적으로 일치시켜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 예배당일 뿐입니다.
◯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20세기 중엽에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흩어지는 교회’의 중요성을 말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모임’뿐만 아니라, 그들의‘흩어져서 활동하는 삶’의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말하는 신학자는 사실상 거의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론은 교회가 구원의 방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겨자씨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줍니다.
[마 13:31-32] 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이 기도는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중요한 도구임을 말합니다.
◯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불완전한 교회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교회가 복음전파의 동력을 상실한 모습도 있고,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난 많은 사람도 있음을 봅니다. 최근에는 집에서 인터넷예배에 익숙해져서 홀로 예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문제를 말하기에 앞서 그 성원인 교인이 변화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의 끈끈한 사랑도 있었고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는 협력과 일치가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본문에서도 성도들 간의 교제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마음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입니다. 교회에는 때로 믿음이 약하거나 시험에 빠진 성도, 빗나가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약하다고 책망하거나 무시 소외시켜서는 안 됩니다. ‘가까이 부름’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닙니다. 개인이 존중 되고 보호 받아야 하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사정을 묻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사랑의 위로입니다. ‘위로’란 설득하고 격려하는 일입니다. 권면과 같은 말이나‘부드러운 격려’, ‘용기를 돋움’, ‘장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 알지 못하는 전화가 와서 상담한 일이 있습니다. 영적체험을 말하지 말라 했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은 모양입니다.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만 귀한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사람의 교제를 말하지 않고 성령의 교제를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음으로, 성령에 순종하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교회는 금식하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지시하심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세워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 교회가 성령의 교제가 아니면 인간적인 교제가 되고 인간적인 교제에는 파당이 생기며 파당이 생기는 곳에는 분쟁이 생깁니다. 모든 인간의 교제도 성령님이 주인 되는 성령의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 우리의 만남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 된 것입니다.
◯ 성령의 교제 속에는 긍휼과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긍휼과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긍휼과 자비를 배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긍휼은 이웃의 사정과 형편을 마치 나의 일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 것처럼 성도들은 서로를 향한 긍휼과 자비가 있어야 합니다. ◯ 입으로 하는 사랑은 공허한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2절]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5절]에 ‘이 마음을 품어’ 와 같은 마음인데… ◯ 이 마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주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위로와 긍휼과 자비에 그 사람의 위로와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의 태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선을 드러내는 일이 될까 두렵습니다.
◯ 같은 사랑을 가지라 했는데 ‘같은 사랑’이란? ◯ 예수께서 내게 행하신 사랑입니다.
◉ 사랑 종류에는 이성적인 사랑도 있고, 가족에 대한 사랑도 있고, 비슷한 환경과 처지 학연, 지연에 따른 友愛도 있습니다. 다 좋은 것입니다. 다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神的愛>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사랑할 대상, 의지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또한 ‘같은 사랑’은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입니다.
◯ 그리스도의 마음이나 그가 가르쳐 주신 사랑이나 교훈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자신의 방식, 자신의 만족, 자신의 취향만을 생각한다면 결코 같은 마음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한다.”하면서 내가 칭찬을 받고, 내가 기쁨을 얻고, 내가 의의를 성취하고, 이득을 얻으면서… 이 모든 것은 아직 내가 살아 있는 까닭입니다. 나는 사라지고, 나는 부정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있어야 합니다.
◯ <다툼과 허영>으로 함이란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이해, 방식과 선택에 따라 일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교제해야 합니다. 오직 < 겸손한 마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 이 쉽지 않습니다. 자기부정을 말합니다. ◯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에 뜻을 합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성도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그리스도의 자기卑贱, ‘케노시스’는 ‘비우다’ ‘공허하게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육신을 입으시어 존재 방식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우셨다. 라는 표현은 성육신하셨음을 말합니다. (성육신이란 단어는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위대한 사건이라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볼 때는 굴욕을 입으신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것, 자신이 지니고 있던 영광스러운 지위를 잠시 뒤로 한 채 종의 형체를 입으셨음을 말합니다. ◯ 하나님의 종, 즉‘둘로스’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순종하는 종으로 성부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종으로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고, 공생에 기간에도 머리 둘 곳이 없이 가난하게 사셨으며, 주리고 목마르고 피곤함을 경험하셨다. 슬퍼하며 울기도 하시고, 육신의 몸이 지니는 최종적 한계인 죽음도 경험하셨다. 죽은 후에는 무덤까지도 빌리셨습니다. ◯ 예수님은 살과 피,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종의 외양만 취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이 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종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 제가 아는 한 중국목회자가 있습니다. 대련의 한 사업가를 만나 사역을 함께 하였지만 곧 갈라섰습니다. 뒤에 여성 사업가가가 하는 말이 사람들만 보면 가르치려 하여서 모두가 그를 멀리 하더라는 것입니다.
◉ 중국에서 한 아이가 우물에 빠졌는데 스스로 줄을 매고 올라올 수 없어 어른이 내려가야 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구원치 못하는 나를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9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롬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춘 그리스도를 높이시되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심으로 존귀를 주셨고 하늘 보좌의 우편에 앉게 하셨으며, 그리스도는 이제 만왕의 왕으로서 그의 손에 우주의 통치권과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성육신하기 이전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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