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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1:1-4 < 믿음은 실재 >
히브리서11:1-4 < 믿음은 실재 > 2011. 7. 10
믿음은 1)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2)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11:1-2-
믿음이 우리에게 너무 소중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내 구원,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가질 수 있습니다.
2.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未见之事的确据>”라고 말 합니다. 증거<确据>라는 말은 보증, 담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은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안다는 겁니다. 믿음이 이런 것들의 물증이라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 일입니다. 네가 하나님이 창조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 세상 사람은 <보았다 고로 믿는다> -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기 때문에 압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고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틀림이 없습니다. 천지 창조에 대하여도 천국의 존재도 알 수 있습니다. 보지 못하였더라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 내가 믿기 이전에 먼저 이미 이루어진 일들이 있습니다. 나의 지적 능력으로 알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취해야 합니다. 천국 길도, 하나님이 예비 해 놓으신 엄청난 풍요가 있고 축복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아무도 이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생각지 못합니다.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 천지를 지으셨다.’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 눈으로 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만 믿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2) 또 하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있습니다. 미래의 것들입니다.
1. 바라는 것들의 실상<所望之事的实底>이라했는데 "바라는 것"이란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 말합니다.
<히브리서11:1-39절>에서 믿음의 선진들은‘미래의 상(償), 약속의 성취를 바라 참고, 인내하고, 포기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약속에 기초하여 축복의 實體을 믿었습니다. "실상"이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된 실제 상태 實狀을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들이 믿음으로 오늘의 實在 存在로 다가는 것입니다. 《약속에 근거한 믿음이 실상이 되고 증거》인 것은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신실성에 의하여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인간의 허황된 욕망에 의한 소원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은 실현의 근거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참 믿음의 실제>가 아니라 거짓 믿음이요 <망상>이며 <개인적 신념>일 뿐입니다.
예》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나이 늙어 단산했으나 다시 잉태하는 힘을 얻었던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미쁘신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구체적인 약속>에 근거 하지 않더라도 약속이 없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믿음으로 인해 實在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너는 너의 본토 친척집을 떠나라 내가 너로' 라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믿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축복된 사람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 14:14)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합니다. 이때도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심으로 난 기도합니다.
일제 때 중국 봉천에서 홍대위라는 목사님이 선교사로 봉사할 때 간증입니다. 17세난 딸이 있어서 한국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보내야 하는데 차비 50원이 없습니다. 그 당시 50원이란 지금 몇 십만 원이 될 줄 압니다. 남에게 꾼다는 것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모든 것을 맡기고 ‘ 하나님, 50원을 주십시오.’라고만 기도 했답니다.
그러자 딸이 비웃기를 ‘아버지, 돈 50원을 달라고 무턱대고 기도만 하면 되나요. 어디서 꾸어야지요.’라덥니다. 그래도 계속 믿음으로 기도하는데 딸이 떠나기 전날 어느 여자 미국 선교사님 찾아와서 <어제 본국에서 돈 100원이 부쳐 왔는데 밤중에 잠은 오지 않고 자꾸 홍목사님에게 50원을 갖다 주라는 느낌이 들어서 여기 돈을 가져왔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 너무 구체적으로 응답해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딸을 데리고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중간에 내려서 배를 갈아타는 코스가 있었답니다. >
그런데 그 뱃삯이 6원인 것을 미쳐 계산을 못하고 50원만 달라고 기도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6원을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딸이 또 비웃기를 ‘아버지. 기차 안에서 돈이 나오겠느냐?’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종착역에 다 왔을 때 자기 교인이 그곳에 다니러 왔었는지 차창 밖에서 목사님‘하고 부르더니 ‘이거 얼마 안되지만 가시다가 식사하세요.’라고 돈을 주는 데 보이 6원이더랍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없는 것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는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큰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갈멜산에 올라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이미 큰 빗소리가 들었다는 겁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비를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이미 그 귀에 빗소리를 들으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망설이고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려운가요? 우리의 기도에 가장 큰 장애는 하나님의 뜻인가? 물으면서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시며 기뻐하십니다.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이게 될까? 이 기도가 응답될까?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불신으로 기도하면 안 이루어집니다. 안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위대한 겁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못 할 일은 없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내 마음에 이미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면, 그러면 반드시 그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마가복음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가복음11:24] ‘믿고 기도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자기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 이미 받았다고 여기면서 기도하면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실제 이루어진 것처럼 생생하게 그리면서 기도하면 그대로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소망하고 자기가 기도하고 기대하는 것을 생생하게 그리라는 겁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서 가뭄이 하도 심해서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기도를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기도 하는 내내 “비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도 모여서 똑 같이 기도회를 열었고, 그때도 그들은 “비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회가 끝나갈 때 쯤, 정말 그들이 믿고 구한 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자 사람들은 집으로 들로 가려고 했는데, 다들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우산이나 비옷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우산을 쫙 펴들고 빗속으로 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동네의 일곱 살짜리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 동네에서 제대로 된 믿음을 소유한 것은 그 일곱 살짜리 소녀 하나 뿐이었던 것이죠. 비 오기를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정말 비를 내리실 것을 믿었다면, 그들은 그 믿음대로 비가 올 것에 대해 대비를 해야 했다는 것이죠. 이것이 믿음입니다.
1. 거룩한 꿈 거룩한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소원을 주십니다. 선한 소원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로서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선한 소원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선한 소원을 품게 하십니다.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던 인생, 욕심만 가득해서 살아가고 있던 인생에게 찾아오셔서 선한 소원을 품게 하십니다.
◎ 내 안에 주신 하나님의 선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정과 구역, 그리고 교회 위에 주신 하나님의 선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선한 소원을 우리의 현실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믿음 아름다운 상급>
믿음의 선진으로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은 아벨입니다. (히브리서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형인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됩니다. 어느 날 두 형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가인이 시험에 듭니다. 안색이 변하고, 분해서 몸을 떨며 마침내 아벨을 돌로 쳐 죽입니다. 우리의 의문은 어째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가 하는 겁니다.
전통적으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가인은 양을 바치지 않고, 곡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옳은 것 같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이 때는 피를 바치는 모세의 율법 이전입니다. 가인이 곡물을 곡식으로 드린 것은 자신의 직업이 농부였기 때문이고, 아벨이 양을 바친 것은 아벨의 직업이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두 형제가 드린 제사의 중요한 차이점은 <믿음의 여부>에 있습니다.
1) 아벨은‘양의 첫 새끼를 제물’로 삼았고, 가인은 자신의 첫 소산이 아닙니다. 아벨은 많은 양 중의 한 마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겁니다. 즉 아벨은 정성과 준비된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벨이 양의 고기와 양의 피로 제사를 드려 기뻐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양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받으신 겁니다.
2) 가인은 그냥 자기가 먹던 곡식을 하나님께 드린 겁니다. 아마 가치로 치면 가인의 곡물이 더 비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마음이 없는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열납하시지 않자, 가인의 안색이 변했고 분을 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4:6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가인의 제사가 무성의하므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겁니다. 무엇을, 얼마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예배를 많이 드리고, 헌금도 하고, 찬송도 불렀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정성이 없었다는 겁니다. 진정한 믿음 없는 예배는 종교의식일 뿐입니다. 쇼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예배에 임하는 자세와 얼굴 속에서 그 사람의 신앙을 다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믿음인지 불신인지, 참인지 거짓인지 다 드러납니다. 예배는 속일 수 없는 그 사람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배는 한 주간의 첫 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며 나의 한 주간을 다 바치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내 수입의 첫 열매인 십일조를 바침으로 내 모든 소유를 다 바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시간 이렇게 귀중한 재물을 드리면서 무성의 하게 드린다면 실패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종교의식은 받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예배에 내 존재 전체가 실려야 하나님은 그 예배를 산제사로서 흠향하십니다.
신약에서는 '믿음'이라는 '피스티스'라는 헬라어 입니다. '피스티스' 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인간의 믿음(faith)이라는 의미로 명사로 사용이 됩니다. 그 동사는 '피스튜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피스토스'라는 헬라어 형용사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미쁘심'을 나타내는 경우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경우, 또는 기독교 진리의 미쁘신 상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 신실함이란 온 정성과 변치 않는 신뢰성을 말합니다. ◆
누구의 예배와 기도는 열납 되고 누구의 기도와 예배는 열납 되지 않고 누구의 문제입니까? 나의 믿음의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믿음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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