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1-11  <라합의 믿음>

[4절]에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고 했고 [6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했습니다. ‘이미’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실상 라합은 여리고 왕이 보낸 병사들이 오기 전에 ‘이미’ 두 정탐꾼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두 정탐꾼이 오기 전에 그들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에 대한 라합의 자원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 멀리 보는 자가 불의의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멀리 보는 자가 생명을 구하고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눈앞에 이익만 보는 자는 복이 굴러와도 그것을 잡을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귀한 것인지, 헛된 것인지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현명한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신중하면서도 용기 있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만일 라합의 이런 침착함과 결단이 없었다면 그녀는 자신과 그녀의 가족과 친척을 구원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에 있었을 때 누군가가 이 사실을 여리고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기별을 보내어 그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을 이미 자기 집 지붕 깊숙이 숨긴 후에 여리고 왕이 보낸 병사들에게는

[여호수아 2:4,5]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미치리라

이는 라합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어떻게 라합에게 이런 용기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녀가 여리고 왕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더 두려워할 대상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10,11]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 이와 유사한 경우를 우리는 예레미야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조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쳐들어오는 바벨론 군대를 눈앞에 두고 조국 유다의 승리를 예언하기보다는 그 앞에 순순히 항복할 것을 권했습니다. (렘 25:9-11)

○ 분명 이는 반국가적이요 반민족적인 매국 행위입니다. 자기 조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잠입해 들어온 적의 첩자를 숨겨 주면서 제 나라의 병사를 속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행동을 믿음의 행위로 칭찬합니다.

[히브리서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과 편견에 사로잡혀 불의한 조국의 편에 서는 것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앞설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다면 국가의 번영에 앞서 죄악을 멀리하고, 회개를 위해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모든 출생하는 히브리 남아들을 죽이라고 산파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산파들은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는 산파들이 애굽 왕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출 1:17).

○ [4-5절]에 라합은 여리고 왕이 보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정탐들을 숨겨 주었으면서,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하며 또 이미 나갔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성도가 거짓말하는 것이 용납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거짓말하는 세상 사람들은 늘 말합니다.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선의의 거짓말'을 인정한다면 세상의 불의를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에게 아기 예수의 나신 곳을 알면 돌아와서 알려주기로 하였으나 그들이 아기 예수께 베들레헴에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고 나서 꿈에 나타난 천사의 지시에 따라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간 일이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그 판단 기준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이 없어야 하며,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너를 위한 것,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전쟁에 나가 총을 쏠 수 있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생각지 않은 뜻밖의 곳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율법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품은 서기관이나 장로들, 대제사장 같은 식자층이 있었으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왜요? 그들은 이미 배부른 사람들이라 그렇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고 그 나라의 임재를 소원하며 사십니까? 축복받기를 바라십니까?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수용성, 흡수하는 힘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열고, 마치 마른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빨아들이는 놀라운 수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작했다. 예배 끝났다. 이제는 놀러 가야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감동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배시간 뒤에 다른 약속을 잡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강한 수용성을 가질 때 그 사람과 그 집안 그 나라가 변화되고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 창녀, 세리, 죄인과 같이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깊은 인식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 제가 94년 중국 땅에 갈 때 그랬습니다. 예배 1시간 전에 와서 앉아 기다리고 2~3시간 예배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지났어도 집에 가지 않고, 자리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요? 그들의 마음은 가난했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 로마제국이 음란하고 부패가 만연했을 때 로마를 구원한 사람은 로마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철학자들도, 사회적인 배경이 좋고 부유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를 구원하고 변화시킨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천대받던 사람들, 힘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예수님도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 물론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부자만을 국한해서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물질적 부로 인해 마음이 부유한 사람, 물질적 부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라합은 비록 이방의 창기에 불과하였고 비천하고 윤리적으로나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참 神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이 잠입해 들어왔을 때 그는 마치 간절히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들을 생명을 걸고 보호하는 행동하는 신앙을 보였습니다.

○ 라합과 마찬가지로 여리고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대적들을 죽이고, 요단강까지 건너온 것을 보았고, 과연 저들 중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 사람은 두려움에 떨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무사히 지나기만을 바랬습니다. 반면에 비천한 처지의 라합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행동하는 신앙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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