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35-41  <풍랑 속의 예수님>     2013. 8. 11

● 북극에는 얼음이 녹아내리고, 북극곰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 중국 상해에서는 40도 이상 폭염으로 품지도 않은 알이 병아리로 부화하고, 길거리에 돼지고기를 10분만 놓아두면 익는다 합니다. ○ 지구촌 한 곳에서는 홍수가 범람하여 도시를 휩쓸고 지나는데, 한 곳에서는 가뭄으로 농작물이 타 죽어가고 있습니다.

● 지금 세계 많은 나라가 국가경제 파산이라는 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거대한 파도에 떠밀리는 조각배와 같습니다. ○ 세상에 돈은 넘쳐서 갈 곳이 없습니다. ○ TV에서는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바싹 마른 어린이를 방영하며 구제를 호소하고 한편에서는 우주개발 기술의 발달은 火星에 여행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 복지를 말하는 정부는 세수확보를 위하여 월급쟁이의 유리지갑을 더 가볍게 하려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현대인은 하나님의 권위도, 절대 진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 현대인에게는 어른의 권위도, 선생님의 권위도 없습니다. ○ 세속 사람들에게는 來世가 없습니다. 감성적 쾌락만이 있을 뿐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에게는 money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mammonism입니다. 

● 이제 우리의 뒷골목은 두려움으로 조심하여 다녀야 하는 길이 되었고, 범죄 소년은 넘쳐나 또 다시 지금의 소년원을 더 증축해야 합니다.

⇒ 세계의 경제 정치 군사 문화의 위기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입니다. 어떤 이는 왜 다 아는 그런 말을 또 하느냐? 좋은 소리 할 수 없느냐 하는데 현실의 위기를 부러 잊고 살면서, 나만의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재난은 특별히 죄가 많 한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고 전체 공동체에 미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막 4:35-36]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앞 장에서는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군중을 앞에 두고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십니다. 왜 건너편으로 가자하십니까? ① 예수님은 항상 말씀을 가르치신 뒤에는 삶으로 실천하시거나, 기적을 행하시므로 말씀을 증거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② 이 천국의 소식은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야 하는 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목적>은 나의 몫을 키우고, 나만 즐겁고, 행복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천국의 삶을 누려야 합니다. 문제 많고, 어려움이 많은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제자로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며 기도의 훈련을 하며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막 4:37-38]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갈릴리 바다는 평상시에는 고요하고 건강에 좋은 아열대 기후를 이루고 있으나 때때로 무서운 풍랑이 일어납니다. 갈릴리 호수는 낮 동안 뜨거운 햇빛이 호면에 내리 쬐이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때, 호면에는 증발현상으로 인해 공기가 매우 희박해집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는 해수면보다 약 200m 아래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헤르몬 산에서 요단 계곡 쪽으로 산바람이 불게 되면 그 기류가 깊은 웅덩이와 같은 갈릴리 바다로 급하게 내려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이 때 물이 요동하여 무서운 풍랑을 일으키게 됩니다. 여러분 풍랑을 아십니까? 풍랑은 배를 위 아래로 움직이게 합니다.


● ‘큰 광풍이 일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위험이 극에 달하여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는 절체절명이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일촉즉발 침몰 위기에 처했습니다.   <어느 날 생각지 않은 때에> 재난을 당하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주님이 타신 배가 왜이래?  죄인이 탄 배도 아닌데?  많은 사람은 내가 주님과 함께 배안에 있으니 평안할 것이다. 안전할 것이다. 기대합니다. 풍랑 없는 인생을 꿈꿉니다. 큰 광풍으로 인하여 때때로 국가, 교회, 가정, 개인이 깨어지고 물에 잠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 사공들입니다. 저들이 힘써 노를 저었지만 거센 풍랑이 한번 몰아치니까 그 어느 누구도 속수무책입니다. - 이것이 곧 우리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사람의 실력, 과학기술, 전문지식, 인생의 노하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는 정근모 박사는 원자력 분야의 세계적 석학들 사이에 '천재'로 통합니다. 경기 중․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후 고교 생활 4개월 만에 월반, 서울대에 차석으로 합격했습니다. 스물 네 살의 나이에 플로리다대 교수가 됐습니다. 그 후 뉴욕공대 교수, 한국과학원(KAIST) 부원장, 과기처장관을 두 번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평범한 장로교 신자였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교수로 있던 1980년 나이 40세 즈음에 아들 진후가 신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 아들이 나이 36살 하나님 품으로 가기까지 큰 고통 속에서 6번이나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을 고쳐주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였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처절하게 매달렸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해서 눈물로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아픈 네 아들이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감사해 본 일이 있느냐’ ‘감사라니요?’ ‘네 아들이 아니라면 너는 나에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느냐?’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무한한 평강함을 느꼈으며,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인간은 자신의 한계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겸손이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한없이 무기력해 지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은 일이 뜻대로 안되고 힘든 상황에 처하면 비로소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도우심을 요청하게 되어집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주님 되심] 앞에서 겸손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 세워주십니다.」

고난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면 우리는 고난이라는 손님 앞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중에 인간의 한계와 절벽 앞에 서 있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이는 예수의 모습은 광풍으로 인해 배가 침몰 직전에 있는 제자들의 위급한 모습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광풍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아주 평온한 모습입니다. □ 예수께서는 낮 동안 내내 무리들을 가르치신 연고로 인해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기 때문에 깊이 잠드셨을 것입니다. □ 예수님도 먹지 않으면 배고픈 존재이고, □ 친구가 죽으면 눈물을 흘리는 연약한 육체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를 가지셨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하게 합니다.


○ 광풍을 만난 제자들이 주님을 향해 "리의 죽게 된 것을 왜 돌보지 않습니까?"  주님의 무관심을 불평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지체하심에 가슴이 타들어갑니다.  말 없으신 하나님, 긴 침묵의 하나님 때문에 때로 우리는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 블레셋의 침략으로 전쟁의 시간이 다가오는데 제사를 드려야할 사무엘은 왜 오지 않은 것입니까? 사울이 직접 제 손으로 제사를 마치고야 도착합니다. ●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되었으니 어서 발걸음을 재촉하여 주기를 바라지만 이 사람들의 마음은 나 몰라라 하시고 예수님은 길에서 지체하십니다. ● 나사로가 죽은 소식을 듣고 나흘이 지나서 예수님은 요단강을 건너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 그러나 이는 실제로는 하나님의 무관심도 무능하심도 아닙니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경외하지 않는지~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머리로 믿었지 마음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막 4:38]

●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5]

●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눅 8:24]

 여기서 공통되는 점은 저들에게는 주님을 향한 원망이 있고 두려움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최초의 복음서는 선생님이여 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선생”이란 말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만 있을 뿐 예수님을 전능하신 ‘주’로써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하시니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잔잔하여 졌습니까? <아주> 잔잔하여졌습니다. 그처럼 거센 파도 불던 바다가 잔잔한 호수,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고요한 호수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이지요.

 이는 자연 현상을 인격적 대상으로 삼고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귀가 있어 들을 수 있는 짐승도 아니요. 살아있는 식물도 아닙니다.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막 7: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하나님은 아무리 문제가 크고 사태가 심각해도 인간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얼마든지 풀어주시고 평정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막 4:40-41]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했습니다. 얼마나요? <심히> 저들은 참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저들을 소원의 항구, 평강의 땅로 인도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십니다. 마침내 저들은 이제 예수님을 진짜 ‘주님’으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쓰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종은 주를 위하여 살며, 주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1세기 로마사회에서 성도들이 예수님을‘주’로 고백하는 것은 오늘 날 우리가‘주님’으로 부르는 것과는 아주 다른 면이 있습니다. 1세기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주’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바로 로마의 시저(가이사)였습니다. 시저에게만 공적으로 ‘주’라는 칭호를 붙이며 존경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의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더 이상 시저를 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당시의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로마법에 따라 그를 위해 죽는 것도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主)님을 위해 사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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