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1-22    <욥의 믿음>

 

한번은 어느 목사님이 청소년 집회를 인도하고 난 다음에 습관적인 죄에 매어있는 사람은 다 나오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새 삶을 살라고 하는 결단의 기도를 했답니다. 술에 담배에 마약에 습관적인 죄에 빠진 사람은 나오시오. 하니 사람마다 나와서 기도를 받고 회개하는데, 6살 된 아이가 나와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기도를 하더랍니다. 집회가 끝난 다음에 그 아이를 불러 물어보았대요. 도대체 6살 된 아이가 무슨 습관적인 죄에 빠졌느냐고 했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자기가 아니고 외삼촌 때문에 나온 거라는 것입니다. 외삼촌이 술주정하고 알콜 중독자로 있는 것을 너무너무 안타깝게 여겨, 습관적인 죄에 빠진 사람 나와서 기도하라고 할 때 외삼촌을 대신해서 나가서 기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 말이 목사님에게 오히려 도전됐대요. 얼마 뒤에 집회 중에 그 외삼촌 되는 분의 간증을 듣게 됐는데, 그 아이가 기도하고 3주가 지나서 술주정뱅이 알콜 중독자였던 이분이 마음속에 더이상 이렇게 살지 말고 교회에 나가라!’ 너무 분명하고 강하게 들고는 자기도 모르는 힘에 끌려 교회를 나왔더랍니다.

 

욥의 신앙생활이 어떠했는지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본문에 짧게 1절부터 5절까지 욥이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있습니다◯ 욥이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욥은 늘 자녀들을 위해서 잊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렸던 사람이었다.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랬어요. 그 말은 하나님 앞에 자녀들을 위해서 늘 제사 드린 것 하나를 보면 나머지는 설명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뜻입니다 가정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은혜의 문, 축복의 문은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나의 가정이 축복을 받기 위하여 교회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정예배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교회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정예배입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교회의 출발입니다.

 

 유대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저렇게 놀라운 민족이 되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가정교육에 원인이 있다고들 설명을 합니다. 유대인이 되고 안 되고는 부모가 다 유대인이면 당연히 유대인이고. 그런데 한쪽이 유대인이고 다른 한쪽이 유대인이 아닌 경우는 문제인데, 아버지만 유대인인 경우에는 인정이 안 되고,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한답니다. 가정교육이 유대인을 만들기 때문이에요. 가정교육에 있어서 어머니의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의 가정교육은 특별해요. 유대인의 부모는 자신이 육신으로 낳은 아이를 영적인 하나님의 제자로 만드는 사명을 가지고 기르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 부모는 자신이 육신으로 낳은 아이지만, 영적으로 아이를 하나님의 제자로 삼는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기른다 말입니다.

 

유대인 부모는 자녀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압니다. 왜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왜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이라고 하는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의 아버지의 의무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의 바른 자세는 무엇인가? 어머니는 왜 남편을 돕는 배필인가? 왜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가? 왜 고난의 역사 교육이 그렇게 중요한가? 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셨는가?’ 이런 내용을 유대인은 가정 안에 부모에게서 배웁니다. 이는 교회 가서 배우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 배워야 합니다.

 

사무엘은 주의 일을 이루어낸 사람입니다. 평생에 형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가르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사무엘의 노년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의 자녀들이 사무엘과 같지 않았으므로 실망했습니다.

엘리는 자녀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제단의 제물을 빼앗아 갔고 제단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왕이 쳐들어왔을 때 겸손히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풍전등화의 이스라엘을 구합니다. 이때 죽은 앗수르의 군사가 185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는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막 매달리면서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하나님은 그의 수명을 15년을 연장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신하들이 왔을 때 자신의 힘과 영화를 자랑하여 자신의 무기고와 궁중의 모든 소유를 자랑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다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을 때 그의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히스기야 왕은 자녀들에게 대한 영적인 열망이 전혀 없었어요. 자기 문제 해결된다고 그러면 그것으로 좋았어요. 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 12세라 하였습니다. 차라리 히스기야기 15년의 연명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 므낫세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가정예배는 축복의 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중국에 있을 때 아침이 부랴 사랴 학교에 간다. 돌아와서 숙제한다. 주말에는 제가 설교 준비를 한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가정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아이들에게 억지로 하기 싫은 성경 읽기를 검사했을 뿐입니다. 억지로 하던 성경 읽기는 지금 대학 생활에서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집을 떠나자마자 해방되었지요. 좀 더 즐거움으로 예배드리지 않은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일 때마다 즐거운 예배, 부담스럽지 않은 예배, 진정한 예배가 되게 하려 힘을 씁니다. 진정한 예배는 의무도 아니요.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진정한 예배는 신령과 진정입니다. 기쁨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진정성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를 나의 자녀는 다 압니다. 나의 자녀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정말로 믿는지 안 믿는지를 다 압니다.


[1:8]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자랑의 대상이 된 이유는 "순전하다(blameness)"는 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르게 부끄럼 없이 살았음을 말합니다. "정직하다(upright)"는 말은 모든 일에 있어 표리부동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그런데 그에게 매서운 찬 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스바 사람이 갑자기 쳐들어와 밭을 갈고 풀을 뜯는 소와 나귀를 뺏어가고 종사하던 종들이 떼죽음 당했으며 갈대아 사람이 와서 약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으며 거친 들에서 태풍이 불어 형제들이 한 집에서 식사하는데 집이 무너져 몰사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녀가 10남매, 그런데 하나도 남김없이 죽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죽고 아내가 죽어도 신앙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 없이 사랑하는 아이가 죽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수없이 제단을 쌓았습니다. 매일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한 인간의 완전한 믿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욥은 자신에게 임한 고난이 자의 죄에 기인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욥은 지금 자신에게 닥친 환란이 자신의 어떤 죄에서 온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로 난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20세에 아파서 6개월을 누워 있는데, 어린 여동생이 말하기를 회개해야 한다고 할 때 몹시 기분이 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속으로 사람은 다 죄인이지, 무슨 특별한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내게 이런 병을 주시는가? 모든 병을 죄의 원인으로 돌리는 동생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고, 마음이 상했었습니다. 물론 사람은 늘 회개해도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분명 회개해야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당당하게도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말합니다.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렇게 말할 수 있는가?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의 믿음에 어떤 의혹도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재물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욥은 자기 가진 재산이 다 날아가고, 자녀들이 죽었는데도 신앙이 흔들리질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 욥의 감사는 정말 감사할 수 없을 때 하는 진실한 감사였습니다. 감사에는 상대적인 감사가 있고, 절대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감사는 좋을 때만 하는 감사입니다. 절대적인 감사는 나쁜 일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감사입니다. 평생 감사, 무론 감사, 이는 하나님이 만물의 주재이심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감사는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평안 중에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은 늘 "예"가 되신 하나님, 믿을 만한 하나님,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고후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을 주시려고 준비하셨는데, 과연 아브라함이 그 축복을 받을만한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는 축복을 담을 그릇이 있는지 시험하신 것입니다. 축복을 담는 그릇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 넓은 동쪽 들을 바라보며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더 많은 풍요를 얻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동쪽 요단들을 택해야 했습니다.

2) 다윗이 하루빨리 왕이 되기를 바랐다면 사울을 굴 앞에서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쁜 방식을 택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과 저주가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신앙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대하게 하십니다.


 마른 막대기와 같고, 보리떡 같은 우리를 위대하게 들어 쓰셔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다윗은 노래하기를

[18:2]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이시오, 요새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방패시오,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 됩니다.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