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요한복음 4:3-19 <우물가의 여인>
요한복음 4:3-19 <우물가의 여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멀리했지만,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로 이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유대인은 자신들만이 구원의 대상이며 선택된 자로 여겼지만, 주님은 한 번도 이방인은 제외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영혼은 똑같이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동기가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요 3:16) 神爱世人,甚至将他的独生子赐给他们,叫一切信他的,不至灭亡,反得永生。
여기 ‘세상’이라는 말은 이 세계의 모든 사람과 만물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남녀와 노소 빈부 귀천에 차별이 없고, 인종, 민족, 생활 방식, 종교, 관습을 초월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선교의 대상에 대한 일체의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민족에 대한 고정 관념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진리 말씀과 명령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6절]에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행하시는 중에 행로에 피곤하여 수가라 하는 동네의 우물 곁에서 앉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人性)을 가지신 분, 완전한 사람이 되셨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동일하게 가지셨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마라.” 했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기사를 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들어서 알 뿐입니다. 목마른 사람만이 진정한 물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아는 것은 피상적이어서 아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제가 중국에 갔던 1990년대에는 중국인의 생활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주일예배에 참석을 마치고 나올 때면 문 앞에 걸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주머니에 있는 대로 1원 2원을 건네줍니다. 당시에는 환율이 100:1 정도 할 때이니 사실 우리 돈으로 100원, 200원입니다. 자선이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돈이지요. 때로는 10원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놀라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그게 자선이었을까요? 사실 그 돈은 제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돈이었지요. 저는 그들이 지난밤에 어디서 잤는지도, 밥을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자선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여기 '체휼'이라는 말은 주님이 나의 아픔을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기가 아파서 잠을 못 자면 그의 어머니가 함께 잠을 못 자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체휼' 하시는 분이시며 해결해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 사람이 문제의 해결을 받고자 한다면 예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하셨습니다. ● 예수께서는 나에게 도움을 주시려고 기다리시는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은 교만이며, 실패와 낙심만 있을 뿐입니다.
[7절]에 우물 곁에서 쉬시던 예수께서 마침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완고한 유대인들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여 상종조차 하기를 거부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낯설고 거북한 만남입니다. 새로운 만남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고대 근동에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물을 대접하는 것은 미덕이었던 터라 여인이 그 요청을 들어주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민족적 편견이 있어서, 예수의 요청에 즐거이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예비하신 상급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나의 지내온 생활 관습과 나의 편견, 욕심과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세상의 이목(耳目)을 보면서 주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 베드로에게 요구하신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직업이 어부인 그로서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잡는데 전문가인 베드로의 자존심을 생각할 때, 갈릴리 바다에 어부도 아닌 주님의 요청에 순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의 자존심과 상식은 그를 막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순종한 것은 바닷가에서 들은 권위 있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권위 있는 말씀이란 바로 그분이 ‘권위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날 벌어 그날 먹을 것을 제공하는 작은 배 한 척을 내려놓는 일이 베드로에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 단순한 어린아이와 같은 결단력을 가진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하였습니다.
●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경력을 쌓아서 경력을 자랑하며 장인(匠人)이 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나는 법조인으로 40년을 살았다.” “나는 평생 교직에 몸담았다.” “나는 경제를 전공하였으니 경제학자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일생 한 가지 직종에 종사하여 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이 때가 되니, 30년 목수의 삶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베드로도 반평생을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지금은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입니다. 과거에 변호사가 잘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동안 이 나라에 건설 노동자가 잘나갔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내일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변화하는데 나만 변화하지 않으면 쇠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우리의 마음은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빌라델비아교회(非拉铁非教会)의 열린 문이 되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열어 주시는 열린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받으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귀한 일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과 아집은 나를 퇴보하게 합니다. ● 우리는 전천후의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견디고, 비가 와도 견디고, 가뭄도 헤처나갈 수 있는 사람,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제자 나다나엘은 (拿但业)은 빌립이 “모세가 말한 선지자를 만났다.” 말할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부정하였습니다. 그래도 빌립의 와 보라는 말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주님 말씀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이 한 마디에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했습니다. 이적과 기사가 많아야 아들 예수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 사마리아 여인이 [9절]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합니다. 그녀는 평생 야곱의 우물을 자랑하며 생명을 연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여 살았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녀는 영적 무지 가운데 있었습니다. 지금 자기와 말씀하시는 분을 유대의 랍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주님 앞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하며, 그녀는 존귀하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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