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3:19-28 <값없이 의롭다 하심>

누가복음10장 선한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강도. 강도만난 사람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사람입니다.

첫째, 강도들을 보십시오.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강도는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강도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는 자들입니다. 테러주의자, 불의한 사업가, 악한 정치가…

둘째,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누군가 도와주고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불의, 불평등한 세상에 억울한 자가 많습니다. 독재자들에 의해서, 잘못된 우상종교에 의해서, 탐욕적인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강도 만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의 피해에 대해 무관심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사람입니다.

[31절, 32절]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모르는 자를 가르치고, 약한 자를 도와야 할 제사장들과 레위인인 데, 지도자, 지식인, 가진 자,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거룩한 책임(Nnoblésse oblíge :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를 망각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강도만난 사람을 끝까지 돌보아주는 사람입니다. [33절, 34절]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끝까지 사랑을 다했습니다. 국가 민족, 지역과 인종을 구분하지 않은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일 가능성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실제로 위험한 길이고 가끔 강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일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이야기가 주는 영적 의미 ; 율법사가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25~27절).

율법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잘하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율법사는 율법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통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다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웃을 힘을 다해 사랑으로 행한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율법사의 대답이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이요, 이웃 사랑이라는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을 하면서 율법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껏 힘껏 잘하였습니다. 또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다면 실천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도 강도 만난 자에게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를 묻지 말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수 있겠느냐?”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나와 가까운 사람, 내 민족으로 국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 이로써 예수님은 그에게 보이신 것은 너는 네가 알고 지켜온 율법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었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생각하는 사랑은 실제로 하나님의 가르치시는 사랑과 한참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 영생과는 멀다는 말씀이지요.

●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구원을 받겠지요. 그러나 세상에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주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라고,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켰다. 선행을 했다. 말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삶의 기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율법을 모두 지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내가 얼마간의 선행을 하였다고 그리고 율법을 지켰다고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일 뿐입니다. 모든 율법적인 행위는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뿐입니다.

⁋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의 속에 ‘양심’이란 것을 지으셨습니다. 이 양심은 인간에게만 있고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이 양심을 근거로 해서 살아왔습니다. 양심은 이성에 속하는 판단능력으로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양심은 자기나 남의 행위에 대하여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이 있는 데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될 때 일어나는 감정이 양심의 가책입니다. 그런데 양심에 부끄럼 없이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사람이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데도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양심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자신은 착하다. 사람들이 자기 양심의 소리를 신뢰하고 산다 하며, 자기의 옳음을 말하지만 죄에 빠진 인간은 이 양심까지도 죄에 물들어서 자신의 의식에 대하여 항상 옳게 여기는 극히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

 

인간의 양심에 따른 삶도 율법에 따른 삶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 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다른 한 길이 열렸습니다.

[롬3:23-25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

◎ 프랑스 혁명당시 정치는 공포 정치였습니다. 조금만 눈에 나면 숙청하며 죽일 때였습니다. 수많은 사형수를 사형시키는 날이었습니다. 귀족의 아들 로와즈르유도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고 사형장으로 나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나와 있었습니다. 감옥 문이 열리면서 사형 집행관이 나와서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며 단두대에 눕히고 목을 자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드디어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로와즈르유!" 이 때 관중 속에서 "네"라는 대답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단두대위로 한 사람이 뛰어 올라 갔습니다. 사형 집행관은 그를 단두대에 눕혔습니다. 로와즈르유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려고 단두대쪽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사형집행관은 확인도 하지 않고 목을 내리쳤습니다. 로와즈르유가 이상하여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로와즈르유를 사랑하기에 대신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을 위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강도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수고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옷 입는 처방을 하나님이 스스로 가지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화목제물로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속죄제입니다. 제물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원입니다.

⁋ 로마서 본문이 전하는 말씀은 

1) 이 구원에 대한 은혜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2) 온전한 사랑과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이고 영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용서받고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축복의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랑 하고 기뻐해야 할 것은 값없이 얻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그 다음입니다.


● 종교인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모든 선행과 예배에 참석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없는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는 자신의 양심을 믿고 자신의 판단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구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자기 스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의>를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종교인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종교인은 강도 만난 자를 버리고 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내가 가진 일부분만을 드리고 만족하는 자기만족을 구하는 신앙에 불과합니다. 종교인에게 사람에게 온전한 헌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선행 자체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고 능력을 받고 희망과 기쁨을 갖게 하는 삶은 율법적인 삶이 아니고 그 분 안에 거함으로 거저 얻어지는 것입니다.

⁋ 기독교의 신앙은 종교행위가 아닌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 지금의 삼성가의 아버지는 이병철입니다. 50~60년 전부터 그는 돈을 모으기 위하여 온갖 술수와 탐욕스런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그의 가족은 불교인입니다. 그의 자녀들은 늘 재산가지고 다툽니다. 당시에 이병철과 동등하게 돈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홍은주 사모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을 드려 고아원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홍은주 사모는 고아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홍은주 사모는 돈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고아로 여겨지는 불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가문에 목사가 13명이 배출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모든 것을 드려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습니다. 언젠가는 지금까지 내가 재산도 업적도 지위도 주를 위하여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잘하고 봉사를 잘하고 교회 출석을 잘하고, 성경을 잘 안다고 하나님의 사랑과 기쁘심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1) 은혜 가운데 거하며 2)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 3) 하늘의 위로를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입니다.

믿음은 일회성이 아닙니다. 어제 믿은 사람은 오늘도 믿고 내일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