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도행전 26:24~32 <아그립바를 향한 복음>
아그립바를 향한 복음 [사도행전 26:24~32]
● 24절에 보면 부임하지도 얼마 되지 않은 베스도非斯都는 바울의 변론을 듣던 중 바울을 향해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외칩니다. ○ 바울은 이 재판정을 자신의 석방을 위한 무죄를 주장하는 자리로 사용하지 않고, 고관들을 향한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사용했습니다. ○ 그는 바울을 정말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자기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사실에 대하여 말하자, 그가 학문을 많이 하다 보니 미쳤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한 배경지식도 없었습니다. ○ 왕과 수많은 사람, 고관들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바울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는 것에 그토록 몰두하고 있었고, 자기 이성과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허황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미쳤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베스도의 반응은 오늘날 세상 사람둘이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과 태도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영적 무지로 말미암아 성도들을‘미친자’나 ‘환자’로 취급합니다. ○ 그들은 사람을‘작은 미생물에서 진화하였다.’ 배웠고 사람의 생명을 단지 물질적인 결합체로 보고 있습니다. ○ 처녀가 남자와의 성적 접촉 없이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고 또 ○ 죽은 자가 부활했다. 고 말하는데 어찌 정신이 온전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땅에 속한 자들은 하늘에 속한 일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한 일은 영적으로만 이해되고 깨달아지는 법입니다.
○ 영적으로 무지한 이 시대의 사람들은 무언가 미쳐 살아갑니다. 인터넷, 게임, 음란, 춤, 낚시, 바둑 등등 무언가에 미쳐 있습니다. ○ 거기서 행복을 얻으려 합니다. 이는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세월을 허비한다면 하늘의 상급이 없습니다.
● 진짜로 미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에 미친 사도 바울은 천국을 보았고, 사람들을 병과 외로움에서 구원하였습니다. 부패로 병든 로마를 구원하였습니다. 지금도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모든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 우리가 예수님께 미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위대하고 귀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애가 정결해지고, 위대하게 변하는 것은 많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닙니다. 많은 돈을 갖는다고 절대로 위대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我们却是传钉十字架的基督,在犹太人为绊脚石,在外邦人为愚拙。
但在那蒙召的无论是犹太人,希利尼人,基督总为神的能力,神的智慧.
● 베스도가 뭐라하든지 아그립바 왕은 바울로부터 당돌한 질문을 받습니다.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바울은 유대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는 아그립바를 향해 복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 你想少微一劝,便叫我作基督徒阿。
그의 답변은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니었습니다. 이에 만약 긍정의 발언을 하였다면 먼저 바울을 미쳤다. 말한 베스도 총독의 말을 전면 부인하는 꼴이 되고, 만약 부정의 말을 하게 되면 선지자들을 믿는 유대인들의 반감이 의식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적은 말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고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정치가다운 반응이었습니다.
● 아그립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정도로 관심을 두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이나 합리성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믿음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나,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 말씀을 이성으로 칼질 하면, 살아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야 할 말씀이 죽은 말씀이 되어 버립니다. ○ 살아있는 말씀이 되기 위해 성령의 조명하심은 필수입니다. 성령을 의지해야합니다. 요즈음 TV나 인터넷에 수많은 설교나 성경연구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장이 없는 예배는 자신의 지식적인 만족으로 그칠까? 염려됩니다.
○ 아그립바는 복음을 복음으로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현실적인 <이익 불이익>의 관점에서 받아들였습니다. ‘나를 그리스도이이 되게 하려느냐?’이는 그리스도와 자신, 혹은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긋는 발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경계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결합된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 성도들 가운데는 일정한 한계를 정해 놓고 신앙 생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만큼은 드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직분은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신앙 생활하겠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 (마12:30) 不与我相合的,就是敌我的,不同我收聚的,就是分散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선교와 봉사와 활동에 가담하지 않는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정도가 아닙니다. 반대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원한다면 모든 장벽을 허물고 예수님의 모든 지상 활동의 장이 되는 교회의 봉사와 헌신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 믿음은 예수님을 내 삶의 모든 영역 안에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 있을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주님의 말에 그는 단 한마디의 토도 달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께서 내 삶 깊은 영역까지도 얼마든지 개입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와 사람 사이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는 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같이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인정을 받고,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천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어계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룰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我已经与基督同钉十字架。现在活着的,不再是我,乃是基督在我里面活着。并且我如今在肉身活着,是因信神的儿子而活,他是爱我,为我舍己。
○ 바울은 유태인의 땅에서 가장 호화롭게 살며, 가장 권력이 많고, 존귀한 신분을 가진 왕 앞에서 참으로 당당하고 도전적인 말을 합니다. 그는 지금 죄수의 신분으로 결박되어 있지만 조금도 굽힘이 없고 조금도 수치스러워 하거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왕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왕을 향해 힘 있게 말하였습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 保罗说,无论是少劝,是多劝,我向神所求的,不但你一个人,就是今天一切听我的,都要像我一样,只是不要像我有这些锁链
● 그는 서신서 곳곳에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고전4:16 ; 11:1 ; 빌 3:17). 누가 과연 이렇게 담대하게“나를 본받으라.”말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이 그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겠습니까? 사업에 성공한 재벌이, 박사 학위를 가진 대학 교수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부모들이 대부분은 자기 자녀가 좋은 회사에 취직한 것. 좋은 학교에 입학한 것을 기뻐하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와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소원하면서 그것을 이루시도록 하나님께 원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이 사람들의 변화가 자신의 설득이나, 사람 자신의 自覺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함의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이 이렇게 완고합니다. 절구통에 넣고 절구로 찧어도 벗겨지지 않는 인간의 미련함입니다.
○ 변화는 하나님이 하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는 변화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니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꾸러뜨리니 변화되었습니다. 교활했던 야곱, 탕자 어거스틴도 하나님이 바꾸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우리 하나님으로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마19:26)
● 사도 바울에게 전혀 죄가 없다는 사실은 아그립바와 버니게와 참관인 모두에 의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눈치를 살피야 하는 무능한 로마 권력자에 의해 사도 바울은 이번에도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의 처지에서 본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물론 바울은 상소를 취하함으로 풀려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상소를 취하하거나 혹은 다른 방범으로 놓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고 또한 주님의 약속하신 로마 전도를 이루고자 한 까닭입니다.
○ 하나님의 섭리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성도에게 불행이란 없습니다. 억울함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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