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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7 <죄를 다스리라>
창세기 4:1-7 <죄를 다스리라>
[창세기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28) 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여전히 유효함을 봅니다. 그리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하와는 지금 자기가 낳은 아들에 대해서 자기의 남편으로 말미암았다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와가 비록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인간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받았으나 축복이 축복 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 중에 그들을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세상에 죄가 유입되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죄로 점철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인생의 짐을 져야 했고, 인간은 두려움과 소외로 인해 더욱더 큰 죄 짐을 지고, 결국 살인까지 이르게 됩니다.
[창세기 4:3-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 가인과 아벨은 각각 땅의 소산과 양의 새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가인과 아벨이 선택한 제물은 그들의 직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반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단순히‘땅의 소산’으로만 기록함으로써 그것에 가인의 정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았음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데서, 제사의 열납 여부가 그것을 드리는 자의 인격 또는 마음의 자세를 보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제물과 그것을 드리는 자의 마음을 함께 보신 것입니다. ◯ 아벨의 제물에 대해서는‘양의 첫 새끼’라고 기록함으로써 그것이 아벨의 정성이 흠뻑 담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은 자신의 가진 귀한 것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린 믿음으로 드린 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둘째,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통해 보이신 것은 이 피 제사가 여자의 후손(3:15)인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속죄 사역을 예표 한다는 것입니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제사는 왜 드리는 것입니까? 하나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풍요를 주신하나님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원입니다. ◯ 다른 하나는 죄사함입니다. 피흘림을 통하여 나의 죄를 대신해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 아벨은 생축으로 하나님께 피 제사를 드림으로써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인류를 위해 대속사역을 수행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예물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의 믿음과 제물을 열납하신 것입니다.
○ 반면, 가인은 그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린 까닭이었습니다. 가인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죄인식이 없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와 감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도 제물도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이 말은 단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만이 아니고, 그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말합니다. 제 아무리 값비싼 제물이나 웅장한 예배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는 예배, 주님 앞에 아무런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예배라면 하나님의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린 그의 제사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 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산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자신의 의와 공로를 내세우는 제사였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자 심히 분해하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은 데 대하여 스스로를 돌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어야 마땅했음에도 도리어 마음에 분노를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동생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 이 세상에는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열매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모두 죄를 범하여 부패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자신의 의로 자신을 구원할 어떤 가능성도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려 하거나 그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 중에 누구도 자신의 의나 공로를 내세울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total inability(전적무능) total depravity(전적부패)라고 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옴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힘입어야 합니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
○ 가인은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자였습니다. 동생 아벨에 비하여 더 땀 흘려 수고했는지도 모릅니다. 더 큰 富를 이루었습니다. ○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 야곱의 형인 에서는 남자다운 용맹과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그도 부모의 사랑과 축복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 요즈음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이 옳다고 말하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풍조에 살아갑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는 사람들도 많은 실수를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바른 판단과 옳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진리를 찾고, 부끄럽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애쓰고 노력한다고 다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 에서가 없이 야곱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 바로가 없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 북한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들을 쓰신 것입니다. ○ 우리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포용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창세기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죄가 문에 엎드린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죄를 마치 먹이를 덮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웅크리고 있는 맹수와 같이 묘사하고 계시는데 이는 우리가 아차 방심하면 죄의 먹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하겠습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죄의 영향력 하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마옴 문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결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인간은 죄 앞에 너무나도 약한 존재입니다. 사람 안에는 죄성이 있어서 늘 판단하고, 비교하고, 자랑하려 합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항상 제 마음대로 하려합니다. 타락하고 부패하여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에 죄의 욕망, 죄의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처럼 깨지지 않는 요새와도 같습니다. ○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권고하십니다. 강렬하고도 악한 죄의 세력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향하여 죄의 욕망을 제어하고 극복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 할 수 있으니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물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 사람이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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