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2013. 7. 21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누가복음 6:20]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 누가복음 [6장]에서는 1)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2)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3)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4)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은 광야에 모인 자들 앞에서 현장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마태복음에는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믿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회에 주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볼 때 적합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신 새로운 몇 가지를 첨부하고 있습니다.

● "마카리오이"( Makavrioi '복이 있나니') 라는 단어로 문장이 시작됩니다. “가난한 자들이여! 그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 가난하다는 것이 복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부자”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가 부자이기를 원하십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느냐? 지금 주님 앞에 나와 있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16-] 한 청년이 찾아와 주님 앞에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그는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했습니다. 그런데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여 갔더라.”

○ 그렇습니다. 부자로 산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물질이 될 때,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우리가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물질에 자유로워야 합니다.

○ [디매오]와 [바디매오]는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돈 있고 빽 있고 힘 있는 사람은 돈과 사람을 의지하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여야 합니다.

○ 물질적인 풍요에 안주하느라 헌신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지켜야 할 편리함과 부귀가 나의 인생의 꿈에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부귀는 나로 하여금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프라 위프리]는 그의 삶의 신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주님이 나에게  재물을 맡기신 것은 사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늘 가난한 마음을 지켜 유지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시간과 재물을 풀어 놓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신앙을 제대로 뿌리 내려야 합니다. 생활 형편이 좋아지고 나면 하나님을 찾기 더 어렵습니다.

유럽여행 코스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웅장하고 거대한 고딕양식의 성당들입니다. 이곳을 여행하러 가는 사람들은 유럽의 기독교가 쇠락한 모습을 눈으로 보기 위함이라고 말하지만, 진정성 있는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왜 유럽의 교회는 성도들이 떠나고 텅텅 비어 유지할 수 없어 교회당 건물이 극장으로 식당으로 박물관으로 팔려 나가는 것입니까? 세상일에 바쁘고 배가 불러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은 늘 우리 안에 진정한 믿음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는지 맘몬을 선택하는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원하는 지역을 그의 소유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보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예수님은 모여든 무리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갈릴리,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 강 건너편 아무런 교통수단도 없는 그 때에 세상의 허다한 무리들이 며칠씩 걸어서 아주 먼 거리에서 예수님을 좇아왔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와 놀라운 말씀의 소식을 듣고 며칠을 걸려서 쫓아 온 것입니다. '의'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구원행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땅의 것을 구하여 나옵니다. 가장 많이 모일 때는 어느 때가 언제일까요? 설교를 들으라, 교훈을 들으라. 한다면 이것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을 고친다. 기적을 행한다. 권세를 가졌다. 무엇인가 일을 크게 벌일 것이다. 할 때 모입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나의 유익을 위하여, 나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것을‘의에 주린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구원에 갈급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자신의 무거운 세상의 짐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 그 은혜를 받고 보니, 그 사랑을 전하지 못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주리고 목마름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나의 자녀가 유명 대학에 가고 많은 재물을 쌓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우리에게“적당히 신앙 생활하라!” “믿는 것은 좋은데 미치지는 마라.” “교회 봉사? 열심 있고 사명감 있는 사람들이나 하면 되지”말합니다. 우리에게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타는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기를 원합니다.

[요 14:8-9]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사랑과 능력을 예수님은 자신의 삶 속에서 보이셨고 충분히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보는 눈이 인간적이고, 육체적이라면 그런 눈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주님과 동행중에 함께 대화하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 사람의 마음속에 아집과 오만 선입관이 자리하고 있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속담에 ‘개의 눈에는 개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했습니다. 세상 부귀 욕심에 가득차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청결하다는 것은 두 가지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온갖 잡된 것으로 마음을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마 6:22-24]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순박한 강원도 산골 소년 이영표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고 2001년 안양 LG라는 프로구단에 입단할 즈음 한 집사님이 주신 책을 읽고 양육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믿는 자들 죄 짓는 모습을 비난하면서 믿는 자들이 왜 서로 사랑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것인지 실망스러운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분명 만물은 창조의 시발점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영적인 존재 즉 귀신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도 계실 것이라는 반반의 확신과 神에 대한 의문들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기독교란 세뇌된 자들의 종교라고 믿으며 실제로 하나님을 보여 달라 기도했던 그에게 하나님은 마음을 변하게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고 하나님이 살아계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나는 언제나 네 주위에 있었건만 네가 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는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절대자 앞에서 내 모습이 변화되는 것이야말로 참‘믿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그가 원하는 신을 찾고자 했던 옛 모습은‘오만’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이제 ‘그 분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눈을 밝혀야 합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녀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얻을 것임이요!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마음에 애통함이 있습니까? 경쟁사회에서 밀려나서? 꾸어준 돈을 받지 못해서, 사람에게 손해를 입어서? 억울해서? 나의 자존심을 상해서 애통합니까? 그런 애통은 나에게나 하나님에게나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애통은 왜 사람들이 진리를 모르고, 왜 하나님의 도우심을 모르고 사는가? 사망 길로 가는가? 사랑의 애통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할 때 여인들이 뒤를 따르며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① 우리는 먼저 나의 죄 된 모습에 애통하여야 합니다.

[시편 32: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다윗은, 사도 바울은 죄의 노예가 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속상해 눈물을 흘립니다.


②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애통은 자기를 보고 하는 애통, 이웃을 향해 우는 애통에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곧 나라를 향한 애통입니다. 이 나라의 아픔과 상처를 보며 타락과 멸망을 향해 치닫는 사회와 문화를 보며 분노하고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죄로 사무친 백성을 보면서 울었고,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울었고 멸망될 도성을 보고 울고 또 울어서 눈물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곧 동족의 구원을 위한 애통이라고 말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특별히 조국이 큰 어려움에 빠져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 1:4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노라"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 해변 가에서 울며 몸부림하며 "하나님이여 내 조국을 내게 주시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기도했습니다. 그런 눈물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친구교회의 성도들은 우리교회를 위해 울 수 있기를 기다리십니다. 가족과 친구, 나라를 위한 기도의 양을 채우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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