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요한복음 20:13-18 <나를 붙들지 말라>
요한복음 20:13-18 <나를 붙들지 말라>
○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참 소망이 없는 죽은 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만큼이나 예수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늘 감사하며 역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 [마 28:9]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인들을 만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여인들의 기사가 생략되고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요한이 공관복음서에 이미 기록된 내용과의 중복을 피하고 새로운 사실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정황을 볼 때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만난 것은 부활 후 사람 앞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고,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두번째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예수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리아의 부활 현장의 목격을 통해 얻은 올바른 지식과 확신을 교회와 신자들도 함께 하기를 바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 부활의 신앙이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육신의 정욕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상급을 구하는 삶과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3,14]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기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 마리아가 뒤를 ‘돌이켜’ 보았다는 것은 예수께서 보통 사람이 인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찾아오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닙니다. 빈무덤의 기사는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실 것이란 사실을 몰랐거나 믿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바로 앞에서 예수를 대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보고 었는 분이, 자신이 통곡하며 찾고 있는 바로 그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진리의 영으로 오신 예수를 세상은 받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보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부활사건에 있어서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도 세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오해한 것 역시 영적인 눈이 가리워져 부활하신 몸을 입고 나타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눅 24장]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지만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 그가 예수신 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형상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모습과는 다른 형상을 입으신 까닭입니다. 육체로 부활하신 주님이지만 믿음이 없이는 알아 볼 수 없으며 보아도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5절] 초반의 예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 말은 [13절]에서 천사가 물었던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여자여’ 불렀는데 이는 일반적인 여인을 향한 호칭입니다. 그녀가 예수를 '주여' 하며 대답하는데, 여기 그녀가 높이는 존칭도 사실 다른 사람에게도 사용될 수 있는 존칭으로 그를 동산지기로 여기고 사용한 호칭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하실 때 마리아는 동산지기의 책망조의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무엇이 마리아로 하여금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분이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일까요? [16절]에서 예수께서 '마리아야' 그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그녀는 놀란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돌이켜 보고 이제야 그녀는 자신이 애타게 찾던 살아계신 예수님인 것을 보고, 그 순간 예수를 히브리말로 '랍오니' 라고 부른 것입니다. 실제로 이는 평소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불렀던 친밀한 관계의 칭호였던 것입니다.
○ 그러면 왜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리아야’ 부르시지 않은 것입니까? 이는 복음서 전체에 흐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보이신 기대와 시험에서 알수 있습니다. ○ 풍랑을 당하여 어두운 바다에서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을 향하여 물 위로 오시는데 지나가려 하셨다든지, ○ 귀신들린 딸을 위하여 도움을 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하여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늘 우리의 믿음을 평가하십니다. ○ 평상시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믿음을 가진 자가 되라 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답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같고, 지나면 잊어버리는 존재들입니다. 왜 저의 기도를 외면하고 계시나요? 주님은 지금 왜 이 지경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때로 힘들고 낙심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상황에도 깨어 있는 믿음을 갖고 있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 요한은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했습니다. 양은 목자 되신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그 분이 예수시라는 사실을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인간적인 열심과 감정으로 헛된 일에 골몰하는 자신의 양들을 향하여 지금도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즉각적으로 우리는 그 음성임을 깨닫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6절] '돌이켜' 라는 이 단어는 [14절]에도 있습니다. 이는 한 번 돌아서서 이야기를 한 후 다시 앞을 보고 있던 마리아가 예수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두번째 돌이켜 보았음을 말합니다. 첫번째의 '돌이켜' 봄은 동산지기인 줄로만 알고 본 것이고 두 번째 '돌이켜' 본 것은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이 찾고 있던 예수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20:17] '나를 만지지 말라.' 이 말을 한글 개역성경 만을 보면. 그 자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금하신 것인지, 아니면 일어날 일의 가능성을 막은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원문으로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이는 현재 이미 진행되고 있는 행위를 금지시킨 것입니다. 여기 '만지다'는 '손을 댄다'라는 단순 의미이지만 그 원 의미는 '비끄러 매다' 즉 ‘서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매다’ 라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예수께서 자신을 계속하여 강하게 붙들고 있는 마리아에게 이제 그만 놓을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서는 안되기 때문에 만류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 28: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하는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여인들이 예수의 몸에 접촉하는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당시 마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찾던 예수를 만났으므로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꼭 붙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과 함께 이제 계속해서 있을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셔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육신을 지닌 채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승천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골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성령을 받으라 숨을 불어넣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현재에 집착하여 머물러 있는 그녀의 삶에 새로운 이정표를 알리기 위하여 ‘자신을 만지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현재의 만족에 머무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써 그분의 죽음으로 자신의 인생의 소망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요한복음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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