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3:1-3  < 예수의 이름으로 >             2013. 3. 3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 기도하기위하여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걸인을 보았습니다. 날마다 보던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마다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를 주목하여 보고 이르기를 “우리를 보라 합니다.” 베드로가 부르니 걸인은 당연히 얼마나 돈을 주려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대단히 실망스러운 말입니다. 저희 교회가 화요밥집을 하면서 돈을 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단지 몇 백 원이라도 주면 멀리서도 몰려옵니다. 아마 한 끼 식사보다 더 원하는 것은 돈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한 끼 식사야 라면을 먹든 국수를 먹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돈을 주면 자신이 원하는 담배도 사필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지요. 그러니 실제로 돈을 주는 것은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행 3:6-7]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가 일어나라고 명령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뛸 수도 있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국 교회사에 위대한 부흥사 중 한 사람이었던 金益斗 목사님이 전도사였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어느 날 심방을 다녀오던 金益斗 전도사님이 시장에서 거지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쳐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과수원 돌담 밑으로 거지를 업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이름으로 일어나라"하면서 손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워 그 자리를 도망쳐 나온 김 전도사는 자신의 무능함을 탄식하다가 이불을 싸들고 산으로 올라가 금식과 철야를 하며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불 같은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김 전도사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산을 내려오다가 전도사님은 예전의 그 앉은뱅이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제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않은뱅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金益斗 목사님의 첫 번 기적이었습니다.


 ●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향해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 합니다. 기독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은 예수님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길이 많다고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품에 가는 길인데 이리 가든 저리 가든 천국만 가면 되지 않는가? 말합니다.

유대교도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이슬람교도 알라 하나님을 믿습니다. 중국인들도 天帝를 믿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하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모든 세상의 많은 종교와 다른 것은 “예수이름 외에 구원받을 다른 길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예수의 이름만으로 구원받는 사실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매우 기뻐하며 대화하자고 할 것입니다. 불교 신자들도 좋아하며 기독교는 좋은 종교라고 말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예수 이름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사실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기독교를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전쟁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까? 


한 젊은이가 출장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좌석에 앉아 옆 좌석의 사람을 보니 분명 마더 테레사였습니다. 일평생 존경하고 보기를 원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테레사수녀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힘을 내어 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은 교인이 아니지만 무척 존경한다.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테레사수녀도 반갑게 그러냐고 응답하였습니다. 젊은이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물었습니다. 인도에서의 사역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더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긴 시간을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짧은 시간의 만남이 아쉬웠습니다. 그는 마더 테레사가 묵주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연 기도를 많이 하였음을 알수있었습니다. 내리기 전에 용기를 내어 마더에게 작은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얻을 수 없는가 물었습니다. 마더는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어 묵주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늘 이 묵주를 가지고 다니면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그의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그의 가정은 화목하며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말을 친구에게 하였더니 친구가 그 묵주를 좀 빌릴 수 없겠느냐 청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10日만 그 묵주를 빌려서 마찬가지고 늘 묵상하며 지냈습니다. 그도 역시 큰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묵주에 어떤 효험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면 이들의 기도가 효험이 있었던 것입니까? 저는 그 묵주에 효험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하 13:20-21]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성경에는 참 이상한 일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의 무덤에 모압 적당의 시체를 던지매 적당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영적인 능력은 알겠는데, 그의 무덤에 시체가 닿았더니 살아났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성인의 유물을 신성시합니다. 성인들의 쓰던 유물에 신비한 효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쓰시던 잔을 [성배]라 합니다. 오늘 엘리사의 무덤을 보니 분명 무슨 영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영험이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영험이 있다면 아마 오늘도 엘리사의 무덤에 사람들이 시체를 던지기 위해 길게 줄서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모압 적당이 살아난 사건을 하나님이 엘리사가 하나님의 존귀한 일꾼임을 일깨우는 〔한 번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묵주가 한 때 효험이 한 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정말 두고두고 놀라운 효험을 낸다면 아마 세상의 가장 크고 비싼 다이아몬드보다도 비싼 물건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공로를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것을 기억하고 솔로몬의 罪惡된 일생에 큰 재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공로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심판받고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공로는 영원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 사람들이 나면서 앉은뱅이가 걷고 뛰고 찬양하는 것을 보고 심히 놀랐습니다. 솔로몬 행각에 몰려듭니다. 베드로를 神처럼 바라봅니다.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가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경건이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십시다. 분명 베드로의 기도생활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합니다. “제구 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 갈 새 ” 베드로는 좋은 기도의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3시(오전 9시), 제6시( 정오), 제9시(오후 3시) 세 번입니다.  베드로의 경건과 기도생활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삶이 없었더라면 그는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하기를 기도 외에는 이런 類가 즉 귀신이 나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


사도행전10장에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일하신 하나님만 알던 사람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제9시 기도시간에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네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그의 기도와 구제가 중요하였습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많았으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 그런데 지금 그는 왜 자신의 경건과 능력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억 하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기도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경건의 양과 경건의 시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오래했느냐. 오랜 기도를 했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경건을 많이 쌓아서 하늘에서 마음대로 비를 내리게도 하고, 그치게도 하고, 원하는 대로 온갖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주의 원 대로 될지이다.”기도하잖아요. 저는 다만 주님의 쓰시는 통로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본래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분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거한다면 그래서, 그 분의 뜻을 알고, 그 분의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십시오. 아무리 연약한 나라도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요 16;23]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 엄마, 아빠 불러줄 때 자식 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한 방에 있어봐야 제 관심 있는 일이나 하고, 사람이 들어가도 나가도 인사도 안하고 말 한 마디 없이 지나는 가정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 아빠가 믿는 종교를 나도 따르고 엄마 아빠가 친척을 찾아갈 때 자녀도 따라 다니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칠 때마다 “네가 이 일을 할 줄 믿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향에서 저들의 믿음 없음을 이상히 여기시고 아무 일도 행하시지 않고 떠나셨습니다. 오늘 그 앉은뱅이 걸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몇푼 쥐어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기도하는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였고,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나의 아이들이 믿음이 작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남편이 믿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나 역시 믿음이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간절한 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사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한얼산 기도원 傷痍軍人 출신 이천석 목사님은 원래 깡패였는데 이 분이 하루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 안에 목발을 집고 있는 사람을 보고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그분을 붙잡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낫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너무 창피해서 그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느 집회를 가서 보니까 그 집회에 간증하러 나온 사람이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내가 옛날에 다리를 절었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떤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어서 내가 나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이더래요. 여러분 내가 기도하는 것이 당장 어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듣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몫입니다. 고치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만 구하는 몫은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여기십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이는 참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들고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할 때 많은 사람이 무시했습니다. 믿지 못했습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게에 손님이 떨어졌다고 한탄합니다. 젊은이가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삶에 희망이 없이 실망과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도움을 힘입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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