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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22:1-7 <요시아의 종교개혁>
열왕기하22:1-7 <요시아의 종교개혁>
내용은 빠져버리고 형식만 남아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목나무, 뱀허물. 결혼 당시 남녀는 결혼서약을 합니다. 평생 사랑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식어버립니다. 신앙생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뜨겁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가지고 계신 것은 제물이 아니라 항상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런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하십니다.
감동이 없고 내용이 없고 진실이 담기지 않은 것을 우리는 형식화 되었다. 타성에 젖었다. 말합니다. 타성이란 새로운 사물이나 자극이 생기면 처음에는 그것을 강하게 인식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처음 손목시계를 차면 손목시계가 무겁습니다. 그러나 곧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손목시계를 찼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새집으로 이사를 가면, 고쳐야 하거나 바꾸어야 하는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5년쯤 지나면, 고쳐야 할 부분들이 더 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 처음 온 사람들이 중국을 제 대로 봅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영적타성에 빠지게 됩니다.
기독교의 특징 중 하나는 늘 새롭게 변화하고 개혁한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말해야 합니다.
1. 부왕 아몬이 암살된 후 겨우 8세 때 요시아는 제16대 유다 왕위에 오릅니다.(BC 637) 그는 성전 수리를 시작하여 목수, 건축자, 미장이들의 품삯도 주고, 목재 석재를 사서 수리토록 하네요. 돈을 정직하게 사용합니다. 감독할 필요도 없습니다.
2. 여호와의 전 수리 중 대제사장 힐기야는 율법 책을 발견하여 서기관 사반에게 전달했고, 요시야 왕 앞에서 낭독했다. 아마 신명기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신 28:25]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
[신 28: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3. 여선지자 훌다를 찾아갑니다. 그 대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 나라에 평화를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왕하 22:17]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요시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집해 그 율법 책을 낭독케 한 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언약을 맺고 경배한 다음 율법의 명령을 철저히 지킬 것을 서약합니다.(23:2-3) 모든 백성들은 섬기고 있던 우상들을 파괴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서 바알과 아세라 및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해 만든 모든 기명을 기드론 시내에서 불사릅니다. 산당을 철폐하고 몰록의 상, 아스다롯 신, 그모스 신, 밀곰 신, 벧엘의 금송아지 및 드라빔 등도 없애고,
남창을 폐지하고, 신접자와 무당을 제거합니다. 그의 개혁은 유다 전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이전 북방 민족이 거주하던 지역에까지 가서 요시야는 벧엘에서 우상숭배를 저지르다 죽은 제사장들의 해골을 무덤에서 꺼내 제단 위에서 다시 불살랐습니다. 우상 숭배를 한 산당의 제사장들을 잡아서 희생제물을 바쳤던 제단에서 가차 없이 죽입니다.
4.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유월절 예배를 성대히 거행합니다.
[왕하 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이집트 왕 바로느고 2세(BC 609)가 앗수르를 공격할 때에 팔레스틴을 지나갑니다. 약소한 남유다 왕국은 앗수르와 이집트 사이에 끼어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 왕의 예속 되어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앗수르 군대를 지원하여, 이집트의 왕 바로느고를 요격하다 므깃도에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돌아오자마자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됩니다. 그는 여선지자 훌다의 예언대로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왕하 22:19-20]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그의 급작스러운 서거(23:28-30)로 인해 그가 해온 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유다는 포로로 잡혀갑니다. 큰 슬픔입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실패한 개혁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왕을 하나님은 일찍 데려가십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를 그렇게 데려가셨는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개혁을 요시야 왕에게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유다 제14대 왕 므낫세 때 그의 치세 55년 동안 섬긴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왕하 23: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건가요?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용서하셨습니다. 다시 기억하지 말라 하십니다.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여전히 죄 가운데 고난을 받는 것입니까?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죽어가고 죄 가운데 고난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죄의 대가를 치룹니다. 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이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금식 기도하였으나 하나님은 아이를 데려 가셨습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을 때 아이가 아파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 앞에 나태해 지고 기도가 부족하고 완악하므로 제 아내가 고생을 하고 있음을 압니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식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하고 나면 신부는 그의 죄에 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속죄의 뜻으로 드리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에 죄인이 죄를 전가하기 위한 제물을 들고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죄를 질 때마다 제물을 가지고 와서 죄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내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 말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죄는 용서받았지만 주님 앞에 돌아온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된 것은 아닙니다.
한 목사님이 담배를 끊지 못했더랍니다. 그는 늘 설교에 자유롭지 않았고, 부끄럽게 지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드디어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는 과거가 부끄러웠지만 하나님의 축복과 자유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다가 우리는 늘 죄 가운데 고난을 많이 받고 살아갑니다.
광부들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미시시피 강에서 기관고장을 일으켰습니다. 배가 강 복판에서 휘청거리자 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승객들은 구명정에 올라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건장한 남성들은 옷을 모두 벗어던진 채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뭍을 향해 헤엄을 쳤다. 승객들이 대부분 탈출한 후 한 남성이 갑판 위에 나타났는데, 그는 옷을 입은 채 강물에 뛰어들었으나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구조대원들이 물속에 잠긴 그의 시체를 건져 올렸는데 그 사람의 주머니는 금덩이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금 덩어리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익사한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불나방은 죽는 줄 알면서도 불이 좋아 불을 맴 돌다가 나중에는 불에 돌진해 타 죽습니다.
[약 1:13-14]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에 매여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축복된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교회 가서 봉사해라 하니 합니다. 참 효자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는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참 부러웠습니다. 아들에게 중국으로 fax 를 부탁했지만 참 힘들었습니다. 하루는 아들과 채팅하면서 선교는 하나님의 전체다 부분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능력이 생기면 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했지요. 아들 말이 아버지는 목사니까 당연히 선교가 전부겠지요. 하더군요. 그래서 아니!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일꾼이란다. 그리고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너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렸는가? 너는 너의 것인가? 아직 용경이의 것인가? 아들은 장신대에 가서 늘 하는 말이 나는 목사 자격이 없어 꼭 목사를 해야 되? 다른 일을 하고 싶어! 순종하여 사는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드려 사는 것입니다. 나의 모습입니다.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온전히 씻으시는 분입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찾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 그의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고 국민의 마음을 새롭게 한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요시야가 보내며 가로되"(22:3), "왕이 명하여 가로되"(22:12; 23:21), "왕이 보내어…모으고"(23:1), "왕이 명하여"(23:4). 그리고 그가 주체가 되어 실행한 개혁의 결과 그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23:25)는 최상급의 칭송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외면적으로는 율법을 따르고 있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요시야 이후에 4명의 왕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결국 멸망하여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갑니다.
2. 요시아의 개혁은 우상을 부수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요시아는 우상 숭배자를 불태우고 뼈를 태워 부정하게 만든 뒤 망한 이스라엘까지 가서 여로보암이 만든 우상까지 부숴 버렸지만 백성의 심령까지 개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속 중심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나의 주인이 되었다면 반드시 내 안에 내가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주를 믿으면 내 가정, 내 직장, 내가 거처하는 위치에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을 지배하도록 울부짖고 기도하며 헌신해야 합니다.
참된 개혁은 무너뜨림보다 세우는데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개혁은 우리 중심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된 자로 바꾸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겉을 두드려 부순다 해도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3. 말씀 1-3절에 보면 요시야 왕은 장로들에게 명하여 모든 백성을 한 자리에 모으고 그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은 백성들 앞에 높은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서서 자신이 먼저 여호와께 순종하여 그 계명과 법도를 준수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모든 백성들도 왕을 따라 그렇게 하겠다고 언약하였습니다.
결국 사람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오 사랑이요 관심입니다.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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