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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6:1-8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사야6:1-8 < 내가 여기 있나이다. > 2011.12.11
[사 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의 선지자로서의 부르심과 위임에 관한 내용입니다. [1절]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제10대 왕 웃시야가 16세에 즉위하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라가 부강하게 되자 교만(驕慢)하여졌습니다. 급기야는 왕의 권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사장 노릇까지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 한 웃시야로 하여금 문둥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그의 장기간의 통치는 유다 사람들에게는 큰 절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연로한 왕에게서, 아무런 변혁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世世代代로 고관들은 온갖 부정부패를 부와 권세를 쥐고 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악은 日常事였습니다.
[사1:13-15]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웃시야 왕의 시대는 絶望과 흑암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젊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웃시야 왕의 죽음은 긴 긴 어둠의 시기를 지나고 이제 새 시대를 향한 갈림길의 때입니다. 앗수르의 세력은 날로 강해져 국가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선지자 이사야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성전에 무릎 꿇은 이사야! 사랑스런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스랍 천사를 보았습니다.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았습니다. 이러한 천사의 모습에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모두 가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었다는 것은 내 자신이 사라지고 하나님만 경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리의 얼굴이 드러나면 안 됩니다. 발을 가리었다 함은 인간의 행위와 의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을 보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ex) 그림책에서 호랑이나 사자 등을 본 아이들은 직접 그것들을 보지 않고도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한 호랑이나 사자를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보고 아는 호랑이나 사자는 종이에 그려진 그림일 뿐 실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신앙이 꼭 이와 같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도 꼭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믿듯이 믿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熱情)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역동적이지 못합니다. 이는 진정한 신앙인의 삶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본 이사야의 첫 번째 반응은 한 없이 연약하고 한없이 보잘 것 없는 존재, 죄악과 탐욕으로 가득한 존재의 발견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하심 앞에 섰을 때, 너무도 더럽고, 죄악 된 자신의 모습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얼마나 [자신의 의]가 보잘 것 없으며 누추하며, 추악한 존재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왕족이었고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흠이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전에 이사야는 백성을 향해 외치며 죄악을 지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짐승보다 못하고, 문둥이 보다 못한, 패역한 종자들이었고 그러한 사람이 드리는 예배는 가증스럽고 형식적 예배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그는 유대민족에 대하여 분노로 가득했습니다. ▶ 인간의 비참함에 좌절했습니다.
○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얻기 위하여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정치는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고 빈부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 인간은 부유한 삶을 위하여 경제상의 부단한 노력을 하지만 탐욕에 젖은 인간은 끝없이 서로 속이고 미워하며 다툽니다. ○ 인간은 땅에 자기 자산처럼 금을 긋고 가지려 하지만 바닷가 모래 위에 그린 그림이 파도에 지워지듯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합니다.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과거와 마찬가지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 사람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갖으려 자연을 바꾸어 편리한 생활을 꿈꾸지만, 이로인한 자연의 보복은 인간은 매년 수천 수백만의 사람을 죽게합니다. ○ 사람은 교육이 우리의 희망이라 말하며 교육으로 사람을 키운다고 하지만 오히려 교육은 사람의 우열을 나누고, 차별을 극대화 합니다. 하나님만이 희망이라 말하지만 형식화된 종교생활은 하나님의 뜻과는 멀리 떨어져 똑 같은 신을 두고 서로를 물어 뜯습니다. ○ 인간은 성장을 말하고, 장미 빛 희망을 꿈꾸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과거보다 더욱 의지할 곳이 없어지고, 인간은 고독으로 외로워 눈물을 흘립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자신을, 주변에 있는 이들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낙원이 아니라 속박이 있고 추함이 늘어나는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 허무와 비참함 속에 죽어가는 인간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사야의 믿음과 신앙은 고결한 신앙입니다. ■
▶ 대부분의 많은 사람의 신앙생활을 보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하고, 무엇인가 의지해 보려고 예수를 믿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뭐 나쁘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모두 약한 존재들이니 전능자의 도움을 구하고 바라는 것이 나쁠 수만은 없습니다. ○ 이런 신앙은 <작은 믿음의 단계>라고 말할 것입니다. 주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주님 앞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도와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이야기 할 때 대중은 떠나갔습니다.
○ <더 낳은 신앙의 단계>는 인간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신앙입니다. 인간의 비참함, 이웃의 아픔을 모르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여전히 교만하고 탐욕스런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풍성한 넘치는 응답이 있다 하여도 감사와 기쁨이 있지 않습니다. )
♥ 사랑의 사도가 되어 봉사하고 헌신한 사람은 돈이 남아돌아서,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것을 우선 이루고 채우고 사랑하겠노라 하는 사람은 영원히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1) 이사야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헌신한 사람입니다. ○ 그러나 그는 좌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문제의식만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 이제 이사야는 거룩한 신의 임재 앞에 마땅히 죽어야 할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 인간과 문제를 보는 시각(視覺)이 달라졌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율법에 온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를 보니 죄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아, 죽었다, 이제 다 망했다, 내가 이렇게 죄가 많으니 이제 죽어야 할 사람은 나로구나! 하며 탄식하며 엎드려진 것입니다.
[사 6:6,7]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잠18:20-21]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 천사가 제단의 핀 숯불을 입에 대는 순간 뜨거운 사랑의 성령, 용서의 영이신 성령의 불을 통하여 새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선포가 있습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과거 그는 자신의 입으로 범죄하며 살아온 원망하던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몰랐고, 하나님의 사랑도 몰랐고, 하나님의 인내하심도 아픔도 몰랐습니다. 1) 이제까지 환경을 보고 2) 나라를 보고 3) 사람을 보면서 슬퍼했고 낙심했고 원망하며 입으로 犯罪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주님 앞에 긍정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자신을 돌아봅시다. 나는 어떠합니까? 교회를 비방하고 이웃을 비방하고 원망하던 말에서 이제는 긍정의 말, 격려의 말, 희망의 말, 믿음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복과 화가 우리의 입술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제단 숯불로 우리 입술이 정결해 져야 합니다.
[사6:8]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의 위대한 헌신의 결단입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런 대답은 그리 쉽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우리들은 ‘하나님, 나는 아닙니다, 나는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써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주님은 매우 기뻐하십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이의 부르심을 받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소중한 일일 것입니다. 한 나라 대통령의 지명으로 직임을 맡는다 해도 굉장한 경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고 세상을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셨으니 우리의 반응이 순종함에 지체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워나메이커는 헌당식에서 그는 어렸을 때 구차한 중에 헌금 대신 벽돌을 한 수레 드린 그는 사업이 크게 성공한 어느 날 100만 달러를 들여서 교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선교비로 헌금하였습니다. 어느 날 선교비가 어떻게 쓰이고 있나 알아보려고 중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있는 아름다운 교회를 보고 감격했습니다. 때마침 한 노인이 소 한 마리와 한 젊은이가 함께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워나메이커는 이상히 생각하여 왜 이렇게 하느냐고 그 뜻을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은 "우리가 저 예배당 건축에 헌금할 돈이 없어 소를 팔아 헌금하고, 한 마리의 소 대신 우리가 멍에를 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워나메이커는 크게 감동을 받아, 그 자리에서 "주님! 나로 하여금 멍에를 메게 하사, 저렇듯 희생적인 헌신의 즐거움을 알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청년을 미국으로 데리고가 신학 공부를 시켰는데, 그가 바로 중국 복음화의 기수 성문삼 목사입니다.
○ 천사가 나사렛 동네 마리아에게 나타나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누가1:38)라고 했습니다. 당시 요셉이 약혼녀였던 마리아에게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하리라는 천사의 예고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요셉은 얼마나 당혹스럽고 실망스러웠을까? 믿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으로 분노를 느끼지는 않았을까? 당시의 율법에는 처녀가 임신하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리아의 고백 이것은 초인적인 믿음과 완전한 신뢰입니다.
○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라.”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권세와 군대를 가진 바로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고집 센 애굽의 노예로 있는 히브리인을 노예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야 한다. 이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맡기시는 소명이 자신의 능력을 턱없이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소명에 이의를 제기하며 뒷걸음치려 합니다. 소명을 받는 사람치고 하느님의 소명 앞에서 두려움과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되리라.” 이 말씀에 모세는 힘을 얻었습니다.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애굽의 강력한 군주를 제압하시려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일을 정하시고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일은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파라오 앞에 나서고 못 나서고는 하느님의 절대적 존재와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에 전적으로 달려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부족한 내가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렘1:5,6,8]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너는 아이라 하지말고 내가 제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어다.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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