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1:6-18  <기회와 선택>   201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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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베들레헴에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곳에 살던 엘리멜렉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풍족한 재산이 있었지만 더 안전하고 풍족한 삶을 찾아 간 것입니다. 이는 신앙에 따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모압 지방에 와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자 나오미는 모압 여인 둘을 취하여 두 아들을 결혼시켰습니다. 두 여인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입니다. 이들이 모압에 거한 지 십년쯤 되었을 때 두 아들이 죽게 됩니다. 가산은 기울고, 이제 남편과 두 자식이 죽고 자신을 포함한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베들레헴에 다시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녀는 베들레헴 길을 결단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쌉니다. 고향에 가면, 나오미는 실패한 삶의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내가 성공해서 돌아갈 때 그렇습니다. 실패해서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이는 참으로 쓸쓸하고 비참하며 그것처럼 부끄러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나오미를 보며, “네가 나오미 아니야? 이게 어찌된 일이야? 이민 가서 잘 산다고 들었는데, 남편은? 애들은? 여기 같이 온 색시는 누구여? 잠시 다니러 온 거여? 아니면 살러 온 거여? 물었을 것입니다. 어디론가 숨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참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가고자 한 것은 단지 고향에 흉년이 그쳤다고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믿음의 고향으로 가기로 한 것은 바른 신앙의 삶의 결단이었습니다.

[룻1:19-21]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나오미는 과거 이스라엘 땅에 있을 때 평소 이웃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베들레헴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하는 사람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나오미는 그들에게 나를 나오미(기쁨)라 부르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부르라고 했습니다. 이 뜻은 슬픔과 고통입니다. 나오미는 마라의 고통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죄인지 구체적으로 그 명목을 밝히지는 않지만, 나오미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회개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겪는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모압으로 이민 가서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다. 이민 갈 때에는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신 것입니다. 고난도 실패도 자신이 모압 땅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것도, 아무것도 없는 털털이가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 바른 신앙의 길을 가지 위하여 정리하여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며느리들입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두 며느리와의 이별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두 자부는 그녀에게 유일한 힘과 의지입니다. 두 자부마저 잃는 다는 것은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녀는 신앙의 길을 선택합니다. 지금 가고자 하는 베들레헴 길은 더 험난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자부들은 자신 때문에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난 날 나오미가 모압 땅에 오게 된 것은 자신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의 결정이었습니다. 결혼 이전에 신앙 안에서 자랐고 신앙으로 살기 원했다 할지라도 결혼 후에 그녀가 모압으로 올 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나약한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그 결과 남편의 의향대로 그녀가 원하던 원치 안 하던 세상 부귀를 좇아 살아야 했습니다. 결과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졌습니다. 축복도 저주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고 그들 스스로의 인생을 살도록 놔주고 싶었습니다. 며느리들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의 인생을 물 흐르는 대로 맡겨서야 나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떠나라!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돌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때 두 자부가 소리 높여 웁니다. 먼저 오르바는 나오미의 거듭되는 권면에 울면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사실 오르바도 착한 며느리였습니다. 그녀도 날마다 나오미와 더불어 성경을 보고 기도하고 찬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최종적인 선택은 자신의 더 쉽고 편해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또 말합니다. "너도 동서와 같이 네 고향 네가 믿는 신에게로 돌아가라" 그러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잡고 따라갑니다. 여기에서 택함 받은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의 갈림길이 나옵니다. 믿음은 선택이며 순종입니다.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에게 있어 모압은 자기 고향이요, 친정이 있고 자신의 생활 풍속이 익숙한 곳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모압을 떠나는 것이 그녀에게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더 이상 기대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하죠, 늙어 몸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처지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결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과감하게 고향을 버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 룻의 믿음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 믿음의 근원은 엘리멜렉도 아니요 그 남편 말론에서 배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여인 룻이 존재하기 전에 먼저 믿음의 어머니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신앙은 선택입니다. 세상의 길도 선택이고, 신앙의 길도 선택입니다. 【의와 진리】를 따른다 함은 내 눈에 보이는 이익에 따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식대로 믿음으로 행한다.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도 잃고 자녀들도 잃었고 재산도 다 잃었지만, 그녀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

1)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힘쓰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남편을 따라 이방 땅에 와서 하나님을 멀리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음이고,

2) 또 하나 나오미가 얻은 것은 신앙 있는 며느리 롯입니다. 지금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딸 룻을 얻었습니다. 훗날 베들레헴 여인들은 이 룻을 가리켜 일곱 아들 보다 귀한 자부”라고 하였습니다(4:15).

나오미의 깊은 고난과 슬픔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에 이민 가서 성공하였더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룻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와 룻이 돌아온 시기는 적절한 시기입니다. 베들레헴에 와서 이 룻은 시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서 이삭 줍는 일을 하게 됩니다. 물론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젊은 여인 룻이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아주 수치스럽고 비참한 일이었고 열대 지방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 소망을 드러내십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나오미의 슬픔을 치유하십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나오미를 위하여 복을 예비하셨습니다. 언제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치유하시기 시작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순간에 하나님은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네 삶을 나에게 맡겨 버려라. 그리고 나와함께 다시 시작하자.” 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출발하지만 하나님은 그녀에게 좋은 만남을 주십니다.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룻2:3]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우연히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룻이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습니다.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룻을 통하여 귀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룻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밭의 일꾼들에 하나님의 복을 빌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베들레헴 모든 사람의 복의 근원이고, 만족과 기쁨이 되는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일꾼들 사이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룻을 발견하고서 이는 뉘 소녀냐? 고 묻습니다. 보아스가 하찮은 시녀에 불과한 룻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찮은 죄인인 나에게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냥 지나쳐도 될 것을 굳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룻에게 보아스를 만나게 해주셨고 그의 아내가 되게 했고, 장차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는 여인이 됩니다.

★ 우리의 신앙의 삶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기회선택입니다. 당신이 바다서핑을 즐기기 원한다면 바다로 가야 합니다. 아무 때나 바다에 간다고 파도를 탈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파도가 오는 계절에 바다에 가야하고 파도가 오는 시기를 맞추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원한다면 은혜의 자리에 가야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지금이 은혜의 시기입니다. 지금이 기회의 때입니다. 선택을 위하여 때때로 위험이 있기도 하고 희생이 있기도 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안일함에 자신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 모든 [萬事는 人事]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놓치지 마십시오.

1) 여리고성의 라합은 정탐꾼들이 왔을 때 그들을 목숨으로 보호하고 구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2) 여리고 성문에 있던 장님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지나가시는 때에 많은 사람의 방해와 꾸지람에도 큰 소리로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눈을 뜨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3)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의 감동에 모든 것을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은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에게, 과감한 선택을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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