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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20:1-11 < 여호와의 날 >
계시록20:1-11 여호와의 날 2011.3.13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은 대표적으로 세 가지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입니다.
前千年說은 예수님의 재림이 있고 천년왕국이 있어 천년동안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해석입니다. 후천년설은 이 땅에 천년왕국이 세워지고 나서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는 학설이고 무천년설은 숫자 천년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 이 시대가 천년왕국 시대라고 해석합니다.
1. 전천년설은 계시록19:11-22:5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가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재림하여, <악의 통치자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유황불 못에 던지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모두 죽여 버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악의 원천인 용(마귀 /사단)을 묶어 무저갱에 1000년 간 감금시켜 무력하게 만든다.(20:1∼3)>. 계시록 20:1∼6절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 전에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사단을 묶어 가두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성도들이 그의 통치에 어린양의 혼인잔치(19;9) 참여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계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그리스도의 지상의 천년 왕국 전에 있을 부활은 '첫 부활'(20:5)이고, 이 천년 왕국 끝에 즉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의 시작 전에 있을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다(20:11∼15)
(계20:11-15)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살전 4:14-15)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해석상 문제는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끝날 때까지 살지 못하더라" (20:5)에 비추어 아무래도 어색한 해석입니다. 결론적으로 千年이라는 숫자적 의미가 퇴색되고, 천년왕국을 심중에 두지 않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1. 后千年說은 성도들 즉 지상의 교회를 통하여 진전하는 복음화와 기독교적 문화변혁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어지는 '천년 간의 황금기' 즉 이 땅의 모든 죄악과 고난은 지상천국에 펼쳐지리라는 기대하는 해석을 합니다. 19세기
후천년설의 근본 문제점은 <앞서 본 바와 같이 20장4절은 분명히 순교자들, 20장5절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살아남을 의미 해석> 즉, 이 땅의 고난 받는 지상의 교회로 즉 그리스도인들이 그 통치에 참여로 해석함에 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낙관만을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1.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라는 말이 성경 오로지 계시록20:1∼6절에만 나타난다. 는 것입니다. '무천년설'은 계20:4∼6절을 고난 받는 교회, 죽임당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까지 하나님 나라 완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지상천국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 완성과정의 '천년') 이 세대의 끝에 있을 사단의 세력의 궁극적 척결 때(20:7∼10)까지 그리스도의 통치의 축복과 다른 한편 '묶인'사단의 악과 고난이 병존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 무천년설의 문제는 요한은 19장 20장 곳곳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승리를 거두고 하늘의 보좌에 만유의 주로 앉아 계심을 언급한다. 그리고 지금 온 세상의 사단과 그의 앞잡이들인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벌하시었다고 말합니다. 계20:1∼3절의 천사가 사단을 '잡아', '결박하여', 그 천년의 기간이 끝날 때까지 민족들을 더 이상. 미혹하지 못하도록 무저갱 속으로 '던지고', '열쇠로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는 등 3중 4중으로 감금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완료적인 언어로 그릴 만하다고 볼 수 았는 것인가? 온 세상은 여전히 사단과 그의 앞잡이들인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미혹아래 있으며 성도들은 그들에 의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고 있는 너무나도 절실하고 처절한 상황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 않는가?
계20:1∼6절에서 요한은 "사단의 세력들이 현재 난리를 피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가 그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로 사단을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봉해버렸다'할 정도로 무력화시켰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말4:1-3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草芥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특히 요엘 선지자는
(욜 2: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여호와의 날’은 구약성경에 모두 18회 등장하고 있는데 이 날은 하나님의 직접통치와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악을 행하는 자나 교만한자들을 직접 물리치실 것입니다. 뿌리가 없는 자에게는 해는 두려운 대상입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날에 악인에 대한 심판은 공의의 심판입니다. 모든 악한 자를 징벌하고 의인에 대해서 승리를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이 괴롭히던 이방세력을 단호히 꺾으시고 고난 받던 이스라엘에게는 평화와 기쁨의 날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 되는 날입니다. 진실하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날이요, 이를 위해 핍박과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날이 될 것입니다.
2) 경외하는 자들에게 보상의 날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경외란 “거룩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① 죄인은 판사를 두려워하지만 신자가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함은 경외입니다. 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신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사랑과 짝을 이룬다. 정숙한 남편은 아내가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한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혹시나 자기의 어떤 작은 잘못이 상대방에게 실망을 줄까봐 두려워한다. 경외와 사랑과 존경심을 동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구약의 경건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신10:12)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지 "태도"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경외한다는 말에는 "순종"이라는 행동이 포함됩니다.
슈바이쳐(史懷哲醫師)가 한번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자기보다 두 학년이나 윗반인 학생하고 씨름을 했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가 보기 좋게 넘어뜨리고 이겼어요. 자기보다 나이도 적고 키도 작은 슈바이처한테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고 씨름에 진 그 학생이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나도 너처럼 고기 먹고 살면 얼마든지 너를 이길 수 있어" 울면서 가더라는 거예요. 가난한 가정에서 일 년 내내에 고기 한번 먹을 수 없는 집안에서 자란 아이에게 이긴 겁니다. 슈바이처가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그 아이의 말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가난 자들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작은 사건이 그 평생을 가난하고, 어두운 곳을 향하여 봉사의 삶을 살게 합니다.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탔는데, 노벨상에는 큰 상금이 나오는데, 그 돈을 전부 흑인들을 위한 병원에 사용합니다. 그런데 같은 해에 노벨 문학상을 탄 까뮈 (Albert Camus)는 받은 상금을 가지고 굉장히 큰집과 좋은 차를 삽니다. 그러다가 며칠이 안 되어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맙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하고 좋을 것 같아도 남길 것이 없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사도행전10: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의로운 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의로운 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의로 통치하시는 분이며 성품이 의로우십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사야11:1-5
예수님은 공의로 허리띠를 삼는 분입니다.
이 해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떠오르는데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의로운 해는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부족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이를 살리십니다.
1)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한 겨울 죽은 것 같았던 씨들도 겨울잠을 자던 동물도 다시 생명을 얻어 살게 됩니다. 우리 몸은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우리 몸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고쳐야 될 곳이 많고, 치료받을 곳이 많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치료의 날이 될 것입니다. 아픈 자를 낫게 하시고 힘든 자에게 새 힘을 주시며 막힌 것을 뚫어주고 얽힌 것을 풀어주시며 서로 불화한 곳에 화목의 샘이 넘쳐흐르게 하시며 부족한 곳에 풍족한 것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이런 역사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l 한 자매가 왜 나만 참아야 하고 또 죽으라. 회개하라 하는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창을 열고 빛을 받아야 합니다. 또는 커튼을 닫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주의 사랑이 비취는데 기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커튼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던 것들이 다 쫓겨날 것입니다.
이곳은 죄악의 세상 외양간입니다. 냄새나고 추한 곳입니다. 그럼 예수그리스도의 향취가 나지 아니하는 곳이 외양간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세상은 어둡고 캄캄한 죄악 세상이요 답답한 죄악 세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지금이 말라기 시대와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진리의 빛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외양간과 같습니다.
약5:5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l 쉰들러 리스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후회한다.
希伯来书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우선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며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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