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4:14-24  < 영과 진리로 예배 >         2011.10.2

이스라엘은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왕조 유다로 나뉘어 있다가 북왕조는 앗수르에 멸망하고 150년 후에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가 됩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지독한 식민지 정책을 써서 민족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잡혼정책입니다. 북왕조의 수도가 있었던 사마리아 지역의 귀족들을 전부 잡아가고 평민들만 남아 놓고 그 부근의 에돔족속과 앗수르 사람들을 이주시켜 혼혈족속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앗수르가 바벨론에 멸망하고 남 유다도 바벨론에 멸망하고 백성들이 70년의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정통 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보다 더 더럽게 여겼습니다.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본래 중동에서는 한낮의 기온이 너무 높기 때문에 정오부터 2시 정도 까지는 밖에 나와 활동하지 못하고 집안에서 쉬면서 오수를 즐깁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들은 아침저녁 선선할 때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우물가에 와서 빨래도 하고, 물도 떠가면서 정담을 나누고 수다를 떱니다. 때는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행 중에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왔습니다. 남들이 다 쉬고 있는 뙤약볕에 우물가로 왔습니다. 이 여인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여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물 좀 달라" 하셨습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엔 두터운 장벽이 있었습니다. 1)뿌리 깊은 민족적, 지역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는 상종도 안 했습니다. 2) 또 남녀 간의 엄격한 신분상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숫자에도 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했고 이 여자는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장 무시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지위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되 한 없이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여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셨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이 순간에 모든 장벽을 허무시고 대화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9,10절 "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천대만 받아 온 누구를 만나든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를 갖습니다.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도와주고자 했는데, 선의의 말도 의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예상이나 한 듯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다음 대화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구하기만 하면 영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여인은 여기에 물길을 두레박도 없는데 어떻게 물을 길어 주겠으며 이 우물을 판 야곱보다 큰 자냐고 비교했습니다.


13,14절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이에 여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인간의 본질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체적인 공급만으로 살수 없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의 영의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야곱의 우물물은 세상이 주는 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야곱의 우물물에서 매일 물을 길러 마시지만 또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겹지만 내일 또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인생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갈증을 채우기 위해 작은 두레박을 의지해서 날마다 물을 깃고 또 길어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녀의 인생은 만족이 없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 여기고 더 많은 것을 찾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끝없는 목마름과 수고만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선물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7: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 오시면 우리 속에서 생수의 근원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샘물을 마시기 전에는 우리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생수를 알기 전에는  우리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최근에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중국전체에 책임을 지고 수고합니다. 때로 전화가 자주 걸려옵니다. 전화로 해명해야 하고 언성이 높아지고 따지고 합니다. 옆에서 듣는 아내가 민감해서 속상해 합니다. 차라리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참고 살아야 합니다. 그의 아들이 토플 성적이 좋았습니다. 서울대 아니면 안 간다. 한동대에 가지 않는다. 재수를 합니다. 이번에 장신대에 가기로 원서를 냈답니다. 아내가 늘 아프다 합니다. 블루베리도 담고… 성령의 위로와 기쁨 인도하심을 발견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이 두가지 악을 행했는데 1) 하나님을 버린 것 2) 그 웅덩이는 아무리 파도 터진 웅덩이 라는 것입니다. 즉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입니다. 갈한 인생을 만족시켜주는 생수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2. 네게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지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 가셔서 인생의 걱정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인생에도 예수님이 도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15,16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인이 우물물을 가지고 목마르지 않게 해 달라고 하는 말에 예수님은 느닷없이 남편을 데려 오라 합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이전에 이야기하던 부분과 연결되지 않아 이상하기만 하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던 그녀의 家庭事(?)를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탓하거나 질책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스스로 내 비추기 부끄러웠던 여자의 마음을 열어주셨고, 깊은 속을 드려다 보게 하신 것입니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은 과거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다섯 남편과 이혼하고 지금은 여섯째 남편과 살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다섯 번 결혼을 한 것을 보면 무척 잘나가던 여인으로서 매력이 있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자기와 어울리고 세상에서 능력 있는 잘 나가는 남자들이 그녀를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1)돈 있는 남편도 있었을 것입니다. 2)쾌락이 남편일 수 있고, 3)지식이나 권력이 남편일수 있고, 4)인정이나 명예가 자신의 남편일수 있습니다. 아랍의 여인들에게 남편은 유일한 희망이고 인생을 결정하는 전체입니다. 여인은 그녀의 인생의 전부로 의지한 그들에게서 진정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목마름, 경제적인 목마름, 날마다의 육체적인 아픔, 무의미한 세상의 목마름 날마다 일상의 무의미한 일을 해결해 보려고 사람들은 물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진정한 남편은 길 진리 생명 되신 주님이십니다.


신장의 한 선교사님은 아버지가 10살에 죽었답니다. 날마다 술 마시고 때리고 소리치고 어머니는 2년 뒤에 암으로 죽었답니다. 눈물이 나오지 않더랍니다. 그러나 슬픔은 천천히 찾아오더랍니다. 그는 뒤 산에 가서 한없이 울었답니다. 그는 술을 안 먹기로 다짐했지만 대학에 친구들을 만나 술을 먹게 되고 누구보다도 술을 잘 먹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애주가, 술통 선배가 늘 성경책을 읽고 주일 교회에 가는 모습에 한번 가보았는데 말씀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걷고, 장님이 눈을 뜨고, 홍해가 갈라지고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손을 들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모습이 놀라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절에 불교를 공부하러가자는 말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3000배를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아무도 부처가 된 사람이 없더랍니다. 목마름 뿐 어느 날 다시 찾은 교회에서 이 본문을 대했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음과 나의 모든 목마름과 짐을 아시며, 주님 앞에 나의 어떠함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무릎 꿇을 때 빛으로 인도해주신다. 영혼의 진정한 남편으로


[요한복음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예배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는 공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옛날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생전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느 주일에 왕과 그의 왕족들이 교회에 도착했는데  그 곳에는 왕실 설교자인 프넬론 대주교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회의 많은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왕은 "모든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왜 오늘 아침에는 아무도 출석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는 폐하께서 오늘 이곳에 오시지 않을 거라고 광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누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지 아니면 단지 폐하께 아첨(做作地)하러 오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 입니까? 아마 그동안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고 왕의 눈도장을 찍으러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왕이 오늘 출석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대부분 교회를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날도 어떤 이들은 교회 출석이 그들의 사업과 사회적인 신분을 향상시키는데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또 어떤 이들은 단지 의무감에서 나갑니다.


[출29:42,43]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거기서 만나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만나 주셨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들고 나오는 시간과 재물을 보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마음가짐이 보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이 결여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찌꺼기 시간, 찌꺼기 헌금, 찌꺼기 사람들을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그렇게 여러분의 삶에 번폐스러운 일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함부로 섬기고 대충 사랑해도 될 분이라고 생각됩니까?

[막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2.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뭘까??

[미가6:6-7]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삼상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 그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 기피증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자존심은 어디 갔습니까? 자기가 살던 성으로 뛰어 들어가서 부끄러움을 느끼지않고 외쳤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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