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1-9  <제자의 시험>         2011. 8. 21

청년들이 땅 밟기를 위하여 왔다고 했습니다. 백두산 천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변경을 넘어 북한 땅에 있었습니다. 북한이 열린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이제부터 북한 땅을 여실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돌을 가져오고 어떤 이는 물을 담아 왔습니다. 기독교도가 특정 지역에 들어가 기독교식 기도를 올리고 찬양을 하는 것이 이른바 땅 밟기라고 합니다. 우상숭배ㆍ퇴폐유흥 지역 등에 나쁜 영이 진을 치고 있다고 보고 이를 몰아내기 위해 해당 지역의 땅을 밟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 11:24]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

[창 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 땅 밟기를 주장하고 외치는 이들이 늘 말하는 성경말씀은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돌기 작전입니다. (수6:2-3)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첫째 날, 둘째 날은 물론이고 7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카이로 시내 중심지의 한 피자헛, 한 무리의 한국 젊은이들이 피자를 시켜놓고 열심히 통성으로 방언 기도를 한다. 이 땅의 백성들을 축복하고,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함이었다. 수  천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 도시를 집중적으로 기도하면서 행진했다. 기독학생들이 캠퍼스 곳곳을 돌면서 선포하고 찬양하고 행진한다. "이 캠퍼스를 내게 주소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 땅을 내게 주소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현지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저들의 반감을 사기도 합니다.


[수 6:10]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

주목해야 할 점은 성을 돌면서 긴 침묵이 흘렀고. 긴 침묵 속에 성 돌기를 마치고 마지막 7일 째에야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가 울리자 일제히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그 때에 대적들을 결박하기 위한 '선포'를 해야 합니다. 악한 영들을 대적하는 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목소리의 크고 작음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 땅을 힘 있게 밟느냐 살짝 밟느냐에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혈과 육에 의존되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리쳐야 할 때가 있고 잠잠히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땅 밟기는 내 힘과 내 방식으로 나의 욕심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발해야 하는 때가 있고 잠잠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이 인도가 없는 땅 밟기는 무의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적당한 시기에 앞서서도 안 되고 적당한 시기를 놓쳐서도 안 됩니다.


▶ 모범적인 땅 밟기 하면 느헤미야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리에서 왕을 설득하고 마침내 예루살렘 지역의 총독이 되어 금의환향하게 된다. 느헤미야에게는 비전이 있고, 권력이 있고, 왕이 은총도 입고, 필요한 물품도 공급받을 루트도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느헤미야는 이 모든 일을 도무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깊은 밤중에 그의 종자 2∼3 명을 데리고 성을 돌았다. 샅샅이,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런 뒤에야 예루살렘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를 나누었다.


♠ 성령의 세계는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성령이 임하면 왜 그리 웃는지. 넘어지는지. 몸을 흔드는지 … 예수님은 실로암에서 왜 소경에게 침으로 진흙을 이기어 발라 씻으라고 했는지~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도대체 미신도 아니고 땅 밟기는 왜하냐? 차라리 그런 비용이면 선교지원을 해라 가난한 자를 그 돈으로 도우라 합니다.

백두산에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백두산에 올라 기도하는 것을 원하셨나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그래야 저주의 끈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하는 것인가요? 영적인 일들은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상징적인 행위들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효과가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신비는 매우 유혹적인 것이고 그리고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다 보면 매우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매우 겸손해야 하고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영광중의 그리스도 (17:1-8) 세 가지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1) 첫째는 ☞ 영광 중의그리스도 (17:1~8) 그리스도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처럼 희어진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실망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이 실패의 길이 아니라 승리의 길이며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16장 일어난 커다란 일중의 하나는 베드로의 “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눈으로 목격한 것입니다. 듣던 자기가 생각하던 하나님 머릿속의 하나님은 힘이 없습니다. 이 놀라운 경험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참모습을 깨닫습니다. 욥이 말로만 듣던 하나님은 힘이 없습니다. 얼굴로 뵈어야 합니다.

2) 둘째는 ☞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고 엘리야는 선지자의 표상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예언하였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이신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들은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된 것입니다.

3) 셋째는 ☞ 홀연히 빛난 구름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고 배우고 그대로 하여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은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힘써서 하나님의 일을 해낸 까닭이 아닙니다.

[삼하7: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라는 대로 가면 되고 오라는 대로 오면 됩니다. 재미 없다고 떠나고 힘들다고 포기하면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함은≫ 날마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므로 그의 말을 듣고 보고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라는지 오라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머뭇거릴 때가 있습니다.

1)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물이 넘치는 요단을 건널 때 엘리야는 외투를 벗어 요단물을 쳤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그를 조롱했습니다.

2) 두로와 시돈 지역의 가나안 여인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은 것처럼,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군중을 헤치고 옷자락이라도 잡으려고 헤치고 나오듯 마지막 순간까지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용국이가 이번에 대학에 갈 것인지 어떤지 확실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많이 답답했지만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놀라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홍해가 열리기 전에 하나님은 저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하실지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물이 갈라질 것인지 물이 말라 버릴 것인지 아니면 배를 보내주실 것인지~ )

3) 많은 군중은 실망해서 떠나갈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실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따랐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의 높은 산을 왜 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는 선생의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보아야!  ♣ 문제는 우리가 너무 쉽게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갈급한 자라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참 답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 모세와 엘리야이 증거, 하나님의 음성은 지금까지의 모든 의심과 막연한 믿음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경험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시험은 이것으로 마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함은≫ 단지 축복을 기대하고 얻기 위해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성숙한 믿음의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사용해 보아야 하고 검증해보고 아주 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홍해의 바닷길은 하나님이 열어 주셨으나 40년이 지나 요단강 앞에서 가나안 들어서야 할 때는 요단물을 네 발로 밟고 들어가라 하십니다.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싶은 것은 믿음의 존재가 아니고 믿음을 사용하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예언 사역을 통하여 나의 인생길에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합니다. 어느 길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겠습니까? 수입이 들어오겠습니까? 남편이 올해는 예수를 믿겠습니까? 좋은 결과가 있겠습니까? 언제입니까?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러나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지만 또 믿음으로 취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고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취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안에 치유의 능력이 있고 예언의 은사가 있고 내 안에 분별의 은사가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의심할 때도 많습니다. 능력 있는 믿음은 주님이 언제나 해 주실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산에서 내려 왔을 때 또 다른 시험이 있었습니다.》 넘어야할 관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간질병 들린 어린아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능력 받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용하는 것입니다.


1) 믿음이 없이 광야에 나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에서 죽었습니다. 2) 애굽의 군사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홍해의 바닷물에 들어섰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3) 이탈리아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구해주실 것이다 14층에서 뛰어내렸다가 죽었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 제가 능력이 있어서 손을 얻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 그 믿음을 스스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 없이는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취하십시오.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막 11:23~11: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에서 본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만약 사람들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안다면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 할 것이고 이는 십자가의 길에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비젼이 이루기까지 마땅히 치루어야 할 댓가가 희생이 있습니다. 미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17:9-13)

영광스러운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체험한 후에 감당할 수 있게 되어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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