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5-11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2014. 7. 13

 

○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 지금까지 숨어 있다가 자신을 만인 앞에 공개하고 나타나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자기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지금 자신의 행동이 앞날에 상당한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이 모두를 각오하고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자신을 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창조주로 하나님과 동등 됨의 위격을 가진 분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작은 동네, 마구간에 말구유에, 인간의 옷을 입고 태어 나셨고, 나사렛의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으셨습니다.

○ 사람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나지 않으셨고, 갈릴리 나사렛 산골짜기에서 자라나셨기에 주님을 따를 수 없었고. 사람들은 그가 많은 학벌을 갖지 않으셨고, 많은 재산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습니다.

○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선생으로서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목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시어 그가 차린 잔치자리에 참여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자신의 지위를 말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입장을 말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체면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베푸셨지만 자신을 위하여서는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솔직히 제 친구 가운데 국회의원 장관이 있고 많은 의사 박사가 있다면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유혹했지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산상에서 베드로가 칼을 빼었을 때 [마태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하시며 말리셨습니다. ○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을 피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 아님을 아셨기에 고난의 잔을 받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제자 되는 길은 자신을 비우는 일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만족을 구하고, 안일을 구하던 ‘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그 섬김과 순종은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비운다.’ 함은 ‘내 안에 있는 자아’를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의 체면이나 자존심 그리고 주장까지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작은 예수,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중에 루터와 쯔잉글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한 나라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는 신념은 똑같이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모여서 의논만 하면 의견이 합해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모이기만 하면 싸움만 하다가 헤어집니다. 헤어지고 보면 또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또 만나면 역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자기만 잘났다 하고 절대로 양보가 없었습니다. 쯔잉글리가 어느 날 도무지 한 번도 의견일치가 되질 않으니까 스위스 깊은 산중으로 머리를 식히러 가게 되었습니다. 파도치듯 흐르는 계곡의 골짜기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외나무다리를 발견했는데, 외나무다리 양쪽에서 염소가 한 마리씩 건너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가운데서 만납니다. 쯔윙글리는 염소들끼리 서로 뿔을 받으면서 외나무다리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염소들이 마주 하더니 염소 중 한 마리가 통나무 위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다른 염소가 너 죽으라고 힘껏 밟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처가 나지 않을까 하여 가만히, 살짝 밟고 가더랍니다. 그 염소가 건너가고 난 후에 엎드려 있던 염소가 자기의 갈 길을 가더라는 것입니다. 염소들의 양보, 무릎 꿇는 겸손에서 이에 쯔잉글리는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신을 부정한다 함은 탐욕도 정욕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죽은 자와 같습니다. 이미 죽은 자는 더 이상 잃어버릴 것도, 주장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없는, 하잘 것 없는, 하나님 앞에 가장 작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 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옛날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갈 때 1년 간 ‘나’라는 단어를 쓸 수 없는 규율이 있었다. 합니다.

5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슈바이처가 이웃집 아이와 싸워 이겼는데, 싸움에 진 아이가 “너는 부잣집에서 고기를 먹고 사니까 힘이 세지만, 나는 가난해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못내 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슈바이처는 자신이 다른 아이보다 유복한 생활을 한다는 것에 부끄러웠습니다.’ 그 후로 슈바이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난한 친구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허름한 옷과 신발을 신었다 합니다. 슈바이처는 지위와 명예를 버리고 병으로 죽어 가는 흑인을 구하기 위해 질병이 들끓는 아프리카 원시림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정글 속에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나는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고, 나는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면서, 나의 가진 것 중에서 작은 한 부분을 떼어서 남을 돕는다 함은 진정한 사랑도 자선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위로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속상하고 함께 즐겁고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선을 행하고 섬기는 순간에도 실제로는 남을 섬기는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만족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섬김 받는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 지금 나는 다른 사람에게 섬김 받기를 원하고 섬김을 받기를 추구하고, 섬김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이 높아지고 부유해지고, 더 배우면, 더 잘 어려운 이를 섬기며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살만해 졌다 할 때 사람은 더 높아지려 하고, 더 섬김을 받으려 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는 그 어느 누구를 섬기며 살수 없는 일입니다. 섬기려면 먼저 기득권과 안일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할 때 이 마음은 곧 무슨 마음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평가하여 ① "저 사람은 참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야,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우리는 누군가가 남에게 조금 다정하게 하면 ② "아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야" 라고 말합니다. 그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뒤로는 호박씨를 까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착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다.’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 하나님 앞에 낮추는 사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사람이 자선을 행하든, 착한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령 술을 끊는 사람에게 "왜 술을 끊었는가?"라고 물었더니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해서 끊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이것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에 끊었습니다."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왜 찬양하는가? 왜 공부하는가?" 죽을 때에도 "왜 죽는가?" 묻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죽는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왜 사는가? 묻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때문에, 변화된 사람을 가리켜서 새사람이라고 말합니다. ○ 우리의 행함에 대한 평가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사람을 보고 사는지, 사람을 위하여 사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마음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영광된 삶과 행복한 삶을 주시를 원하십니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