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0:1-13  < 지식을 따르는 신앙 >                  2011.3.5

 

사람마다 자신의 재물과 명예, 권력을 쌓아 자기를 자랑하고,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얻고 싶어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을 얻지 못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인정받고 이루어내길 바라고 영광을 구하지만 결국은 부끄러움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 5:14,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로마서 10:2-3] 저희가 하나님에게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로마서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에 어두워졌나니…

 

○ 세상의 주인 되신 하나님은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에 드러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를 높이고 스스로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기도' 하면 유대인. '율법 '하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아!" 책망을 받았습니다.

○ 어느 날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B.C. 520~456)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 어느 쪽이 더 현명합니까?" 공자는 두 제자를 비교한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장은 아무래도 매사에 지나친 편이 있고, 자하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자장이 낫겠군요?" 자공이 다시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과유불급-过犹不及)."

 

어떤 소녀가 피아노를 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피아노를 샀다고 합시다. 그녀가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참 좋습니다.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고, 칠 줄도 모르는 사람이 피아노를 치고 싶은 열정만으로 친다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짜증이 납니다.

[우리는 간혹 교회 안에서 매우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그들은 매우 헌신적이며, 때로는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많은 물질과 시간을 드리고, 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들의 열심이 주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열정이 바른 지식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 열정과 열심이 바르게 배우지 못하고 하는 것일 때는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기도 하고 마침내 사탄의 도구로 쓰임받기도 합니다.

◆ 바울도 열심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지어 먼 도시 「다메섹」까지 가서 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달려갔던 자였습니다. 만일 지식을 소홀히 한다면 자칫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지식을 따르라》 유대인들은 모두 율법의 박사들인데 왜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는 열심과 알지 못하는 열심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 섣부른(冒冒失失) 열심이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북해도에는 해마다 겨울이 되면 몇 천 마리의 큰 오리 떼가 날아와서 월동을 하고 봄이 오면 도래지로 다시 날아갑니다. 어느 겨울 이상기온으로 호수가 꽁꽁 얼어붙었고, 물고기를 잡지 못하게 된 오리를 가엾이 여긴 주민들이 콩 같은 먹이를 열심히 주기 시작했답니다. 어느덧 오리들은 사람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데 재미를 붙여, 봄이 왔는데도 도래지로 돌아갈 생각은 안하고 이제는 번화한 시가지를 뒤뚱거리며 찾아들다가 개나 고양이에게 물려죽기도 하고 자동차에 치어죽기 했습니다. 野性을 잃은 오리가 되었습니다.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10:2]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식이 없는 자가 새로워질 수 없음을 의미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더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을 적용하는 삶입니다.

<현대인 기독교인의 문제는 알기는 잘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도, 고쳐야 할 것도, 그러나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회개하는 삶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에 의해 변화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식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여전히 내가 내 의지로, 세상적인 방식으로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변화되지 않고 하늘로부터 은혜만을 원하면 주어집니까?  신자는

일에 앞서 이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식일까?이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가? 생각하는 좌행참(座行讖)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모든 이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신 허락 없이)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고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인간적인 열심, 인간적인 방식>은 하나님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롬10:6-7]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는 것이요?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되지 않을 일로 自暴自棄 하는 인간의 믿음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 이는 하늘의 심판을 무시하고 하나님 없이 새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 인간의 할 수 있다. 인간의 가능성을 말합니다.

 


 

♠인간이 지혜롭다 총명하다 하지만 세상적인 방식, 인간적인 방식은 하나님과 대적합니다.

 

고전3:18-20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프롬(Erich Fromm 埃里希·弗洛姆)은 「사랑의 기술」을 말했습니다. 인간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원하면서도 실패하게 되는 원인은 바로 기술의 미숙성(未熟性)에 있다. 사랑의 기술에 숙달되지 못한 사랑은 오히려 인간에게 위험할 수 있다.

예》부부일심동체라는 말도 그 진정한 의미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윽박지르고 하나로 만들기 위해 상대방을 길들이려 하는 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이는 서로 다른 존재가 하나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환상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함으로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고 허무는 일입니다. ▷ 누구를 대하든 부드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면모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나와 네>가 <나와 세상>이 관계를 맺는 기본자세입니다. 나를 제외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 자연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진정한 '존중'과 '배려'가 있습니다.  초원의 식물은 한꺼번에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저마다 꽃이 피고 지는 시기가 다르고 그 모양과 색깔도 천차만별입니다. 나와 너의 개성이 우리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고, 우리의 아름다움 속에서 나와 너의 개성이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 배려가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이 참"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듯이 남의 자유도 똑같이 존중해주는 사람. 남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자기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실수를 감싸 안는 사람.

▶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마디로 자기가 중심인 교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인정받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는 일이지만 때로 내가 앞서게 되면 다른 이의 미움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다른 이와 마음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 한 젊은 청년이 모리슨 박사를 찾아와 선교 사업을 돕기 위하여 중국의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이 젊은 청년이 선교회에 가서 요청하니까 그대는 선교사를 도와서 같이 선교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고로 만약 그대가 원한다면 모리슨 박사의 심부름이나 하고 밥이나 짓고 장작이나 패고 물이나 길어다 주고 청소하는 사람이 될 것 같으면 보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청년은 좋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복음 전선에 나가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의 이런 심부름꾼이 된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는 자원해서 중국에 갔습니다. 그가 가서 정말 충성스럽게 일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일했을 때 그는 결국 중국 선교사 중에 가장 뛰어난 선교사가 되었던 몰론 박사가 바로 그분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하나는 자기를 죄인으로 믿는 의인이고, 2)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인으로 믿는 죄인들입니다.

인간의 위대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합니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인간이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비참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위대함입니다.” “자기의 비참을 모르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나 하나님을 모르고 비참을 아는 것은 다 같이 위험한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위대함만을 강조하였지, 인간의 비천함, 인간의 어리석음, 연약함과 한계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1) 이제 하나님의 위대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 우리가 이제 알아야 하는 것은 모든 성취는 사람의 공로에서가 아니라 은총으로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전부이기 위하여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림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셨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를  높여 그의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어떤 목사가 성공적인 목회를 했습니다. 세계적인 큰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노년에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하는 소리를 듣고 실망했습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하였다.

어떤 선교사가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정말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도 외국여행하고 나도 좋은 자동차를 탈 자격이 있지 않아?

내가 능력이 있어서 병자를 일으키고 내가 배운 것이 많아서 위대한 설교자가 된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을 한 뒤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겸손은 자아부정입니다. 겸손은 곧 십자가의 죽음, 곧 자아부정(自我否定)을 말합니다.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 만큼 했으니 이제 나를 인정하고 나는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높이고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대상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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