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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1-17 <영을 따르는 자>
로마서 8:1-17 <영을 따르는 자>
‘생명의 성령의 법’ 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통제하고 활동하시는 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죄와 사망의 법’은 ‘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죄의 세력’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은혜를 통해 신자 안에 자리잡은 ‘생명의 영’ 성령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에서 율법이 연약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바를 분명히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성을 지닌 타락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그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연약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결국 정죄만 하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 요즈음은 율법은 있으나 없으나 별로 무가치한 것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 조차도 율법을 필요에 따라서 있어도 없어도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 자기의 욕심과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언제든지 버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내버립니다.
[열왕기상 11:38] 네가 만일 내가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이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 명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자랑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복받은 민족입니다. 율법 없는 자들을 이방인이라 했습니다.
○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안에 있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율법이 없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육신이 연약한 인간들은 율법을 망각하고, 율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못했습니다.
[롬 7:12]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했습니다.
○ 율법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고, 율법은 나와 이웃의 관계를 명한 것입니다. ○ 율법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건전하며, 우리의 삶을 거룩한 자리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 이 율법의 요구를 ‘육신’을 좇아 행하는 타락한 본성을 지닌 사람은 성취하지 못했습니다. ○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 ‘보내사’라는 말은 제공이란 뜻도 있지만 ‘제물이 되어’란 뜻도 됩니다.
○ ‘정하사’라는 말은 ‘선고하다’, ‘정죄하다’ ‘판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심판은 우리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인데, 이 죄값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인간이 받을 죄를 대신 선고받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사 53:4-6).
○ 주님은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개혁 운동을 주도하다가 유대 보수파와의 극도의 갈등과 대립에서 패하여 처형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막 10:45).
● 주님은 우리 인간의 속성들과 동일한 인성을 지니셨습니다. 예수님도 차가운 밤에 따듯한 구둘방에 누우셨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지경을 건너며 여인에게 물을 달라 청하기 보다는 나사렛의 시원한 물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냄 받았다는 말은 주님도 목마름과 허기를 느꼈고,피곤으로 오는 졸음을 경험했으며,창에 찔릴 때 피가 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 그런데도 예수님은 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 “그는 神이시니 십자가상에서 아픔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성령충만한 자는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말함은 지나친 상상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아픔과 배고픔 추위가 나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 주님은 나와 동일한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사망 선고를 받은 나같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가지신 분이었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킬만한 결단도 인내도 부족하니 십자가를 통하여 ① 죄의 삯은 사망임을 보이신 것이고, ② 또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심으로 율법을 넉넉히 지킬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이루는 일, 천국 백성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얻는 ‘율법의 요구’를 육신의 본성을 따르는 자는 100년을 예수 믿어도 예수님을 닮지 못 할 것입니다. 이는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 안에서만 성취 되어지는 것입니다.
[롬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이 무엇입니까? ○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 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고 이는 곧 죄입니다. 죄는 내가 단지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도적질하는 표면적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기독교인도 거짓말할 때도 있고 안식일을 범할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냐 하는 것입니다. ○ 많은 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자신의 유익과 복을 구하며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돈과 명예 안일을 위해서 언제든지 땅에 것을 추구하며 내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 육신의 소욕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육신에 있기를 고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삶의 열망이 온통 육적 관심사에 집중되어,자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될 것입니다. 그 결국은 영원한 사망에 처해지게 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계기로 오신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구속 사역을 신자들 안에서 완성하십니다. 신자의 삶은 ‘영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순종하므로 거룩하게 하며 결국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 바울은 외국에 나가 대대로 살았던 부유한 유대인 아버지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길리기아 다소에 있는 대학에서 헬라문명을 공부했고, 또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이 경영하는 유대인 율법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부유하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당시 세계의 문명과 자기 민족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마음껏 배울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기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그리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고 보니 산헤드린 공회원의 신분과 특권,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지식들, 이 모든 것이 복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고, 죄의 빚을 청산받았으며,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새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그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값없이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빚진 자입니다. 이 모든 빚을 무엇으로 갚아야 하나…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밖에 갚을 길이 없다 했습니다. 그가 빚을 청산하는 유일한 길은 복음을 전하는 길 외에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아직도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4절]에서는 중생(重生)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탄생을 말해주고, [17절]에서는 양자(養子)는 아들로서 누리는 특권과 권리의 상속자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양자됨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됨을 현재의 상태로만 이해하지 않고 장차 성취될 소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 ‘양자로 입양된 자’라는 말은 원래 자녀로 인정되지 않았던 자였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친아들과 조금도 다름 없는 애정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아들과 동일하게 유산으로 물려주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신명기 21:16] 자기의 소유를 그의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 그런데 이 두가지 은혜는(중생과 양자됨) 모두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러한 양자권은 예수를 믿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 양자의 영을 받은 자 천국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참 장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줌을 당하여 하나님에게 미움받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참 장자는 여전히 다른 상속자보다 2배의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원 장자 기력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아들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공평한 대우를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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