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5:1-10   < 잃은 양을 찾기까지 >          2011. 9. 18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애타게 찾으시는 사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으심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된 길로 갔었도다.”(53:6) 라고 말씀하였고

[겔 34:11~1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 낼지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너희는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오직 이스라엘 집 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또 가나안 여자에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1)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에 대한 사랑입니다.

99마리를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도록 찾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말합니다. 물 론 99마리 양의 가치는 더 크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목자의 마음은 1마리 잃은 양에 가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자녀를 잃은 경험이 있는 부모들은 자녀를 잃어버렸을 때 얼마나 마음이 참담한  지를 이해할 것입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을 잃고 나서 아버지는 직장을 포기하고 찾아다니다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에 걸리고 아내는 우울증에 걸려 가정이 파괴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당신에게는 건강하고 총명한 자녀가 10 명이나 되니 위로받고 기뻐하세요. 하지만 건강한 10명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까요?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아니한 한 사람 때문에 목자의 마음은 무너집니다. 목회란 그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인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사랑이 중요한 바탕(根底)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길거리에서도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도 잃은 양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도와주나 이 심정이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1마리 잃은 양을 찾아 99마리를 남겨놓고 떠난다면 양들은 더 많이 흩어질 것이다. 하며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 이 본문을 두고 얼마나 손해인가 이익인가를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늘 효율성을 따지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효율이 아니고 상한 목자의 마음과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효율성을 따졌더라면 하나님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값비싼 대가를 치루시면서, 죄 많은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사람의 영혼을 온 천하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시고 온갖 희생을 다 감수하면서까지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길을 잃어버리는 양은 건강하고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양이 아니고 어린양, 병든 양, 말 안 듣는 양입니다. 본래 나라는 존재는 능력, 효율, 공로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나는 한 없이 부족한 존재이지만 나는 하나님에게 한없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고귀한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찾으실 때 얼마나 잘났는가? 얼마나 유용한가? 얼마나 총명한지 어리석은지 논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그대로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이고 기쁨이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2) 여기서 목자는 양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양을 찾으러 나갑니다. 양이란 순하기도 하지만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소나 나귀는 자기 집을 찾아올 줄 아는데 양은 자기 집을 찾아올 줄 모릅니다. 양은 길을 모릅니다. 목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가 양입니다. 늑대에게 잡혀간 것은 아닌지 혹시 웅덩이에 절벽에 떨어진 것은 아닌지?  해가 지고 어두워져도 캄캄한 길을 헤매며 찾는 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 양을 사랑하는 목자는 " 찾아내기까지 찾는다. " (4) 라고 했습니다. 혹시 죽었다면 뼈라도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양은 주인을 잘 만난 것입니다. 주인이 양을 단순한 한 마리 짐승이나, 재산 가치로 보았다면 그렇게 기뻐 잔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목자를 만난 양은 참 복도 많은 양입니다. ○ 드라크마 1개를 잃은 여인은 그 하나를 “찾아내기까지 찾는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잔치를 합니다. 나 혼자 누릴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얼마나 기쁜지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6절) 


목자를 잘못 만난 양의 모습은 어떨까요?  양은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는 배대로 곯고 또한 제대로 보살펴 주지 않으니 몸에 병 또한 많습니다. 갑작스런 늑대의 습격을 받아 한두 마리씩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 목자는 몰라라합니다. 심지어는 제 양이 몇 마리가 있는지 몇 마리가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지냅니다.


▶ 탕자를 보십시오.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합니다. 아직도 살아 계시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내 놓으라는 것은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이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갔습니다. 결국 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자기고집과 이기심 육신의 정욕, 향락으로 영적빈곤에 빠지고 경제적 빈곤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 값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마 이 아들이 재산을 다 잃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자식이 가지고 간 재산을 다 잃을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속아줍니다.


실제로 이북에서 피난 와서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自手成家(白手起家)한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자식 하나가 있는 것이 성장하면서 사업을 하겠다고 떼를 씁니다. 아무리 말려도 안 됩니다. 그래서 사업 자금을 만들어주어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업이 어려워져서 하나있는 빌딩까지 팔아치웠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 자식 사업하는 거 망할 줄 몰랐습니까?"  "알았지요."  "아는데 왜 사업 자금을 만들어 주시고 빌딩까지 팔도록 허락했습니까?"  "줘야지요.  안주면 원수가 되는 걸요. 망할 것 알면서도 망해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 그 자식은 내 아들이 되어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얻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더라도 자식은 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를 떠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던 아들이 돈을 다 써버렸을 때 남은 것은 고독과 흉년으로 인한 궁핍과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절한 외로움뿐이었습니다.


저는 본문을 보면서 늘 이해하기 어려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1-10절 잃은 양의 비유에서 그리고 잃은 동전의 비유에서 목자와 여인은 찾도록 찾았다고 했는데 탕자의 비유에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 긴긴 시간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찾지 않았는가? 돌아오라고 한마디 말할 수 없었을까?  왜 아무것도 안하셨나?  아들은 돼지 먹는 음식을 먹으며  실패와 좌절의 기간 동안 왜 아버지는 좀 더 그를 도와주지도 찾아주지도 않았을까?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17절을 보고 깨달았습니다"이에 스스로 돌이켜" 그제야 그는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말합니다. 참 냉정한 아버지, 무정한 아버지처럼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집 나간 자식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애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네 어귀에서 거지같은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아들이 돌아올 때 변해버린 모습이었지만  아버지는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때 맨 발로 뛰어나가 맞습니다. 아들이 돌아와서 잘못을 고백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그 시간부터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자에 어버이 친(親)자를 아십니까? 나무 목(木) 변에 설립(立)자를 위에 붙이고 볼 견(見)자를 붙이면 어버이 친(親)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우뚝 서서 자식이 어디에 있나, 자식이 무엇을 하나 찾아보기 위하여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바로 어버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기까지는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본문을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 나간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중심내용은 아들을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네 꼴을 아느냐? 네 잘못을 아느냐? 아버지는 그의 상한 마음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요? 아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측은히' (20)은  체휼을 말합니다. 함께 고통을 느꼈다. 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파할 때에 아버지는 더 아파했습니다. 내가 힘들어 할 때에 내 아버지는 더 힘들어합니다. 내 약점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는 것보다 아버지는 더 괴로워했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허물이 나의 허물이고, 자식의 실수가 나의 실수입니다.

누구는“그것은 그 놈의 실수이고, 그러했으니 당연히 받는 고초야" 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법을 말하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름을 따집니다. 맏아들이 그랬습니다. 법을 따지는 사람들이 그러고 재물의 손실을 계산하고 책임의 소재를 말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연탄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하며 고생을 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부대를 어깨에 걸머지고 쇳조각, 유리병을 줍고, 신문지나 모아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어린 나는 마냥 창피하게만 여겨졌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돈을 조금 모아 식당을 차렸지요. 그런데 실패하고 맙니다. 어머니와 우유배달을 하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로 부상당해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습니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물이 뚝뚝 떨어지며 공부를 방해하는 겁니다. 짜증스러웠습니다. 물방울을 아무리 받아도 더 이상 양동이로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화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아프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이 골목 저 골목을 찾다가 돌아오는데 지붕 위에 시커먼 물체를 발견합니다. 비를 흠뻑 맞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한 겁니다. 그 아버지를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눈물을 짓습니다.


인생에는 진행 효과라는 것이 있다.

작은 변화는 더 큰 변화를 이끕니다. 성장은 더 큰 성장을 이끈다. 변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천천히, 그렇게 꾸준히 인생이 바뀌어 지고 세상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래에 더 큰 물결을 창조하게 된다.

세상은 늘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죠. 먼지 쌓인 세상은 변함없이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큰 변화의 원동력은 아주 작은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역사는 작은 아주 작은 것에 대한 사랑과 관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킴볼은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는‘무디’라는 아이가 교회에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 무디가 일하고 있는 구두 방으로 찾아갔습니다.

무디는 생활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기 힘들었고, 어려서부터 구두 수선으로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무디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킴볼은 그를 기억하고 그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와 주었습니다. 킴볼은 무디의 손을 붙잡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무디는 다시 교회를 찾았고, 훗날 목사가 되어 미국을 변화시킨 대 부흥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한 소년에 대한 교사의 작은 관심이 소년을 위대한 종교 지도자로 성장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주님의 제자라면 돌아오는 영혼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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