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33-37 <헛 맹세를 하지말라>   2011. 8. 14


한 손님이 찾아와 함께 홍콩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중국말도 할 줄 몰랐으므로 도와서 약속시간을 잡았습니다. 내가 가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에 그는 다른 일이 있다고 내가 힘써 약속시간을 잡아 주었건만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나만 바보가 되었고 실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출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신 23:21-23]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 함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난을 친다든지 믿음이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소홀히 말하는 경우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히지 않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쉽게 하고 쉽게 저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약속이 깨어진 사회, 불신의 사회입니다. 부부 간에, 동료 간에, 상사와 부하 간에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노동자 농민 기업가가 눈속임으로 생산하고 상인이 시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상한 물건을 팝니다. 검사기관이 정치가가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합니다. 言論이 거짓말을 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 대통령이 거짓말을 합니다.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말은 진실해야 하며 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딤후 3: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교인들 가운데 금전거래가 있고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시험을 받아 교회에서 멀어집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건강한 사회, 신용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마 5:33-37]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여기서 생각할 것은,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은 구약의 율법도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맹서를 금지시키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 역시 맹세하면서 자기의 진실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고후 1: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 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맹세가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 강조하기 위해 쓰인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지만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을 나타내고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 맹세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옛 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1) ‘헛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며 더 나아가  

2) ‘일단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 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앞에서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지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은 하나님의 신뢰와 사랑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은 건강한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어 하나님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의 새로운 견해로는 사람들의 말이 너무 허황되고 거짓말을 많이 하니 차라리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거짓말에 너무 지쳤다는 것입니다. 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창하게 맹세하며 말하지만 실재 행동은 자기 기쁜 대로 자신의 편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맹세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맹세란 상대에게 자기 말의 진실성을 믿도록 하기 위해 다른 믿을만한 근거를 내거는 행위이다.

예루살렘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즉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으로 맹세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의 장로로서 자신의 말의 진실함을 맹세합니다.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장로의 직위를 걸고 말할 때 장로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교인의 이름을 걸고 이야기 할 때 결국 더럽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교인이 사람 앞에서 말하지만 결국 모든 헛맹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진실한 말이 아닌 모든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정치가들은 때때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을 합니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고 이중적 의미의 말, 어떤 부분은 말하면서 어떤 부분은 감추어 상대로 하여금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없도록 말 합니다. 이것도 다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단순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예'할 때 '예'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요'하라. 여기서 빗나가는 것이나 그 이상의 말은 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옳음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옳다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서로 간에 불신이 쌓이게 됩니다. 자신의 편리에 따라 말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고후 1:17-18]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참으로 진실한 사람들에게는 사실 맹세는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말의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맹세하지 않더라도 그의 말의 진실함은 세월이 지난 후 결과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1) 힘 주어서 하는 말, 2) 많은 말, 3) 많은 이유와 변명과 설명과 설득이 다 소용이 없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말과 행위가 일치되는 진실한 사람의 말은  권위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백부장 고낼료의 온 가족이 백부장을 따라 순종하고 함께 믿은 것은 백부장이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진실한 삶의 산 까닭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십자가 외에 화려하고 달콤한 수식어를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잠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사실 진실하고 진실하지 않고를 떠나서 많은 말 자체도 문제가 된다. 말을 너무 많이 할 때 우리는 거의 틀림없이 어려움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많은 말은 실수를 가져오고 많은 말은 죄 많은 인간의 내면에 악함만을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이 다만 진실만 말하는 이 원칙에서 벗어났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사탄에 올무에 걸린 것이 아닌지 의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치 못한 말을 할 때 가만히 살펴보면 그 배경에는 사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들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사탄에게서 난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37절)에서 주님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에서 지나치는 말은 곧 악한 자(마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헛 맹세하지 말라. 신앙의 위기는 헛 맹세를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 신뢰를 저버리는 데 있습니다. 맹세를 하고 지키지 않음으로 진실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100번 이렇게 하겠습니다. 말하고 100번 다 잊어버립니다. 진실성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허망한 세대입니다. 요즘은 참 무심한 세대입니다. 약속을 저버립니다. 말하는 것을 보면 다 알고 지혜롭고 정확한데 하는 것을 보면 진실성이 없습니다.

교회생활 35년입니다. 전도를 할 때는 꼭 나온다고 이번 주에는 꼭 온다 말합니다. 한참 기대하고 찾아갑니다. 아침에 찾아갑니다. 전화합니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가기로 함께 약속하고 다 준비해 놓고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락오기를 다른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도 없이 전화도 없이 나오지 않습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행위와 결실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합니다.

입다는 자신의 독생녀를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립니다.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인 땅에 들어가서 실수로 기브온 사람들과 약속하였습니다. 너희를 해치지 않겠다. 그들이 가까이 사는 족속인 것을 알고 후회하였습니다. 사울이 그들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한 말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시 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정직하고 공의롭고 진실한 자만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부를 아시며 전부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그분의 거룩한 눈을 피해 숨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다른 무엇도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한 번 정하면 반드시 지키는 해로울지라도 지키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은 다른 것을 더 주실 수 있습니다. 한 번 약속하면 지키는 사람에게 더 큰 문을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 채근담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이 진실되면

곧 서리도 내릴 수 있고

성벽도 무너뜨릴 수 있으며 쇠와 돌도 뚫을 수 있다.

그러나 거짓되고 망녕된 사람은

형체만 헛되이 갖추었을 뿐,

진정한 주인은 이미 망해 버렸으므로

남을 대하면 면목이 가증스럽고,

혼자 있으면 형체와 그림자가 스스로 부끄러울지니라.


[히 10:22,23]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 '참 마음과’과‘온전한 믿음으로’나아가야 합니다. ‘참 마음’이라는 말은‘정직하게’라는 뜻입니다. ‘중심에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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