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1:1-17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2013. 6. 23

많은 사람들이 요나 이야기를 들으면 못 믿겠다.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정말로 사람을 삼킬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그런 고래가 있답니다. 스펌 고래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1892년, 2월 포클랜드 근해에 포경선 하나가 고래를 잡기 위해서 출항을 했습니다. 배 이름은 동방의 별이었습니다. 대양으로 나가서 한참 있다가 스펌 고래 하나를 발견했고, 고래가 출몰하자 배에서 보트 두 대가 내려졌고, 각 보트에는 창 사수들이 타고 있었답니다. 첫 번 보트에서 쏜 창이 고래를 명중시켰습니다. 고래가 상처를 입자마자 막 뒤틀면서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두 번째 보트가 그만 뒤집혀서 거기에 탔던 버틀러라는 청년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몇 시간의 사투 끝에 고래는 쭉 뻗었습니다. 그 고래를 끌어다가 육지에 올려놓고 하루 종일 껍질을 벗기고, 그 다음에 배를 쪼개고 위를 갈라서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전부 끌어내다가 보니 버틀러라는 청년이 그 속에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의식은 없었지만 숨은 쉬고 있었고, 급히 병원에 싣고 가 치료를 해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그 포경선을 타고 또 고래잡이를 나갔다고 합니다. 

○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요나서가 역사일 수도 있고, 문학일 수도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하시는 내용에 있습니다.

[요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입니다. 앗수르는 잔인하기로 유명한 나라이고, 이스라엘의 철천지 의 나라 앗수르, 그런 나라는 하루 빨리 망해야 이스라엘이 편합니다. 어떻게 그런 생면부지의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니느웨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 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요나서의 전하려는 메시지는 하느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 백성 유대인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온 세상을 향한 구원의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구약이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요나”(Jonah)란 이름의 뜻은 바로‘비둘기’(dove), ‘무감각하다, 분별이 없다’(senseless)입니다. 무감각하고 분별력이 없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진리로 밝히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진실하시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못난 요나 같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요나서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어째든 요나는 하나님의 생각이 자신과 다르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합니다. 그는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니느웨는 지금의 이라크 북부에 위치합니다.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 남부 지브롤터 해안에 위치합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했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란 문구가 3절에 두 번 나옵니다. 요나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리 없습니다. √요나는 될 수 있는 데로 니느웨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시는 사역을 회피하는 변명이 된다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다’고 합니다. 순풍에 돗 단 듯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갔을 것입니다. 요나의 [욘4:2] 고백처럼‘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악독한 니느웨를 용서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 이해받고 면제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적절한 시기에 요나를 깨우치십니다.

[요나 1:4,5]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시기에 자녀의 불순종을 징계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환란이 공동체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농부가 키질을 할 때 알곡과 쭉정이를 함께 흔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알곡에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출애굽 할 때 애굽에 전역에 10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왜 애굽에 7년의 풍년과 7년의 풍년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알곡입니다. 왜 남북이 분단 되어있고 왜 우리는 핵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기독교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우리의 선배들이 산마다 삼각산이다, 청계산이다. 기도 소리가 끝이지 않으므로 전쟁의 위협에서 구해주시고, 열방에 선교하라고 경제의 부흥을 가져다주신 것 아닌가요? ○ 기독교 인구25%를 말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 부동산 거품이 있고 전세난이 있습니까? ○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던 소돔 고모라처럼 될까 두렵습니다.

 사공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던졌습니다(5절). 그러나 요나는 그 와중에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사람들이야 배를 젓느라 지쳐서 죽든, 깔려 죽든, 빠져 죽든 나와 무슨 관계인가? 요나는 배 밑창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잊고 싶다. 주변의 어떠함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3)내려갔더니, 5)내려가서 2,6)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때문에 깊이 잠을 자고 있는 요나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는 분들은 혹시 없으십니까?

 모태귀소본능 증상 즉 요나콤플렉스[Jonah complex]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보통은 소년기 이하 미성년자들에게 잘 나타나는 것으로 과도하게 폐쇄적인 성격을 보이거나 유아기의 습관으로 퇴행적인 증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어머니 뱃속 시절을 그리워해 현실에 적응을 못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공간에 감싸이듯이 숨어 있을 때에 안온함과 안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요나콤플렉스입니다. 

요나의 이런 불순종에 대하여 하나님의 음성이 배 선장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들려집니다.

[요나 1: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거의 망하게 되었습니다. 불신자인 선장이 선지자인 요나를 흔들어 깨우더니 뭐라고 말합니까?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완전히 거꾸로 된 겁니다. 기도해 줘야 할 선지자가 불신자로부터 기도하라는 충고를 듣다니! 큰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지자가 선장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빨리 일어나세요!!!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좀 깨워주셔야 합니다. 같이 기도하자고 하셔야 합니다.

선장은 이전에 이런 폭풍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분명 자신들 가운데 신의 노여움을 산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장은 잠자는 요나를 깨워서 모든 사람들을 모아 놓고 누구 때문에 이러한 예기치 못한 폭풍이 있는지를 제비뽑자고 합니다. 그래서 뽑으니까 ‘요나’가 뽑혔습니다. 요나는 마침내 정직하게 자신은 아니라고 하지 않고 죄를 털어 놓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지목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욘 1:9,10]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하니라.

자신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합니다. 지금껏 하나님이 말씀하신 반대로 가고 있었는데 지금 자기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세상 사람보다도 낫지 못했습니다.

[욘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요즈음 사람마다 ‘내 책임이 아니다. 세상이 흐려지고 불의에 물든 것이 다 네 탓이다.’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사람들입니다. 나 때문이라고 하면 기분 좋을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시간에 요나는 정직했습니다.


◎ 옛날 중국에 한 사기꾼이 속임수로 황제의 궁중악단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연주 때마다 피리를 입에 대고 부는 척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온갖 호사는 다 누렸습니다. 어느 날 황제는 연주자들에게 돌아가면서 독주 할 것을 청했습니다. 사기꾼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이제 와서 피리를 배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독주회가 있던 날,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가룟 유다도 총독 빌라도 역시 그들은 자신의 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자결한 사람들입니다.


▶ 그러나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이는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인생의 바다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로 인하여 저들의 목숨을 빼앗지 마십시오.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멈추도록 하기 위하여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제물로 내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가 져야할 모독과 아픔을 지심으로 우리가 산 것과 같습니다. 온전한 제사는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자존심도 √나의 재물에 손해가 있을지라도, √불명예와 아픔이 있더라도 모든 것을 드리는 것 이것이 헌신입니다. 그래야 인생의 풍랑이 끝납니다. 모든 수평적 인간관계의 문제는 내 자신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만 바로 정립된다면 해결될 간단한 문제입니다. 마음 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겐 그보다 더 많이 추구하고 행해야 할 사명들이 많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진다면 훨씬 더 많은 가치 있는 일들이 주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억울하고 비참한 홀대를 받으셨지만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을 나타내시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시대를 향한 책임을 지우십니니다. 영혼구원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요나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너 자신의 안일에 머무르지 말라. 만민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입니다.


◇ 지난 목요일에는 이주민 선교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베트남, 태국, 미얀마 등등의 이주민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이웃 이주민들에게는 무정하며 그들의 삶의 모습에 눈을 돌리고 외면하려 하는 것이 우리 아닌지? 요나도 이런 구차한 일이 싫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의 선교로 부르십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요나와 같은 소명이 주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신학교에 가고 내가 목사 전도사가 되어야 소명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 성도, 증인, 예수의 제자'라는 아주 아름다운 이름들을 주셨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해야 할 일을 명령 받은 사람이요 순종해야 될 의무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불순종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거짓말과 변명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미션에 동참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사람이 다 똑똑하고 잘 났으면 왜 전도하겠습니까?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손이 없으신가? 팔이 없으신가? 왜 하필 나에게 말씀하시는가?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많이 있지 아니한가? 다 스스로 알아서 할 일 아닌가?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축복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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