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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4:13-24 <청함 받은 사람들>
누가복음14:13-24 < 청함 받은 사람들 > 2010.11.21
어떤 못된 사람이 죽어서 베드로 앞에 불려갔대요. 이 사람은 당연히 지옥에나 가겠구나 싶었데요. 그런데 베드로 하는 말이 "이보게 자네 천국으로 갈텐가?, 지옥으로 갈텐가? 선택하게." 그러자 이사람 지옥에나 갈 줄 알았는데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생각 좀 해보고 결정해도 되죠?" "한번 구경 좀 하고 선택해도 돼요?" 베드로는 그렇게 허락하고 그를 데리고 가서 우선 천국을 보여줍니다. 천국은 하루 종일 사람들이 신을 찬양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생전 찬양이라고는 근처에도 안 가본 그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번에는 베드로를 따라 지옥으로 갔습니다. 지옥에 갔더니 술집도 있고, 노래방도 있고, PC방도 있고, 이쁜 아가씨도 있어요. 이제 선택할 시간! 이사람 어디를 선택했을까요? "베드로 성인님! 아무래도 전 천국 체질은 아니고, 지옥이 좋아요."
그는 이제 지옥을 택해 지옥으로 갔는데요. 아주 깊은 무저갱으로 쑥 들어가더니 불길이 확확 나오는 지옥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어요. "아니 아까 와서 본 지옥하고는 영 다르잖아요?" 그러자 베드로 성인이 점잖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왔을 때는 관광비자로 온 것이고, 이번엔 영주권을 받아서 온 거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주인을 크게 당황케 만드는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임금이 초대한 잔치에 사람들이 오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기뻐하지 않은 것, 이들은 청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이며, 언약 안에 약속된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임금의 잔치. 반드시 와야만 하는 이들이 외면을 하고 거절한 것입니다. 이들은 '일치하게' 그들은 모두 다 주인의 초청을 사양했습니다.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이 한 변명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나를 용서하라!"
두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나를 용서하라!" 여기에서 '다섯 겨리'는 '다섯 쌍'을 말하는데, 이 정도의 소를 사는 사람은 상당한 부농에 속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그는 신혼을 즐기기 위해서 잔치에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비유말씀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복음전도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전도하다 보면 구원과 복음에 대한 무관심 또는 냉담한 반응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1) 교회에 나가면 헌금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2) 자기 자신을 읽어 버릴까 두려워합니다.
3) 많은 친구들과 멀어지고 격리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 손해 보느니 차라리 하나님 없이 살기 원합니다. ○ 문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너무 미치지는 말아라. ○ 그들은 세속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함으로 해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1) 본문에 거절의 첫 번째 이유는 한마디로 바쁘고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들의 삶은 세상일로 너무 분주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마지막 때에 마귀가 쓰는 전략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주함에 매이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계략인 분주함에 매여,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2) 저들이 임금의 잔치를 거절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잔치에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 입니다. 그 잔치가 내게 주는 유익이 없다 생각합니다. 아마 내 이름을 내는 일이고, 내가 주인공 되고, 내가 건강해지고, 내 문제가 해결된다면 만사를 제치고 제일 먼저 왔을 것입니다. 이 대표적인 세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하나 같이 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정만 살펴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드러운 표현으로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고 초청하는 주인을 절대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 자기 사정을 늘어놓으며 초청에 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자기만족을 채워 줄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잔치자라가 초라해진 기독교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영적이기보다, 육적이요. 자기 유익. 자기만족이라는 세속적 가치관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왕의 잔치, 임금의 잔치에 절대로 매력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의 유토피아를 위한 잔치였다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사람을 만족시키는 종교였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훨씬 더 여기다하고 모였을 것입니다.
◎ 만약에 온자바오 총리가 당신을 부르면 오겠습니까?
주님이 초대할 때는 내 마음에 드는 일, 나의 유익을 위하여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오기를 꺼린다 하더라도, 그리도 싫다하는데도 저들을 초대하는 이유는 생명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비유 속에서 주인은 종에게 끊임없이 명합니다. 종은 두 말 없이 실행합니다.
16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 합니다. 종은 먼저 주인이 잔치에 청한 그 많은 사람들 집집마다 일일이 초청장을 가지고 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했다.”합니다. 종은 두 번째로 집집마다 다 다니며 잔치의 시작을 알리고 빨리 오기를 청해야 했던 것입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오기를 사양한다고 보고하자
21절에 보면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합니다. 종은 곧 다시 나가 시내의 거리와 골목을 다니며 사람 가리지 않고 만나는 대로 데리고 와야 했던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주인이 명한 대로 했지만 아직도 빈자리가 있다고 말하자 주인은 또 종에게 명령 합니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종은 주인의 잔치자리를 모두 채우기 위해 또 다시 사방 더 먼데까지 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강권하여서라도 이 잔치에 참여 시키라 하십니다. 거절을 당하실 뿐만 아니라 종들을 희생 시키시면서 까지 저들을 잔치에 초대하려고 합니다. 웬만하면 그만 두어 버리실만도 한데, 끊임없이 누구라도 초대하여 잔치를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탄 가장 행복한 국민 / 히말라야의 산 속에는 부탄이라는 은둔의 나라가 있다. 교통신호등이 없는 나라, 민주정치보다는 왕정을 원하는 나라, 국민의 대다수가 전통복장을 고수하는 나라, 자연보호와 물질문명의 오염을 막기 위해 관광객을 제한하는 나라, 무엇보다도 국민의 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가 가장 높다고 자부하는 나라가 바로 부탄이다. 가난해도 마음만은 풍요로운 나라 부탄의 국민들은 대체로 표정이 밝다. 부자라고 의시되지 않고 가난해도 주눅 들지 않는다. 그들은 부와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세속적 욕망은 찰나의 쾌락을 위해 고통의 업을 쌓아갈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품성은 불교를 모태로 하는 독특한 종교적 삶에서 유래한다. 그들에게 불교는 종교이자 생활 그 자체다.
부탄 가정에는 어느 집이든 ‘최삼 (choesham)’ 이라 불리는 불단이 비치되어 있다. 하루의 일과는 이 불단에 예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해 저녁에 다시 예배를 올리면서 마친다. 이처럼 부처님을 향한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사는 부탄인들의 표정에는 그늘이 없다. 오늘 이 생이 삶의 전부가 아니고 다음 생 그리고 또 다음 생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지금 눈앞의 현실에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소망은 고통스런 윤회의 고리를 끊고 불성을 깨달아 열반에 드는 것이다.
부탄에 지금 T.V 가 보급되면서 폭력과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더 이상 무서운 죽음의 병독이 우리를 죽이기 전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두려워하고 배척하기도 하지만 결국 좋은 것을 주시려함입니다.
☆ 놀라운 것은 기독교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국가에 종교적인 분쟁이 생겨납니다. 지금 중국 정부는 기독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유정신과 국가 중심에서 벗어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나는 요즘 무엇이 가장 큰 기쁨인가? 예수님의 <큰 잔치 비유> 에서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 했는데 (마22)을 보면 이때에 잔치를 배설한 사람이 '왕'이었다고 말하고, 그리고 그 잔치가 '혼인잔치' 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14:13,14,15]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늘잔치입니다.
욥이 고난 중에 가장 큰 위로는 하늘나라였습니다.
[욥 19:26,27]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여기〈큰 잔치〉를 여는 사람이 사전에 날짜를 정하고 초청받은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서 참석하도록 다시 확인합니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이러한 두 번째 초청에는 불가피한 사유가 없는 한 모두 참석해야 합니다. 만일 이 경우에 특별한 이유 없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으면 주인에게 심각한 결례가 되었습니다. 아랍인들에게는 이러한 두 번째 초청을 거부하면 이러한 행위는 당시의 관습으로 보면 일종의 선전 포고였습니다. (마 22:3-6).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땅의 것으로 분주하여 살면서 하나님의 큰 초청을 알지 못하면 참 불행입니다.
초청받은 사람들은 거절하고 대신 임금의 잔치를 채운사람들은 [21절]에 보면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라 합니다. 가서 악한 자여든 선한 자여든 모두 데려와 혼인잔치를 가득 채우라는 것입니다. 새로이 초대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아무나, 만나는 대로. 한마디로 잘나고 지위가 있고 좀 어울리는 사람 이들이 아니라. 한없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뿐입니다. 저들 중에는 도둑질하다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들 중에는 간음을 하다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원래 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교회 안에는 한마디로 자격 없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해도 유명한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했다는 사람들은 신학교를 가려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리석게 보는 십자가를 그 부족한 사람들이 함께 하죠.
마태복음에 따르면 택함 받아 하나님의 잔치자리에 온 사람들이 다 구원받고 천국의 기쁨에 자동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임금이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을 살핍니다.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 가운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손님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질문합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는가? 묻습니다. 임금의 잔치에 초대되어 있는 사람들. 저들은 하나같이 자격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기 잡다 온 사람, 로마와 칼 들고 싸우다 온 사람, 저들이 예복을 입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예복은 주었진 것입니다. 이 예복은 십자가의 옷입니다. 보혈의 옷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잘나서 내가 주의 일을 많이 해서 나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무조건의 용서와 은혜를 입은 자의 옷입니다.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임금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교회와도 주인이 되고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천국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보혈의 옷을 예복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임금의 잔치 에 있는 자들은 모두 예복을 입었습니다.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죽어 마땅한 죄인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믿어 의인이라는 예복을 입을 때 잔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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