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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1-9 <자기를 낮추는 사람>
마태복음 18:1-9 <자기를 낮추는 사람> 2013. 7.28
[마 18:1-2]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우리나라 예의범절 중 하나가 있다면 자리배정입니다. 어느 집이든지 안방에는 자리가 있습니다. 윗목이 있고 아랫목이 있습니다. 식당에 가도 연령에 따라 신분에 따라 자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모임에서든지 자리배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따금 어떤 행사가 있으면 사진촬영을 합니다. 그때도 자리배정에 많은 신경을 씁니다. 어떤 사람은 가능하면 중앙에 서려고 합니다. 자신이 모두의 중심의 인물임을 나타내려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높은 자리를 선호합니다. 그래서 상석이냐 말석이냐에 예민합니다. 자리에 따라 자기 신분의 서열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어린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리를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맨바닥이건 땅바닥이건 괘념하지 않습니다. 아무 데나 앉습니다. 자리 배열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앞자리, 뒷자리, 옆자리, 어디든 가라는 곳으로 가서 앉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 세계에서는 친구가 가난한 집의 아이든 부자 집의 아이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분 귀천에 차별이 없고, 잘 입고 못 입고 차별이 없습니다.
○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는 모두가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는데 사람들은 서로를 구별하고, 순서를 정하고 인간의 잣대에 의해 새로운 평가 기준을 만들고 자신의 뜻에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강요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한 가운데 세워놓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마 18:3-4]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약점은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집중력도 부족하고 인내력도 부족하고 다. 어리석고 쉽게 속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잘 받기도 합니다. 이런 면을 두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는 늘 딸에게 “우리 집안에 B학점이란 없다”고 하며 A학점 받기를 강요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는데 어쩌다 B를 받아오면 아버지는 집안 망신을 시킨다며 혁대를 풀어 딸을 때렸습니다. 이 일로 아이는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아 자신의 인생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삶에 기쁨을 잃었습니다. 학교에서 최고 성적을 낸 어느 날 아이가 자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 반면에 좋은 점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단순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 어린아이에게 천국을 말하면 천국이 있고, 믿으라 하면 믿고,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하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 하지만 어른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어? 천국이 어디 있는데? 하나님이 있으면 왜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해?” 별 이유를 다 대면서 의심하고 따집니다. ○ 세상에서 살다보면 의심이 필요하고 잘 따져보고 해야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세는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사람은 자라면서 의심과 고집으로 그 마음 밭이 단단해지고 여러 가지 선입견과 탐심과 오만으로 하나님의 말씀도 다른 사람의 말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돌이켜’를 영어로 하면 ‘change’변화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데에 있어서 먼저 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계급과 지위, 권력과 명예에 야심을 품고 있었던 제자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생각을 바꾸라. 세속의 지배욕, 명예욕, 자만심을 버리기로 네가 어렸을 때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이켜 바꾸라 하시는 것입니다. 높아져 있고, 높아지려는 마음을 낮아진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become' 입니다. ‘become’ 이란 말은 계속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단어로써 어린아이처럼 계속하여 순수함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변하여도 자신이 무엇을 얻었고 성취하였다 하더라도 선입감과 고정관념에 굳어진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 예수님이 아이들을 칭찬하신 것은 아이들의 겸손입니다. 어린이는 스스로를 낮춥니다. 어린아이는 늘 부모님을 의지합니다. 스스로를 배워야 하는 존재로 여깁니다. 단순하며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을 높이려 하거나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음 알고는 철저히 부모의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 주님 앞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소자(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알고 매순간 주님의 도우심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처럼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항상 낮아져야 합니다. 자기를 낮출 때 하나님이 높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 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6]절에서는 상처받기 쉬운 어린이를 영적으로 연약한 신자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실족케 하다’인 원어‘스칸달리조’는 ‘넘어지게 하여 죄를 짓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의 지배욕과 자만심,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키고 세상에 화를 불러오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7절) 하였습니다. ○ 신앙에 있어 영적으로 어린아이가 실망하고 믿음에서 떠날 때는 그는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이 되고 세상의 어둠에 속한 자가 되어집니다. 실족케 하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다 어리석고 알게 모르게 무수한 실수와 오해 속에서 늘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지납니다. 때로는 그래도 나를 이해해 주고 나의 말을 들어줄 것 같은 사람사이에도 "제발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무심코 내 뱉은 한 마디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 하여튼 우리는 서로의 생각이 너무 다르고 서로의 기대에 부응하여 살지 못합니다. 저도 때때로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 한다. 말하지만 정말 안 되는 건. 남이 고민을 말할 때 저는 생각의 회전이 느리고, 감정이입이라는 것 그게 정말 안 됩니다.
한국교회는 외국에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활동을 합니다. 선교를 금지한 나라에서는 구호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와 구제가 그들에게 종교를 강압하는 무례한 일로 여겨집니다.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교리적 이유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합니다. "예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배타성이 싫다" 는 것입니다.
○ 우리 각 사람의 신앙 수준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 있고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제 막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고 그 오묘함에 놀라서 모든 것을 깨달은 것처럼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 겸손이나 배려의 마음을 배우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 과정입니다.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과정과 때에 따라 나누어 주시는 믿음의 모습이 다릅니다.
○ 믿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는 믿는다.’말하지만 이러한 고백은 종종 √자기의지와 √결심이 동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 과연 자신 신앙의 삶이 완전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실족하지 않게 하였다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
우리 각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모임과 교회를 찾고 싶어 합니다. 아름다운 교회에서 좋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마음의 평강을 얻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늘 실수하고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사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4]절에 자신을 낮춘다 함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요구되어지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전능하심을 알고, 그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분 앞에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직 자신을 낮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목이 뻣뻣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자신을 낮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재능과 지식과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 앞에서 자신을 높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사람을 통하여 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한 개인플레이에 능한 축구선수가 있습니다. 진정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늘 패스하는 데 인색합니다. 보면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늘 축구경기에서 자기를 들어내려고 단독 드리블 하다가 공을 뺏깁니다. 승리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부르지도, 좋아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박지성 선수는 팀을 생각합니다. 늘 팀원을 돕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그는 모두의 사랑을 받습니다.
○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농구 코치 John Wooden의 선수훈련의 지침 한 마디가 있습니다. 이는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 영국의 기독교 문학가 C. 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겸손해지고자 한다면, 그 첫 단계는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그렇습니다. 자신의 교만을 깨달아야 겸손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승리는 나의 노력과 나의 능력으로는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방법을 사용해서 살아가던 삶을 멈추고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삽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민수기 21장]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무수한 사람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모세는 놋뱀을 높이 세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살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예표입니다.
그 때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천막에서 나와 하늘을 바라보면 되는 것을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한 일을 그들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놋뱀을 바라보는 일은 아주 상식적인 일도 아니고, 과학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단 한 가지는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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