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38-44 <돌을 옮겨라>   2011.4.27

 

나사로 이외에도 이미 다른 복음서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딸(5:22-43)과 나인 성에서 한 과부의 아들(7:11-17)을 살리신 것입니다.

위 두 사건은 방금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이지만 나사로의 죽음에서 살아난 것은 이미 죽어 부패한,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그런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의 자신의 부활을 제하고 기적 가운데 최고의 기적입니다. 이 이적을 통하여 주님은 자신의 부활의 그 증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알리신 중요한 복음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2)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이 땅의 왕국을 바라고 이 땅에서의 풍요를 바라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한 가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리라"

[22:67-69]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십자가상에서 한 쪽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극복하는 희망의 종교, 생명의 종교, 부활의 종교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아무도 오늘의 십자가를 질수 없고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루는 누군가가 요단강 건너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알려 줍니다. 얼마나 나사로와 친하였던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했던가? 제자들의 마음도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두 자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병들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가 되던 오빠였는데, 자신들만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앞이 캄캄했을까요? 몇 날 몇 칠을 얼마나 애타게 주님을 기다렸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야속한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병들었다" 말할 때 가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며 죽기 전에 가보자고 말합니다. 아마 예수님도 죽음이 두려워 감히 유대로 가자고 말하지 못하시는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11:8,9] 선생님, 방금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낮이 열두시라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한낮은 한참 일할 때입니다. 이 시간은 건강하고, 기회가 있고, 능력이 있는 때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부르시고 나와 함께 일하는 시간입니다. ○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만간 밤이 올 터인데 인생의 밤은 기회가 사라지고 없는 때, 병약할 때,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 때, 나에 도움이 없는 때, 불신의 때입니다. 누구에게나 낮 시간이 주어지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 오리니 그 때에는 아무도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유대를 향하여 갈 때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전도서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그 때는 내가 원하는 때도 아니고 내가 정한 때도 아닙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고통으로 부르짖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셨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자손의 탄식소리가 하늘에 이르고 가나안 땅에서는 아모리 족속의 죄가 극에 달한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에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법도 없고, 일찍 오시는 법도 없이 언제나 정확하십니다.

(1) 그 때는 만사가 성숙한 때이고

(2) 나의 간절한 기도 속에서 내가 주님의 성소에 들어간 때이고,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주님 앞에 드려졌을 때이고, 이 때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 구원의 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마음대로 설정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저에게 하나님이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한번은 저에게 특별한 은사를 예비하셨다는 감동이 왔습니다. 너무도 감격스럽고 또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다 기도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울어도 못합니다. 힘써도 못합니다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하나님 앞에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를 자랑할 것도 아니요. 이적과 기적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다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뜻에 맞고 하나님의 기쁘심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맡기워진 일에 충성할 따름입니다. 

[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위로부터 주어진 약속의 땅, 기회를 받은 사람은 축복된 사람입니다. 이 주어진 축복의 기회를 반드시 차지해야 합니다당신에게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약속은 무엇입니까당신이 지금 하나님 안에 가지고 있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 당신은 제일 먼저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마태복음5]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복이 있구나! 너희 마음이 가난한 자들아! 하는 말씀입니다. 왜 복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이미 나왔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이 계신 곳 예수님을 만난 자리에는 기쁨이 있고 기적이 있고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마다 인생의 문제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1)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2)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3) 여리고 성문 앞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예수님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은 큰 축복의 기회입니다. 나와 당신이 서있는 자리 앉아있는 자리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 이틀이 지나서 말씀하십니다유대로 가자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을 통하여 죽을 인생의 소생을 보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11,12]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 사람은 환경과 여건을 보면서 일을 가늠합니다즉 사람의 관점은 눈에 보이고이해가되고가능성이 있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을 말합니다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을 보고그리고 환경을 보면서 아쉬움과 낙망 실패 속에서 살아갑니다○ 한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 늙음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였습니다주님의 마르다의 그런 패배자의 믿음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요한복음 11:23-27] 23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7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 소망이 없는 자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음이 없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인 힘 되신 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녀는 먼 훗날의 구원, 주님 오시는 날에 이루어질 장래의 천국만을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날마다의 승리와 기쁨을 몰랐습니다. 부활, 생명, 희망은 우리의 날마다의 일이 되야 합니다. 오늘의 부활이 없는 사람이 내일의 부활을 믿는다함은 어불성설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미래의 부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산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지금 이후로 죽음과 절망 패배가 없음을 말합니다.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들은 함께 무덤으로 나아갔습니다. 슬픈 장면입니다. 살아서 나사로를 알던 모든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친척과 이웃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누이들도 그들과 함께 비통한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인간은 짧은 인생 속에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더 의미 있게 보내려 하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아파하고 두려워합니다.

예수께서도 눈물을 흘리시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비통함과 절망의 눈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사로가 잔다고 말하셨고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 앞에서 이별의 앞에선 인간의 절망과 희망이 없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에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은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심히 마음 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아픔을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희망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풍성함과 자비 은혜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 돌을 옮겨 놓으라. 이 일은 무의미해 보이고, 황당한 지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시작입니다.  

마르다는 무덤에 돌을 옮기라는 말씀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부패하여 냄새나는 시신이 있고 마른 뼈가 가득한 무덤인데 왜 무덤을 열라 하시는지~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의 부르심을 받아 가는 길이 愚公移山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기를 바라고 의미있는 일을 원합니다. 왜 주님은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하인들에게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는지 ~ 이런 일이 믿음의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자주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 불화가 일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다투었습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는 내 놓으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을 숨기고 나는 죄인이 아닌 냥,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의인인 냥,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 냥, 모든 사람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기를 바라고,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고, 모든 사람 앞에서 문화인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 찬 나, 바리새인과 같은 나의 모습, 희망도 기쁨도 없는 어둠과 무지 가운데 거하는 나의 돌문을 열어야 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중풍병자고 내가 문둥병자고 내가 무지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선 자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11:43)

죽었던 나사로가 걸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치 우리의 암울한 무덤같은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돌을 옮기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은 내일만의 사건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삶 속에서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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