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8-35  <다시 살리라>

[요한복음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자매를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많은 애도자들이 이 집을 찾은 것일까요? 먼저는 아마 나사로의 대인 관계가 원만했으며 그의 집안이 유력한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께 부었던 향유가 매우 값비싼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사로를 위해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많은 호곡꾼을 불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나사로의 친구, 친척들도 있고, 나사로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쨌든 주님은 조문객들이 많이 모인 자리를 기회로 삼아 ‘죽은 자를 살리는 그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알리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부활절을 이용하고, 감사절을 이용하고, 성탄절을 이용하고, 많은 접촉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목마르실 때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각 촌과 각 성을 다니셨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3km도 되지 않는 거리였으므로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문상객이 올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예수께 위험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베다니로 가는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즈음 세상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시대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부담이 되고, 손해가 되면 멀리합니다. ○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꺼리는 일이고, 손가락질받는 일이었으나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 주님은 공생애 마지막 때 [막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 물론 때가 이르지 않아 자신의 사시던 동네 나사렛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죽이려 할 때 피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필요하다면, 설사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 이 모든 일을 행하는데 꼭 있어야 하는 믿음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 나의 하는 일을 보고 계신다. 나를 도우신다.’ 하는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본문에서 우리는 마르다가 마리아보다 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여인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자 곧 맞으러 나갔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마르다에 비해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그녀는 집에 그대로 ‘앉았더라’ 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섭섭해서 그랬다’ 말하는 것은 지나친 판단입니다. 그녀 역시 예수가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급히 뛰어나갔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오라비를 잃은 슬픔에 깊이 빠져있었거나 상주들 중에 누군가는 남아서 자리를 지켜야 했으므로 신중하게 처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을 마리아도 똑같이 마리아가 예수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

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를 만나자마자 처음 한 말이 듣기에는 불평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예수께 대한 믿음과 오라비의 죽음에 대한 깊은 상실감을 보이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이곳에 계셨더라면’ 상황이 훨씬 달라졌을 것이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여기 마르다는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말이 예수님을 향한 불평으로 보일까 염려하여 존중의 말로 인사치레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 말에서 주의할 것은 그녀의 생각에 예수님도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할 때 받는’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하실 때, 남다른 기도의 능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 물론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새벽 미명에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으시기도 하였고(막 1:35), 때로는 혼자 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눅 6:12). 주님에게는 기도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 그러나 이는 공생애 기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놓치는 것이 예수님 자신이 바로 기도의 대상이시며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말씀하셨습니다. ○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예수님이 “나사로가 살 것이라” 말씀하셨을 때, 그녀가 이를 받아들이기에는 그 사안이 너무 중대하고 또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 지금 이 시대 많은 신자도 주께서 주신 약속들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입으로 ‘믿는다’ 말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응답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지적인 인정이 아니라 무조건의 믿음이라야 합니다. 사람의 말은 따질 수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 한 할머니가 새벽마다 누구보다 일찍 교회에 나와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방탕한 집 나간 아들이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이를 본 교회 목사님이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할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잘 될 것입니다. 그때 할머니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그 자식이 언제나 가능하겠어요”

○ 마르다가 알고 있던 ‘마지막 날’과 ‘부활’은 먼 훗날의 일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교의 유력한 종파 가운데 하나인 바리새파,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이는 오늘의 믿음을 갖지 못한 자와 같습니다. 이는 나약한 믿음으로 늘 좌절하고 실망하며, 패배하여 살아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많은 기도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하지만…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나’이지만,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고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먼 훗날의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여러분은 우리가 매주 기도하는 “젊은이가 돌아오게 하소서” “이 나라가 정결한 나라가 되게 하소서” “남북이 평화로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저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할 때, 지금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기도를 듣고 계시고,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 예수를 영접한 믿음의 자녀에게 부활은 지금 오늘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나흘 만에 소생시키신 사건은 예수가 무덤에서 부활하여 사흘 만에 살아나신 사건이 오늘 나에게 속한 일임을 알리신 사건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내 안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때의 성취자’이십니다. ○ 다니엘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니엘 9: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왜 그렇습니까? 중보자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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