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6:1-11   <하나님의 영광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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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5장에 보니 1) 다윗이 여부스를 점령하고 산성을 건축하고 다윗성이라 했습니다. 두로 왕의 도움으로 돌로 된 아름다운 성을 건축했습니다. 2)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소식을 듣고 다윗을 치러 몰려 왔습니다. 골짜기에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묻습니다. 올라가리이까?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음성을 듣고 물을 흩음 같이 흩으셨다. 하여 바알브라심이라 하였습니다. 3) 또 블레셋 사람들이 골짜기에 가득 몰려왔습니다.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뽕나무 숲에 매복하였다가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공격하라 하십니다.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릴 때 블레셋 사람을 공격하니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이 늘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승리에 승리를 거듭합니다.


○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가져오는 일을 착수합니다. 삼만의 군사를 모읍니다. 모든 신하들을 배열합니다. 악대를 동원하여 노래를 부르고 나팔을 크게 울려 댑니다. 바알레 유다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가서 하나님의 법궤를 웃사와 아효 새 수레에 싣고 소를 몰고, 악대는 높은 소리 나는 제금과 나팔을 울리며 나아갑니다. 뒤에는 삼만의 군대가 칼과 창을 들고 왕을 호위하며 따라갑니다. 그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궤가 나아갈 때 환호성을 지릅니다. 다윗은 이 모습을 보며 마음이 들떴습니다. ○ 그런데 이 법궤가 나곤의 타작마당을 지날 때 사건이 생깁니다. 소들이 뛰었고 수레가 흔들렸고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그 수레를 몰고 가던 웃사가 그 법궤에 손을 댐으로 죽습니다. "웃사가 죽었다. 나님이 그를 치셨다. 분하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한 일이 아닌가? 성대하게 하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는데. 왜 하나님은 이 거국적인 행사를 망치시는가? 나는 백성들 앞에서 위신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모르시는가? 이런 하나님을 어찌 섬긴단 말인가? 하면서 분하여 합니다.


▶ 왜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셨을 까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하는 일을 기뻐하지 않으신 것인가요? 우연입니까? 1) 표면적인 실수는 하나님의 괘를 옮기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민4:15)에 보면, 법궤는 절대 손대면 안 되고, 레위인 고핫 자손들이 채로 꿰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합니다.  2) 좀 더 깊이 살펴보면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성공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의 신앙을 보이고, 자신의 위엄을 모든 사람 앞에 보이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괘를 다윗 성으로 모시는 거대한 행사는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는 거대한 행사를 통하여 모든 신하와 군대를 자신 앞에 세우고,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종교 행사를 자신의 정치적 힘을 모으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 다윗은 다윗 성으로 가져오려던 법궤를 가져오기를 두려워하여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놓고 옵니다. 버리고 온 것입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소식을 들으니까

[12절] "하나님의 궤를 인해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다윗이 보니 하나님의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머무는 석 달 동안 그 집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친 것입니다. 무슨 복을 받았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자식이 없었는데 자식이 생겼을 수가 있습니다. 병든 자가 병 자리에서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재산이 생각지 않게 큰 이득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고 살았을까요? 다윗이 버리고 간 하나님의 궤를 모시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말씀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궤가 그 집에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가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이 부러웠습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자신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복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도와주시고 사랑해 주셨는가?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복은 무엇을 해서 힘써서 공로가 있어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왕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1) 그는 집의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와 형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목동이었습니다. 2)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사울왕의 손아귀에서 건졌고, 3) 이방 블레셋의 땅에서 「미친 거지」행세를 할 때도, 구원해 주시고, 4) 좋은 사람, 좋은 장수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 5) 오늘의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 아닙니까? 이렇게 높여 주었더니 이제는 자기가 대단한 줄로 알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겠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 앞에서 선 것입니다. 

 

언젠가 훌륭한 한 교사가 있었습니다. 알파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고, 조직적으로 행정을 잘합니다. 많은 수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미국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사모님이 이런 말을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만하면 미국여행 할 자격이 있잖아?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말하고 자격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주의 일을 하기 전에 이미 충분한 은혜를 베푸신 분이십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고 칭찬과 명예와 대가를 원한다면 이런 사람은 은혜를 잊은 사람입니다.

장차 나를 평가하실 분도 하나님이시고 장차 내게 복을 주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자격과 평가를 받을 만한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드려 얼마나 많은 돈을 사용하여 내가 얼마나 수고하였는데 ‥ 나를 인정해 달라. 나에게 적절한 대우를 해 달라 한다면 교만한 모습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로 영광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통하여 이득을 얻으려 했습니다.

사람이 왜 넘어지고 사람이 왜 불만이 가득해집니까? 내가 나 스스로를 높여 사람들 앞에서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 하고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익과 권리를 주장할 때 불만에 쌓이는 것입니다.


◎ 어제 산행 중에 중간 휴게소에서 일이 생겼습니다. 두 사람을 태우지 않고 출발한 것입니다. 고속도로에서 멈추거나 차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뒤에 따라오는 다른 팀의 버스가 있어서 타고와 다음 휴게소에서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참 감사하지요? 그런데 뒷차에는 좌석이 없었고 고속도로에서 서서 오는 것이 발각되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 두 사람은  창피하게도 그는 버스 통로에 몸을 낮추고 올 수밖에 없었지요. 휴게소에서 만나 오는 내내 불만이 가득하여 화를 내고 사람을 나무랍니다. 어찌하든 다른 버스가 있었으니 감사하다고 하면 감사한 것이고, 창피하다면 창피한 것입니다. 왜 다툼이 납니까?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마음에 맞추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내가 부족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모든 것이 값없이 얻어진 은혜로다.”

 - D. L 무디 신앙이 성장하는 크리스천을 쉽게 분간해 내는 방법을 말했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말을 적게 하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평가를 작게 내린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떠 있는 자리에서 별은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에 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 어느 누구에게도 나 알아달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봉사를 하는 것도, 선교를 하는 것도 빚진 마음으로, 감사함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보수나 인정 지위를 바라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일꾼이 있지만 나를 인정해 주시고 나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白麗에게 약간의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모든 지원금을 단체에 내 놓았습니다. 아직도 단체를 생각해서 지원할 생각만 합니다. 내 몫을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내가 무엇 한다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한국에 많은 권사님들이 이름도 없이 보수도 없이 수 만 명을 전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들은 내가 목사보다 낫지 않냐? 더 많은 일을 하지 않는가? 인정해 달라 말하지 않습니다.


▶ 다윗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기뻐 찬양하며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영과 진리라 함은 혼을 다 한다는 것입니다.

[삼하6:12]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삼하 6:14-15]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시험에 합격했을 때. 취직이 되었을 때, 결혼 때, 돈을 많이 벌었을 때? 승진했을 때입니까? 금메달 땄을 때일까요? 이 모두는 세상이 주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다윗은 평생을 살면서 언제 가장 기뻤을까요? 골리앗을 때려눕혔을 때? 전쟁에서 이겼을 때? 왕의 사위가 됐을 때?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됐을 때? 내 인생에 가장 값지고 감사한 순간은 하나님을 알았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이것이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신앙인은 예배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배를 아주 소홀히 여깁니다. 예배를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배드리러 왔다가도 끝나자마자 달려갑니다. 약속을 해도 예배시간 끝나자마자 만나기로 약속을 합니다. 예배드리는 동안에도 몸은 여기에 와 앉아있는데 마음과 생각은 따로 노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사한 통계를 보니까 예배시간에 딴 생각하고 앉아있는 사람이 40%나 된다고 합니다. 졸고 앉아 있는 사람도 10% 정도라 합니다.

역사적으로 예배를 거부한 사람이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이 한결같이 예배를 거부하고 핍박하다가 결국에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히틀러가 독일교회로 하여금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강요하더니 끝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북한이 무지자들이 예배를 거부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말은 왕으로 취임하자마자 예배부터 드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예쁜 짓을 하면 은혜를 입고 복을 받습니다. ◇ 아브라함도 예배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동안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늘 함께 하셨고 그를 지키셨습니다. 다윗은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배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허리를 굽히는 행동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나를 낮추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는 표시입니다. 내가 드러나고 내가 인정받기에 급한 사람은 예배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라고 기쁨도 없습니다.


▶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 올 때 왕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춤을 얼마나 잘 추는지 모르지만 치마의 속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 사울왕의 딸이 천한 것 멸시합니다.

[삼하6:20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그것도 왕이 체통 없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때때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찬송할 때 박수를 쳐야 하나?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하나? 소리 내서 기도해야만 하나? 나의 체면과 사람의 인정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윗은 아마 하나님의 일이라면 춤추는 일 아니라 더한 일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는 외모를 꾸미지만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자신의 모든 껍데기를 벗습니다. 왕복을 벗어 버립니다. 왕의 권위의식과 인간의 면류관, 자신의 공로라는 인간의 모습으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 하나님 때문이라면, 내가 고난 받는 일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자신의 체면도 지위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삼하 6: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 다윗은 자기같이 초라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합니다. 주님의 일로 너 낮아지고 부끄러움을 당한다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오벧에돔을 통해 배웠습니다. 오벧에돔은 말없이 소문없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보는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 토론제목

나는 나의 기쁨을 구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가?

내가 드릴 수 있는 감사는 무엇인가?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혹은 다른 무엇?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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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가전서 5:1-11  < 빛의 아들, 낮의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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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5:2-5]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한국 국민소득의 5%가 성매매에 쓰인다 합니다.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쾌락의 대가로 소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온갖 범죄들이 생겨집니다. 거리에는 술집들이 문을 열고 몸을 파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사람을 기다립니다. 아마 밝은 대낮에는 부끄러운 모양입니다. 밤에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술집이나 댄스홀 같이 조명이 어두침침한 곳으로 사람이 몰려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어두침침한 곳에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곳 중에서 건전한 곳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일들은 항상 사람들이 모르게 뒷구멍으로 이루어집니다. 정치계, 경제계가 대 자본에 의해 놀아납니다. 학계, 언론계, 종교계, 체육계, 법조계 등을 막론하고 어두운 구석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부정과 부패, 불의와 거짓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사람의 죄가 밝혀지기 전에는 누구나 정의롭고 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좋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은 좋은 사람이다 좋은 면만 기억하여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 어두움의 일이 무엇입니까?  부정부패 음란만이 어두움의 일입니까?  영적 나태한 신자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5장]에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나태함에 빠져있었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삶, 하나님과 벗하는 삶이 아닌 세상과 벗하는 삶을 우리는 정욕대로 산다고 말합니다.


송나라 때 한 나무꾼이 신선 바둑 두는 것을 보다가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보니 도끼자루가 다 썩었더랍니다. 그리고 집에 와보니 머리가 백발이 되었더랍니다. 

바둑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는 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땅히 할 것을 해야 하고,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예고 없이 임합니다. 홀연히 임하여 자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각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가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찾아온다." 고 했습니다. 왜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 멸망이 임하는지 아십니까? 세상은 매력적이고 재미있고 중독성이 있습니다. 내가 인정받고, 나의 만족을 성취하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자기인생의 주인이 되어 정욕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주신 귀중한 시간을> 허황된 꿈에 허비하고, 나만의 육신적인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며 무절제한 생활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날이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만, 빛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습니다. 도적은 어두움에 거하는 자들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제일 먼저 빛을 만드시고, “좋았더라.” 했습니다. 만물이 자라고 그 색깔이 너무 곱습니다, 죄를 짓고 에덴을 떠나 [창4:20이하] 그들은 성을 짓고, 옷도 만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어떤 이는 음악에 재질이 있어,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고, 철을 만드는 조상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철이 만들어지고 더 좋은 낫과 칼도 만들었을 것입니다. 창과 화살도 만들었을 것입니다. 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신을 보호할 성을 만들어야 했고, 무기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야 하는 음악이 필요했습니다. 더 풍성한 수확을 위하여 철이 필요했습니다. 다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큰 성을 지었음을, 아름다운 옷을 만든 것을, 가축을 온순하게 길들였음을, 내가 음악을 잘한다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작은 수단, 외로움을 달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창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11:1-4]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노아의 후예들은 홍수가 임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바벨의 도시를 건축하고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생각과 원하는 대로 하늘에 닿도록 탑을 세웁니다. 벽돌 만드는 일, 성읍을 건축하고 탑을 세우는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1)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고자 한 것이고,

2) 인간들이 하나님처럼 자신들의 위대함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 사탄은 뱀의 모양으로 이브에게 찾아와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인가? 먹어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어 네가 더 많은 자유더 많은 기쁨을 얻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를 숭배하고 칭찬하고 앙망할 것이다. 네게 아무런 해 됨도 없을 것이다. 괜찮아! 말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상하게 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종국에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먹었으니까 그렇지!

그런데 이 사탄은 뱀의 모양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친한 벗을 통해서, 혹은 가족의 입에서 들려지기도 합니다. 아니면 사회와 국가의 강압적인 요구로, 달콤한 언어로 말하기도 합니다. 네 영혼을 나에게 팔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줄 것이다. 네가 풍족해 질 것이다. 행복해 질 것이다. 더 많은 자유를 얻을 것이다. 거짓의 아비 사탄은 인류를 속여 왔고, 똑 같은 방법으로 여전히 인류를 속이고 있습니다.


▶ 핵을 발견한 사람은 인류의 병 치료와 발전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진보입니다. ▶ 전기를 발명한 사람은 인류에게 어두움의 공포에서 자유를 가져다주고 편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전기가 없었더라면 세상에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등 아래서 밤새 작업하므로 인해 많은 사람의 삶에 규칙이 무너졌습니다. 마을에 있는 가로등으로 말미암아 농사가 망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고압전류가 흐르는 곳에는 백혈병이 많이 생깁니다.

▶ 컴퓨터의 발명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지식과 편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동시에 음란물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럽혀서 말로 다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핵도 전기도 컴퓨터도 위대한 발견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진정으로 인류의 행복을 가져왔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핵도 전기도 컴퓨터와 모든 과학의 성과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람에 의하여 쓰여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발명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합니다. 인생은 참으로 어리석고 허무한 존재입니다. 이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된 일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입니다. 이웃에게 도움 안 되는 일이고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유명인사가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남이 못하는 것을 하고 싶습니다. CEO, 박사, 교수, 정치가? 사람은 자신의 온 생애가 영예와 부귀 존경받는 일로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아름다운 생애를 꿈꾸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이 모든 세상의 옷을 벗어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나와야 합니다. 세상의 면류관을 쓰고 교회에 나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칭찬받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요 21:15]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지요? 그런데‘이 사람들보다’(다른 사본에는) ‘이 모든 것들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더 사랑하고 귀한 것이 있다면 이를 두고 성경은‘간음한 여인이여!’라고 말합니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영광 존귀를 스스로 취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서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부와 귀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앞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존귀하게 하는 일에 힙을 써야 합니다. 존귀와 영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구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존귀가 있을 것입니다.


[살전 5:8-9]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낮에 속한 사람의 삶>은 어떤 사람입니까? 잠자지 않는, 근신하는 사람입니다. 항상 말씀에 불순종할까봐 염려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하여 힘쓰고,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는 삶입니다. 다 똑같이 먹고 마시고 하는 가운데 다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여 사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북경에 출장을 간다 하더라도, 고객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홍콩에 여행을 떠난다 하더라도, 기차 안에서도 사막에서도 ‥ 내 마음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심령입니다. 사모하는 심령은 그날을 기대하여 깨었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창조의 마지막 날을 하나님께서 안식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제7일째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뒤에 우리는 주의 날을 지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이는 이 날을 “주일”이라고 해서 모이는 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늘 소망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장차 주와 함께 하는 부활의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누가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당신은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사업가? 교육자? 대학교수? 직공이라 말하겠습니까? 한 신실한 신자인 대학교수가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냐? 물을 때마다 나는 교수라고 말했다. 진정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일은 무엇일까? 어쩌면 아이들과 노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 나를 대학교수라고 말하는 것보다 아이 돌봄이 라로 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아니면 내가 정말로 많은 관심을 들이고 힘쓰는 일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이고 주일학교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아닌가? 앞으로 나의 직업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대하며 그 깊이와 섬세함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그러나 그 저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모습, 인간에게 영광을 돌릴까 두려웠던 까닭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나의 지식을 드려야 합니다. 나의 재물을 드려야 합니다. 나의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는 백성은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십시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믿는 백성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서로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형제가 환난에 처해 있을 때,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십시다. 이것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고 너를 위한 삶입니다. 바로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주의 날에 소망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討論

1.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

2. 나는 육신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가?

3. 나에게 아직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4. 주님 앞에서 신앙인으로서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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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1-18  <사랑받기에 합당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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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1:1-2]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나중에 사무엘의 아버지가 된 "엘가나"는 여기에서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 말은 에브라임 족속이란 뜻은 아니고 그가 에브라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는, 에브라임 지경의 성읍들을 기업으로 얻었던 고핫 자손에 속한 레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한나는 "무자하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당시 결혼한 여자가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지극히 부끄러운 일이었고, 자연히 한나는 그야말로 서럽고 한 많은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실로"에 있는 성소에 갈 때마다 자기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삼상1:4-8]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중에도 한나와 브닌나 사이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고 했는데, 참으로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대적"이란 '경쟁상대'란 뜻이며, "격동시키다"란 말은 '괴롭히다'란 뜻입니다. 자식이 없음으로 얼마나 죄인 되고, 얼마나 부끄러운지 견딜 수 없단 말입니다. 울며 먹지 아니하매 ; 사람은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포도를 먹고 싶으면 포도를 먹고 미술관에 가고 싶으면 미술관에 가야 합니다. 만족해야 하고 마음이 기뻐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학생들이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문제를 틀려도 고치려 하지 않고 알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또 틀립니다. 그리고 괜찮아! 한다면 ◎정상일까요?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의를 당한 사람. 고통을 당한 사람, 마음이 상한 사람을 보며 늘 지나칩니다.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환란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일상의 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아갑니다. 나의 운명이다.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무능한 사람이다. 할 수 없다 하면 그만입니까? 하나님이 가난해도 만족하고 자족하라고 했습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서 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내가 지족하기를 배웠노라. 궁핍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무엇이 좀 다릅니다.


왜 하나님은 성경에서 지족하라! 만족하라! 하십니까? 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까? 1)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2) 더 중요한 일 더 값어치 있는 일에 네 자신을 쏟아 부으라. 는 의미일 것입니다. 안 먹어도 되고 안 입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되는 대로 먹고, 되는 대로 마시고, 되는대로 입고, 되는 대로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며 사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너무 우리자신을 저평가 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나는 모든 사람의 앞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존경받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는 비방을 듣기도 했습니다. 만족과 즐거움 없이 어떻게 주의 일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한나가 저렇게까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아이를 두고 그렇게까지 분해해야 하나?  속상해 할 필요가 있을까?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다 살수 없을까요?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어디 있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엘가나가 말하지요 아이가 없어도 된다. 괜찮다. 너도 가질 만큼 가졌다 말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제물의 분깃"이란 것은 화목제를 드린 후에 제사 드린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음식을 말합니다. 엘가나가 아마 더 맛있는 것을 골라서 주었을 것입니다. 한나에게 특별히 더 많은 사랑을 주었는데, 한나가 좀 심하다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요? 육신의 것을 구하는 것은 아닌가요?  인간적으로 경쟁하는 것입니까?

놀라운 사실은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렸다는 것입니다. 

[삼상 1: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한나의 요구는  “ 나에게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는 산해진미를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재산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의 위로에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적인 삶을 원하고 나는 내가 고난 받는 이유나 알자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를 알려 달라" 이 것입니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한나가 요구하는 것은 나의 수치를 씻어달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며느리 다말은 억울하게 쫓겨났습니다. 참 너는 복도 없는 여자다. 너는 참 재수 없는 여자다. 야곱이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냈습니다. 다말은 그렇게 끝날 수 있었습니다. 다말은 이렇게 일생을 마칠 수 없었습니다. 


▶ 구해야 합니다. 그녀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모든 고통의 원인도 해결자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고통을 브닌나와 한바탕 싸워서 해결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 억울함을 남편 엘가나에게 원망하거나 바가지를 긁어서 해소하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써 하나님께 탄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의 정말 지혜로운 대응입니다.

[약 4:2]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승리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쫓아내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기도의 무기를 우리의 손에 쥐어 주셨다. 기도하기만 하면 쫓아 낼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진연자매가 예배장소를 찾으러 갔습니다. 단시간 안에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여러 집을 보아야 하리라 생각하고 자전거를 준비하라고 했답니다. 지금 이사하는 집이 많아 가장 비싼 시기이고 물량이 적은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첫 번에 만나게 하셨습니다.


▶ 기도하기 위하여 우리는 대가를 지불하여야 합니다.

[사무엘 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 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바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이 여전히 자기만족을 끈질기게 추구하기 때문이다. 기도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십자가에 직면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자명종 소리로 부터 시작한다. 한 시간만 더 나태하고 구속되지 않는 나의 시간을 원합니다. 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기도한다는 것은 또하나의 자기를 부인입니다.

[히브리서 5:7]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한나도 처음에는 자기만족 자기중심적 기도만 드렸을 것입니다. ‘주여, 저에게도 아들 하나만 주세요. 그저 아들 없는 서러움만 해결해주세요. 저도 아들을 낳은 여자라는 한풀이를 해주세요.’ 그러다가 한나의 기도는 목적기도로 바뀌어 집니다.

- 한나의 다음 기도는 그저 슬픔 중에 통곡하는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서원이 담긴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만일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는" 나실인으로 삼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어두운 역사 속에서 민족과 사회를 위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 저는 북한 땅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 저는 자신의 자식을 위하여 금식기도하고 100일 작정 철야 기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작정기도는 하나님이 잘 들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셔야 합니다. 풀어지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여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오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 1:12-14]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시 동안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한시 동안’은‘한 시간 동안’이란 말도 됩니다. 한 시간 기도가 처음부터 쉽지 않습니다. 교회 나오신지 얼마 안 되는 분들과 기도에 훈련되지 못한 분은 하루에 15분 동안 기도해 보십시다. 15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좀 훈련이 되신 분들은 30분 기도해 보십시다. 지금 30분 정도 기도하고 있는 분들은 1시간 기도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1시간 이상 기도하도록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 집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나가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않는"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술 취해 있다고 단정을 내렸습니다. 그 기도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똑똑하고도 분명한, 하나님과의 영적 의사소통이었습니다.


[사무엘 1:17-18]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그처럼 자기를 사랑해고 위해 주던 남편조차 달랠 길 없던 슬픔을 당하고 있었던 한나가 그날 기도드린 후에 엘리 제사장이 "평안히 가라"고 축복의 말 한 마디에 평안을 얻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비록 문제 많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심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는 참 둔하고 부족한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엘리 제사장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 하고 문제 많은 제사장이었지만

한나는 제사장의 말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은혜" 입혀 주실 것을 확신하고 기쁨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1. 한나는 자신의 만족과 의식주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받는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알기 원했고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지 않았음을 알기 원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찾고 조국과 세계를 살리는 일에 쓰이는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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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1:6-18  <기회와 선택>   201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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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베들레헴에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곳에 살던 엘리멜렉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풍족한 재산이 있었지만 더 안전하고 풍족한 삶을 찾아 간 것입니다. 이는 신앙에 따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모압 지방에 와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자 나오미는 모압 여인 둘을 취하여 두 아들을 결혼시켰습니다. 두 여인의 이름은 오르바와 룻입니다. 이들이 모압에 거한 지 십년쯤 되었을 때 두 아들이 죽게 됩니다. 가산은 기울고, 이제 남편과 두 자식이 죽고 자신을 포함한 세 과부만 남았습니다.

베들레헴에 다시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녀는 베들레헴 길을 결단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짐을 쌉니다. 고향에 가면, 나오미는 실패한 삶의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내가 성공해서 돌아갈 때 그렇습니다. 실패해서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이는 참으로 쓸쓸하고 비참하며 그것처럼 부끄러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나오미를 보며, “네가 나오미 아니야? 이게 어찌된 일이야? 이민 가서 잘 산다고 들었는데, 남편은? 애들은? 여기 같이 온 색시는 누구여? 잠시 다니러 온 거여? 아니면 살러 온 거여? 물었을 것입니다. 어디론가 숨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참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가고자 한 것은 단지 고향에 흉년이 그쳤다고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믿음의 고향으로 가기로 한 것은 바른 신앙의 삶의 결단이었습니다.

[룻1:19-21]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나오미는 과거 이스라엘 땅에 있을 때 평소 이웃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베들레헴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모든 사람 앞에서 인정하는 사람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나오미는 그들에게 나를 나오미(기쁨)라 부르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부르라고 했습니다. 이 뜻은 슬픔과 고통입니다. 나오미는 마라의 고통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죄인지 구체적으로 그 명목을 밝히지는 않지만, 나오미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회개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겪는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모압으로 이민 가서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다. 이민 갈 때에는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신 것입니다. 고난도 실패도 자신이 모압 땅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것도, 아무것도 없는 털털이가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 바른 신앙의 길을 가지 위하여 정리하여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며느리들입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두 며느리와의 이별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두 자부는 그녀에게 유일한 힘과 의지입니다. 두 자부마저 잃는 다는 것은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녀는 신앙의 길을 선택합니다. 지금 가고자 하는 베들레헴 길은 더 험난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자부들은 자신 때문에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난 날 나오미가 모압 땅에 오게 된 것은 자신의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의 결정이었습니다. 결혼 이전에 신앙 안에서 자랐고 신앙으로 살기 원했다 할지라도 결혼 후에 그녀가 모압으로 올 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나약한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그 결과 남편의 의향대로 그녀가 원하던 원치 안 하던 세상 부귀를 좇아 살아야 했습니다. 결과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졌습니다. 축복도 저주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고 그들 스스로의 인생을 살도록 놔주고 싶었습니다. 며느리들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의 인생을 물 흐르는 대로 맡겨서야 나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떠나라!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돌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때 두 자부가 소리 높여 웁니다. 먼저 오르바는 나오미의 거듭되는 권면에 울면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사실 오르바도 착한 며느리였습니다. 그녀도 날마다 나오미와 더불어 성경을 보고 기도하고 찬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최종적인 선택은 자신의 더 쉽고 편해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또 말합니다. "너도 동서와 같이 네 고향 네가 믿는 신에게로 돌아가라" 그러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잡고 따라갑니다. 여기에서 택함 받은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의 갈림길이 나옵니다. 믿음은 선택이며 순종입니다.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에게 있어 모압은 자기 고향이요, 친정이 있고 자신의 생활 풍속이 익숙한 곳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모압을 떠나는 것이 그녀에게 밝은 미래를 가져다줄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더 이상 기대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하죠, 늙어 몸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처지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 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결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과감하게 고향을 버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 룻의 믿음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 믿음의 근원은 엘리멜렉도 아니요 그 남편 말론에서 배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여인 룻이 존재하기 전에 먼저 믿음의 어머니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신앙은 선택입니다. 세상의 길도 선택이고, 신앙의 길도 선택입니다. 【의와 진리】를 따른다 함은 내 눈에 보이는 이익에 따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식대로 믿음으로 행한다.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도 잃고 자녀들도 잃었고 재산도 다 잃었지만, 그녀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

1)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힘쓰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남편을 따라 이방 땅에 와서 하나님을 멀리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음이고,

2) 또 하나 나오미가 얻은 것은 신앙 있는 며느리 롯입니다. 지금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딸 룻을 얻었습니다. 훗날 베들레헴 여인들은 이 룻을 가리켜 일곱 아들 보다 귀한 자부”라고 하였습니다(4:15).

나오미의 깊은 고난과 슬픔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에 이민 가서 성공하였더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룻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와 룻이 돌아온 시기는 적절한 시기입니다. 베들레헴에 와서 이 룻은 시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서 이삭 줍는 일을 하게 됩니다. 물론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 젊은 여인 룻이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아주 수치스럽고 비참한 일이었고 열대 지방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 소망을 드러내십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나오미의 슬픔을 치유하십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나오미를 위하여 복을 예비하셨습니다. 언제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치유하시기 시작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순간에 하나님은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네 삶을 나에게 맡겨 버려라. 그리고 나와함께 다시 시작하자.” 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출발하지만 하나님은 그녀에게 좋은 만남을 주십니다. 보아스라는 유력한 사람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룻2:3]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우연히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룻이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습니다.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룻을 통하여 귀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고 룻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밭의 일꾼들에 하나님의 복을 빌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베들레헴 모든 사람의 복의 근원이고, 만족과 기쁨이 되는 사람입니다.

보아스는 일꾼들 사이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룻을 발견하고서 이는 뉘 소녀냐? 고 묻습니다. 보아스가 하찮은 시녀에 불과한 룻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찮은 죄인인 나에게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냥 지나쳐도 될 것을 굳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룻에게 보아스를 만나게 해주셨고 그의 아내가 되게 했고, 장차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는 여인이 됩니다.

★ 우리의 신앙의 삶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기회선택입니다. 당신이 바다서핑을 즐기기 원한다면 바다로 가야 합니다. 아무 때나 바다에 간다고 파도를 탈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파도가 오는 계절에 바다에 가야하고 파도가 오는 시기를 맞추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원한다면 은혜의 자리에 가야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지금이 은혜의 시기입니다. 지금이 기회의 때입니다. 선택을 위하여 때때로 위험이 있기도 하고 희생이 있기도 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안일함에 자신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 모든 [萬事는 人事]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놓치지 마십시오.

1) 여리고성의 라합은 정탐꾼들이 왔을 때 그들을 목숨으로 보호하고 구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2) 여리고 성문에 있던 장님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지나가시는 때에 많은 사람의 방해와 꾸지람에도 큰 소리로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눈을 뜨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3)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의 감동에 모든 것을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은혜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에게, 과감한 선택을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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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6:11-16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삿 6:3-5]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 사람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서 메뚜기 떼 같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약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6절)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편없이 약합니다. 농사지으면 다 빼앗기고 양과 소도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의 우리의 영과 육을 상처를 내고, 파괴시키고, 죽게 하며 가정을 파괴하는 적들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모든 이가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나서서 싸울 사람,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에는 "기드온"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쓰시고자 사자를 보내십니다. [삿6:12]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사실 기드온은 대단한 용사가 아닙니다. 한 작은 지파에 속한 가족의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에 불과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를 큰 용사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고, 하나님은 기드온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뜻이 계셨습니다.

사실 기드온에게 "큰 용사" 라는 말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용사도 아닙니다. 자신이 용사고, 아니고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오로지 관심사는 ‥‥

[삿 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우리의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불행이 닥친 것입니까?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구해 주시려면 언제든지 구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 투덜거리지요. 좀 일찍 하나님은 나의 가정의 문제를 풀어주실 수 없었는가? 꼭 이 지경까지 이르러야 하는가? 하나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

[삿 6: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삿 6:15]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삿 6: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아무리 물어 보아야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설명해야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는 가서 <네가> 가서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이 말은 '너의 힘은 곧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너의 힘이 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힘을 의지하고 일어나면 지금 무엇이 두렵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이 말씀을 아직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적과 싸우려면 하나님이 내게 큰 군사를 보내 주시는지 큰돈을 주시는지 뭔가 구체적인 방책을 보여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드온이 여전히 못 알아듣자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있습니다.

큰 용사는 나에게 재산이 많고, 지식이 많고, 재능이 많아서, 배경이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참 큰 용사는 세상에 기댈 아무 것도 없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되는 것입니다.

미디안, 아말렉과 전투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모여 들었습니다. 32,000명이라는 많은 숫자가 모여듭니다. 그러나 아말렉과 미디안 군사들에 비하면 많은 숫자가 아닙니다. 저 미디안과 아말렉 군사들은 바다에 모래처럼 많아, 골짜기에 진치고 있는 저들의 모습이 메뚜기 떼와 같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삿 7:2,3]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더라.

 

우리는 사업을 할 때도 적은 자본보다는 많은 자본이 더 유리 하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적은 수보다는 많은 수로 일하기가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일을 할 때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효율적이다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전쟁을 할 때는 많은 인원과 우수한 장비가 충분히 동원되어야 승리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먼저 돌아가라 하십니다.

1) 왜 하나님이 수다한 이스라엘 지원병들을 그대로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 자기 자랑 않게 하시려고, 자기 힘으로 이루었다고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

미국 대통령 선거 때의 일입니다. 어떤 한 사람의 소감입니다. 이 선거 과정에 있어서 투표가 되기 전에 이제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 고어와 부시의 토론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렇게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두 사람의 토론이 시작되면 전세는 압도적으로 고어 쪽으로 기울 것이다. 토론은 고어가 일방적인 게임으로 승리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재미나는 것은 토론이 끝나고, 미국에 청중들을 대상으로 당신들이 투표할 때 고어를 투표 하겠는가? 그에 대해서는 반반 비슷하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토론은 압도적으로 고어가 이겼다고 하는데, 찍을 때는 사람들이 비슷하게 나온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 좀더 조사를 해 보니까 고어가 너무나 말을 잘하니까 얄밉다는 겁니다. 부시는 좀 뭐가 모자라는 것 같아 오히려 호감이 간다는 거죠. 사람들은 잘나고 유능한 사람을 좋아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는 사람들을 그는 자기의 부족을 알고 엎드리는 겸허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잘나고 못나고 를 보시지 않습니다.

먼저 전쟁을 두려워하는 20,000명이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수한 두려움들이 늘 찾아옵니다. 건강의 두려움‥‥, 노년의 두려움‥‥, 경제의 두려움‥‥, 세상 환란의 두려움‥‥, 사고의 두려움 ‥‥ 있습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하나님을 떠난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함에 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내 안에 믿음이 없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고,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방해하는 사탄이 가져다주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경각심을 가지고 물을 마실 때도 신중한 300 명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전쟁에서 소집된 32,000명 중에 31,700 명은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겨서 미디안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합니다.

☆ 다들 떠나고 300 명만 남았습니다. 또 여기서 선택된 기드온의 300명 용사들은 자긍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온전히 드린 헌신의 사람들 이었습니다. 왜 우리들만 남아 싸워야 하느냐 묻지 않았습니다. 우리 300만 남아서 싸울 수 있겠는가 두려워하거나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분의 방식대로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내 부족함을 알고 또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하나님을 의뢰할 줄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겸손하다고 그래서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부족함을 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또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자기의 연약을 알기에 자기의 부족을 알기에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 함은 자신의 방식과 생각을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의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고,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유일한 힘과 소망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자‘디엘 무디’는 모세의 일생을 세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모세가 모두 몇 년 살았죠? 120년, 그것을 세 단계로 나누면 처음 40년 중간 40년 마지막 40년,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세의 처음 40년 애굽의 궁중에서 왕자로 자란 40년입니다. 처음 40년 왕궁에서 모세는 자기가 굉장한 인간인줄 착각 하면서 살던 때입니다. 두 번째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의 시간입니다. 광야의 삶 속에서 모세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처음에 나는 굉장한 인간일 줄 알았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볼수록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아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이 모세보고 ‘너 겸손해 졌구나! 내가 너를 붙들어서 쓰겠다. 너 내 백성을 이끌어내라’ 하십니다. 모세는 너무 겸손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 이제 못해요. 아무것도 못해요 정말 못해요. 전 말도 어눌하고요. 이 백성을 설득할 수도 없어요. 비로소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애굽으로 갑니다. 결국 그는 남은 일생을 하나님께 드려 순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사기7:9]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2) 하나님은 우리를 파송하시고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300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밤에 일어나 네 적진을 치라. 내가 그 적들을 네 손에 붙였다. 기드온은 말씀을 믿고 따릅니다.

(놀라운 사실은) 따르는 자들도 그의 말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순간 그들 300명은 강한 군사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정병은 자기의 연약을 깨닫고 엎드려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 순간이 가장 강해지는 순간입니다. 바울은 내가 약할 때 나는 참으로 강하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한 찬송가; 부흥사 DL무디 목사의 그 유명한 찬송가 인도자였던 생키(大卫·孙盖)가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신문에 그의 사진을 자주 본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 분의 작곡인'선한목자 되신 주여'를 불러달라고 졸랐다. 생키가 그 찬송가를 부르기를 마치자 한 사람이 다가 왔다. "생키 성생님, 남북전쟁 당시 북군으로 참전한 일이 있습니까?"

"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남군으로 참전했는데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북군의 파란 복장을 입고 있었고 그날 밤이 만월이었는데 제 사정거리 안에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겨냥해 방아쇠를 막 당기려고 하는데 당신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밤에 부른 그 찬송이었지요. 그런데 제 어머니께서 그 찬송을 자주 부르셨거든요.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도저히 당신을 쏠 수가 없었습니다." 생키는 너무 감격하여 자기의 옛적을 품에 힘껏 끌어 앉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방패시라 내마음이 그를 의지하니 그가 나를 도왔도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크게 기뻐하고 내가 내 노래로 그를 찬양하나이다(시28:7)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위로부터 주시는 하늘의 힘을 함께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살고 죽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과 드림이 없이 새로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드온과 300 용사는 전쟁을 경험한 일도 없었고 군사 훈련을 받아 본 일도 없는 농부였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나팔과 빈항아리 그리고 횃불이었습니다. 항아리를 깨트린 것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나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횃불을 들고 흔든 것은 어둠의 세력을 내쫓고 광명천지를 만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숫자로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함으로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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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13:1-10 <연약함을 통한 능력> <我们软弱,你们刚强> 2012. 9. 9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믿음에 있는지 시험하여 확증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확신이 있는가?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자세히 살펴서 그 믿음을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확신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함께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책을 들고 교회를 수없이 다니고, 성경을 외우고, 묵상하고, 많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의 삶 속에 예수가 계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있는지 시험하여 확증해야 할 이유는 아직도 은혜 가운데 거하지 않는 자입니다. 아직도 죄로 말미암아 주의 얼굴을 뵙지 못한 사람 얼굴에 수건을 덮은 사람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많은 성도들이 이런 <내적 체험>이 없는 피상적인 신앙인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때는 그리스도 안에 어느 때는 그리스도 밖에 사는 사람은 참 위험한 사람입니다. 혹시 환란이나 어려움이 생긴다면 떠나갈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내적 체험> 이 없는 피상적 신앙의 사람은 데마와 같이 세상으로 다시 나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 자신이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성경을 잘 알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실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과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마지막 천국 문 앞에서 나는 너를 모른다 하다면 참으로 슬픈 일일 것입니다. 》

오늘날 세상의 불신자나 믿는다는 사람이나 겉모습을 보고 믿음이 있다 없다. 평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물질과 성공입니다. 똑같이 교회 안에서도 많은 사람의 추구하는 것이 강한 자,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여전히 강한 자, 영향력 있는 자로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강함과 부귀가 그들의 축복의『평가기준』믿음의 『평가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믿음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 반대로 내가 사업이 안 되니‥‥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 내가 대학을 못 갔으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 내가 병에 걸렸으니‥‥ 나는 하나님께 버리운 자가 아닌지 의혹이 듭니다.

사람들은 강해야 힘이 있다고 하며, 강한 자, 능력 있는 자, 힘 있는 자가 되기를 추구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은 나의 약함을 통하여 강하게 역사(役事)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약함이 도리어 강하다는 것은 분명히 역설(逆說)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고후 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에게는 육체의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육체의 가시는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서 기도했습니다. 세 번째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대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응답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니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는 강건함을 원하지만 이상하게 하나님은 우리를 연약한 가운데 두십니다. 바울에게 고난을 준 이유는 그로 하여금 자고하지 않도록 즉 교만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나름대로 일생 수많은 가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가시가 되고, 어떤 분은 부인이 가시가 되어서 일생을 찌르고, 어떤 부모는 자식이 평생의 가시가 되어 찌르는 괴로움을 당합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정말 멋있게 살 텐데 ‥‥

병들면 사람이 약해집니다. 아무리 돈 많은 사람도 병들어 누워버리면 한없이 약해집니다.

사람이 호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사람이 약해집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으면서 열심히 일 했건만 사업에 실패를 하고, 회사에서 실직을 당하면 사람이 약해집니다. 고민하고 낙심하고 심지어 절망으로 자살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알고 보면 사람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과거의 자신 처지를 생각하며 약해지고 미래의 불안으로 약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고난은 고난일 뿐이요, 실패는 실패일 뿐입니다. 단지 별로 도움 되지 않는 것,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고난이 더 큰 축복이 되고, 실패가 더 큰 성공이 됩니다. 질병의 아픔이 더 큰 위로와 감사가 되기도 합니다. 모든 조건이 좋고 넉넉하다고 해서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좋다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때때로 하나님은 넉넉하지 못한 환경,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들어서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약한 것도 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은 약점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약점을 하나님께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로 운보 김기창 화백이 있습니다. 이분은 여덟 살 때 학교 운동회 날 장티부스에 걸려 죽을 뻔했으나 어머니의 지극한 간호로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높은 열로 인해 청신경 마비를 가져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후천성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습니다. "듣지 못하면 울부짖고 싶고 아무거나 때려 부수고 싶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터질듯 한 가슴의 응어리들을 그림에 쏟았어요. 지금은 내 자신이 귀먹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때가 있어요. 귀가 들렸다면 오늘의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고통도 없지 않았지만 폐쇄된 소리의 공간이 있었기에 한 작업에 몰입, 집중할 수가 있었어요.‥‥"

이분이 귀머거리 된 것은 개인적인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이 고통을 통과하는 중에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이 주신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했고 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라는 한 연약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약한 것 보기 싫은 것들이 더 귀하게 쓰이는 때가 있습니다.

한 마리의 사슴이 있었습니다. 숲속 우물에서 물을 마시려 우물을 보니 우물 속에 자기의 모습이 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에 붙어 있는 뿔이 그렇게 멋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의 뿔이 너무 잘 생겼습니다.

그런데 눈이 아래도 내려가다가 털이 숭숭난 다리가 보입니다. 빼빼한 다리, 볼품이 전혀 없습니다. 사슴은 눈을 감았습니다. 어떡하다가 이런 발을 갖고 살게 되었는가, 발이 너무 보기가 싫었습니다. 차라리 발을 없었으면 더 멋져 보일 것 같습니다. 그때 사냥꾼이 자기를 향하여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슴을 있는 힘을 다하여 달아납니다. 그때서야 다리가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뿔이 나무에 걸렸습니다. 사슴을 발버둥을 쳤지만 사냥꾼이 달려와서는 이내 자기에게 그물을 씌웁니다. 그때 사슴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이 뿔만 없어도 사는 것인데,”

약한 것이라고 무시하고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약한 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약함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에는 하나님의 기막힌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 없고 상처와 아픔만 주는 것 같았는데 이 모든 것을 합해서 보면 모두가 빠질 수 없는 것,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계를 느끼고 좌절할 때마다 기뻐해야 합니다. ◎ 전복이 진주를 만들듯이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축복받는 계기로 만드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가 가난을 잘 극복하면 가난은 큰 재산이 되지만 가난으로 말미암아 거지근성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병을 극복한 사람은 건강의 중요성을 알아 더 건강한 사람 장수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하늘의 부요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평생에 끊임없이 남에게 빌리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처음 묵으신 곳이 바로 남의 집의 구유였고, 설교하시기 위해서 타신 배도 그랬고, 타실 짐승과 최후의 만찬을 베풀 다락방도, 마침내 장사될 무덤까지도 빌리셔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순종과 헌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약한 주님이십니다.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자신의 만족 자신의 선택에 대한 포기입니다. 공생애 내내 죄인이라 칭함을 받으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굴욕을 받으시고, 버린바 되었습니다.

⁋ 고린도 교회는 파당을 나누고‥‥서로를 비방하고‥‥사도바울의 사도 권까지‥‥의심합니다. 그의 사역의 진실성을 비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교훈할 자격이 없다고 까지 말합니다. 바울은 말하는 것이 왜 그러냐? 영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면 왜 질병이 있는가? 바울과 그 동역者들은 거짓 사도다.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약함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이 약함을 취하지 않고 강해지려 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딤전 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나님 앞에 한없이 약해진 바울의 모습입니다. 大使徒 바울이 왜 이렇게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을까요? 이방세계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아시아와 유럽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위대한 大使徒이지만 신자들 앞에서 취했던 겸손과 낮아짐. 이것이 복음전도자 바울의 모습입니다. 내가 약할 때 내 안에 주님은 강해지는 것입니다.

● 19세기 중국선교의 아버지이며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위대한 거인들은 모두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고 말했습니다.

●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자신의 입장을 세우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 또 사람들에게 부끄러움과 멸시를 당할까 두려워합니다.

현대 하나님의 동역 者들에게서 필요한 것은 약함입니다. 모든 전도자와 목회자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멸시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함을 숨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약함을 통해 약한 자를 구원합니다. 약함은 복음의 통로입니다.

<내적체험>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얼굴로 만나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 만왕의 왕 진실로 나의 목숨을 드릴만한 가치가 있는 분입니까? 全能하신 하나님, 無所不在하신 하나님, 無所不知하신 하나님, 無所不能하신 하나님이십니까?

<내적 체험>이란 예수님과의 진실한 만남을 말합니다. 나의 약함 속에서, 나에게는 구원의 아무런 가능성도 없을 때 찾아와 주시는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 초대교회 교인들은 만유의 주되신 것을 알았기에, 영원한 생명의 주되신 無所不能하신 주님을 알았기에, 기꺼이 부모와 친척에게 버림받는 것을 담대히 받아들였습니다. 순교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함과 많은 소유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되신 주님입니다.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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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3:1-13 <사랑은> <爱是> 2012. 9. 2

모든 사람이, 정말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사람이 언제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면 병이 듭니다.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하였다고 하여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고 산다면 그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사랑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충분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내가 온 우주의 중심이었고, 내가 남을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부터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자, 구원 받은 자 되어 삽니다. 내가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하나님 안에서 받았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참 소중하구나!’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다 귀한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을 원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사랑에 서툴다는 것입니다. 보통 서툰 것이 아니라 치명적으로 서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은 대개가 자신이 사랑에 관하여 치명적으로 서툴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에 대하여 치명적으로 무지합니다.

최근의 일입니다. 한 가정에 고등학생이 게임에 중독되어 돈을 훔치기도 하고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하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평생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할머니에게 맡긴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괜찮다 나이 들면 다 고쳐진다. 자신의 손자에게 조금도 혼내지 못하도록 막아섭니다.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잘 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행복하려면 사랑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랑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자녀와의 관계 달라지고, 부부관계가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세상의 교회를 향한 인식이 달라질 것입니다. 전도의 문이 열려질 것입니다. 행복해 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훈련해야만 합니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람들이 사회적인 능력과 경제적인 능력을 갖게 되면서부터 점점 참을성이 없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능력과 경제적인 능력이 없을 때에는 웬만한 일을 당하여도 참을 줄 알았습니다. 다른 살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집살이가 힘들었어도 쉽게 이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이혼한 여자가 살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고 살다보니 좋은 날이 오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가정을 지키셨습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온유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친절하다’(kindness)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친절이라는 말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유용한’, ‘쓸모가 있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투기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고 힘이 되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끊임없는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것 자체가 긍휼과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고난과 핍박을 가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증오의 감정도 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들을 선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못 박고, 조롱하였지만 주님은 악한 병정들에 대하여도 군중을 향하여도 저희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유익은 일체 포기하고 죄인의 이름을 들으며 우리에게 친절한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리말에 ‘뻐개다’라는 (扬扬得意)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 사랑은 이러한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장로가 미국의 딸네를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나이아가라(尼亚加拉) 폭포 앞에서 찍은 사진 그랜드캐년에서 찍은 사진,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자기 자녀의 학비를 내지 못한 장로가 근심 속에서 있었습니다.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rude) 본데없이 자란, 버릇없는, 날것의, 가공하지 않은, 미완성의, 소란스러운, 교양 없는, 무교육의, 미개의, 야만의, 거친, 울퉁불퉁한, 단단한, 돌연한, 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무례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어쩌면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무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더 높이는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위아래 질서를 중요시하고 인륜을 따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였지만 지금 시대는 너는 너, 나는 나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돈 있고 지위 있는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무시하는 것도 무례입니다. 그리고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탄압하는 것도 무례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신 것은 함께 나누어 쓰고 없는 자를 도우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조금 가졌다고 없는 자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내치십니다. 권력으로 탄압하는 자도 그렇습니다.

내가 아버지라고, 어머니라고, 내가 힘이 있다고, 조금 안다고, 조금 있다고, 조금 도와준다고,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물질을 주시고, 재능과 지식을 주신 것은 사람들을 주장하고 지배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돕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축복하셨습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내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통제 불능의 아이들이 나옵니다. 울고 떼쓰고 폭력적이고 하는 아이들을 보면 저도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는 벌써 게임 중독에 걸려서 하루 종일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통제 불능 문제 아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엄마 아빠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해서 엄마 아빠의 진심을 잘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와 같은 중독 증세를 보이는 심각한 아이들도 엄마 아빠가 함께 놀아주고 말과 말투를 바꾸고 사랑을 표현해 주면 정말 신기하리만큼 아이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것 같은 아이들이 전문가의 도움으로 별로 어렵지 않게 아이들이 달라집니다.

목사님의 아들이 대학교 2학년 때 귀걸이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경험으로서는 그것을 용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함부로 아이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모르기는 해도 아이도 나 때문에 귀걸이 하고 싶은 것을 참다가, 참다가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이가 참았다면 나도 참다가 말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참다가 이야기를 해도 내 의견을 이야기하고 권할 뿐이지 절대로 폭력적으로 그것을 떼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둘째와의 사이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사랑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그가 아무리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였다고 하여도 그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절대로 그의 인격을 건들거나,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욕을 하거나 성을 내는 것 큰 소리 내는 것 이 모든 것이 폭력입니다. 물리적인 폭력만이 폭력이 아닙니다. 언어적인 폭력도 폭력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물리적인 폭력 못지않게 언어적인 폭력도 살인적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계시록 3:20절]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고 싶으시면 그냥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노크를 하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하여도 함부로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氷占) 著者 미우라 아야꼬(三浦 綾子)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자기 아내가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안쓰러운 마음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 되는 것은 좋지만 이 주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다 어려운 사람들인데 우리가 잘되므로 다른 구멍가게들이 안 되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부인이 그것을 깨닫고는 곧 시정하여 자기의 가게의 물건을 줄일 뿐 아니라 어떤 물건은 아예 갖다 놓지도 않았답니다. 그렇게 하여 손님들이 없는 물건들을 찾을 때에는 그 물건은 저 가게에 가면 있습니다. 하고는 손님을 보내주었습니다.

● 나누어야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柳根哲 박사가 카이스트(KAIST) 교정을 걸어갈 때면 여기저기서 “안녕하시죠?”라는 웃음 띤 인사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 뛰어와 꾸벅 인사를 건네고 가는 이들도 많다. 그의 연구실 겸 헬스 클리닉 복도에 걸린 게시판에는 “할아버지, 사랑해요”, “교수님은 저의 빛이에요”와 같은 학생들의 애정 어린 문구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건 2년 여 전 개인 기부자로서는 사상 최대 금액이라는 578억 원을 기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평생 의술과 인술을 아낌없이 베풀어 왔고, 또 그저 돈이라는 ‘물질’만이 아닌 마음과 사랑을 꾸준히 기부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한의학자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병원 자리로 구입한 땅이 천정부지로 값이 뛰기 시작하면서 많은 부를 가지게 되면서부터다. “재산이 100억 원이 되고 200억 원이 되었을 때는 내심 좋기도 했죠. 그런데 300억 원이 넘자 덜컥 무서워지더군요. 돈에 귀신이 붙은 것인가 싶기도 하고, 결국 이건 내 돈이 아니다고 생각하기로 했죠.” 그래서 선택된 곳이 바로 카이스트다.

“옛날에는 총과 군대가 그 나라의 국력을 말했지만 이제는 과학이 그 나라의 국력을 말해주는 시대잖아요. 전 우리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학생들이 100만 명, 1000만 명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최고의 과학자가 되길 바라죠. 그래서 카이스트를 선택한 것이죠.”

전 재산 기부에 그치지 않고 평생 모아온 1000여 점에 달하는 각종 골동품들을 모두 카이스트에 기증하는 한편 사비를 들여 교내에 조각공원을 만들어 공부에 지친 학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게다가 연구실에 헬스 클리닉을 마련해 아프고 병든 학생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등 의료 기부를 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그의 연구실은 여느 교수 연구실과 달리 유난히 많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가진 사람이 나눠야 행복한 세상” “재산·기술·마음까지 기부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그의 이 같은 아낌없는 나눔 정신은 모두가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정서적 유산이다.

어린 시절 그의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너무 가난해서 보리쌀 한 되만 있으면 다닐 수 있는 서당 한 번 다니지 못했을 정도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 중에서도 어머니는 늘 베풀고 사셨다. “거지가 오면 당신이 한 끼를 굶을지언정 밥을 주셨고, 동냥질하는 여자들을 위해 움막집을 지어주기도 하고 밥과 옷을 나눠주기도 하셨죠.

● 陕西省에 폐지를 모아 고아 25명을 키우는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은사보다도 귀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므로 배워지는 것입니다. 나의 많은 시간을 어디에 쓰고 사시나요? 자녀와의 관계 달라지고, 부부관계가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세상의 교회를 향한 인식이 달라질 것입니다. 전도의 문이 열려질 것입니다. 행복해 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훈련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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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9:29~30:16 < 보는 눈 듣는 귀 >

[신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알고 싶고, 하나님을 알고 싶고 모든 문제를 원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어떤 이는 묻습니다. 만물에는 최고의 至尊者가 계신다.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나? 그러나 이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은 없습니다.

외계인은 있는가? 불명의비행체(UFO)는 무엇인가? 성경은 모든 인생의 문제에 답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은 모든 문제에 답한다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질문 하나하나에 성경이 자세히 답하리라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많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것 또한 교만한 인간의 모습이며 인간의 욕심입니다. 성경에는 명확한 가르침도 있지만 때로는 어떤 물음에는 일반적으로 원칙만 제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가인을 죽이려한 사람이 누구인가? 방주에 모든 동물들이 다 들어갔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는 과연 메시야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가? 천국은 있는가? 사람에게 영혼은 있는가? 왜 나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가? 왜 악한 사람이 事故 없이 잘 먹고 잘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지? 왜 선한 사람이 고난을 받고, 일찍 죽는 일이 있는지? 왜 세상에 이렇게 참 혹한 일이 많은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질문하여도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무수한 물음을 던지지만 그런 질문은 질문을 낳고 끊임없습니다. 이런 수많은 질문들이 나의 신앙에 도움이 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의혹들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어떤 사람은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 모든 의혹을 해소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롬 9:11-13]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21-23]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 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에 관하여 에서와 야곱을 예로 듭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입니다. 에서에게 무슨 잘 못이 있습니까? 또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그렇게 지으시고 그렇게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궁전에 금 그릇으로 지으셔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밭에 거름 바가지로 만드셔서 쓰다가 깨지면 버리는 것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 앞에서 완악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완악함을 쓰시고,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를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2제자 중에 유다 같은 사람도 두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듯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독재자 하나님 폭군 하나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누구는 왕벌로 태어나고 누구는 일벌로 태어나고 어떤 놈은 말벌로 태어나고 어떤 놈은 꿀벌로 태어나고 누구는 부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가난뱅이로 태어나고 누구는 자유인으로 태어나고 누구는 노예로 태어났는가?

그럼에도 바울의 최종적으로 이렇게 결론을 냅니다.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 그런데 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은

[고전 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 있는 자리에 그저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떨치고 일어나라. 네 힘껏 수고해서 땀 흘려 노력해서 새 인생을 개척하라 하지 않으십니까?

태평천국은 1851년 중국 청나라 말기에 홍수전(洪秀全)이 세운 기독교 신정(神政) 국가입니다. 양반천민귀족이 어디 있는가? 하며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만민평등을 외치고 싸웠지만 결국 그가 얻은 것은 분열과 패배 죽음이었습니다.

⁋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찌하든 나는 은혜를 알고 은혜 가운데 머무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때 마지막에 나를 십자가에 내 줄지라도‥‥

[고전7: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너희가 자유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피조물의 속박에서 육체의 질병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나에게 남에게 없는 질병이 있고, 내게 배움의 기회가 없고, 내게 무지와 어둠이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 가운데 있습니다. 어떤 이는 미국에 어떤 이는 중국에 어떤 이는 유럽에 어떤 이는 아프리카에 태어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난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고 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세움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버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진 자, 긍휼을 입지 못한 자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상실(邪僻)한 마음대로 버림받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와 귀가 주께 속하였습니다. 만유의 주재가 되신 분이십니다. 가만히 보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바로 나의 눈앞에 있는데‥‥ 알지 못한다면 불행 중 불행입니다.

⁋ 하나님의 지금도 우리의 행함과 마음을 살피시고 계십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어제 무엇을 했는지‥‥

⁋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보이십니다.

신명기 29장 "감추어진 일secret‥‥일은 나타난 revealed ‥‥ 일은" 사람은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내가 한없이 질문하고 질문해서 모든 의혹이 사라지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노력해서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께 속하며 , 나타난 일도 하나님께 속합니다.

○ 감추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계시는 하나님 편에서 스스로 열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추어진 일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그 일을 우리에게 계시 하셨을 것입니다.

[신 29:3-4]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행 28:26-27]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40년이란 긴긴 세월 동안 하나님은 <이적기사>로 자신을 보여 주셨지만 그들은 20세 이상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다 죽어야 했습니다. ◎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야 거의 멸망했습니다. ◎ 세계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이 600만이란 사들이 가스실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 그래도 그들은 우둔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의심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가 열국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1) 이방 신에 대한 우상숭배자, 탐심의 우상 숭배자 이런 사람은 눈이 감겨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모르고 짐 지고 살아갑니다.

2) 제자들이 한 밤에 갈릴리 바다의 풍랑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우둔하여 져서‥‥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습니까? Q.T 는? 얼마나 나의 헌신과 순종의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입었습니까?

⁋ 복은 순종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인디언들에게 믿음과 순종은 실제로 같은 뜻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분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 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신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어찌 이런 명령을 하시는가? 이방인의 罪惡 된 행동이 아닌가요?

베드로의 상식으로 밝은 낮에 깊은데 그물을 내리는 것은 헛수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내가 지금 가는 길이 고난에 길이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여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가다보면 그 곳이 가나안인 것을 알게 되고, 따라 가다보면 내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3]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찬송가 작사가 ‘페니 크로스비’(Fanny Crosby)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매우 영리했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시를 아름답게 짓는 재능이 있었지만 그녀의 장애는 너무나 큰 벽이었습니다. 그녀는 날마다 무력함에 시달리면서 길고 긴 어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나이 30세가 되던 어느 날, 뉴욕의 전도 집회에서 “웬 말인가 나를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라는 찬송을 반복하여 부르는 중에 갑자기 구원의 감격과 어두웠던 과거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제 새로운 인생이 열린 것입니다. 그녀가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부분을 부르다 “저도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나요”라는 물음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응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시를 쓰고 노래를 짓는 재능을 주지 않았느냐.” 그때부터 그녀는 95세가 되기까지 8000곡의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영의 눈이 열리는 순간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구원의 체험과 사명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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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3:19-28 <값없이 의롭다 하심>

누가복음10장 선한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강도. 강도만난 사람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사람입니다.

첫째, 강도들을 보십시오.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강도는 남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강도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는 자들입니다. 테러주의자, 불의한 사업가, 악한 정치가…

둘째,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누군가 도와주고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불의, 불평등한 세상에 억울한 자가 많습니다. 독재자들에 의해서, 잘못된 우상종교에 의해서, 탐욕적인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억압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강도 만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의 피해에 대해 무관심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사람입니다.

[31절, 32절]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모르는 자를 가르치고, 약한 자를 도와야 할 제사장들과 레위인인 데, 지도자, 지식인, 가진 자,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거룩한 책임(Nnoblésse oblíge :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를 망각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강도만난 사람을 끝까지 돌보아주는 사람입니다. [33절, 34절]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끝까지 사랑을 다했습니다. 국가 민족, 지역과 인종을 구분하지 않은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일 가능성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실제로 위험한 길이고 가끔 강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일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이야기가 주는 영적 의미 ; 율법사가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25~27절).

율법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잘하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율법사는 율법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통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다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웃을 힘을 다해 사랑으로 행한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율법사의 대답이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이요, 이웃 사랑이라는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을 하면서 율법사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껏 힘껏 잘하였습니다. 또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다면 실천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도 강도 만난 자에게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를 묻지 말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수 있겠느냐?”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나와 가까운 사람, 내 민족으로 국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 이로써 예수님은 그에게 보이신 것은 너는 네가 알고 지켜온 율법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었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생각하는 사랑은 실제로 하나님의 가르치시는 사랑과 한참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 영생과는 멀다는 말씀이지요.

●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구원을 받겠지요. 그러나 세상에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주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라고,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켰다. 선행을 했다. 말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삶의 기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율법을 모두 지켜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내가 얼마간의 선행을 하였다고 그리고 율법을 지켰다고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일 뿐입니다. 모든 율법적인 행위는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뿐입니다.

⁋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의 속에 ‘양심’이란 것을 지으셨습니다. 이 양심은 인간에게만 있고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이 양심을 근거로 해서 살아왔습니다. 양심은 이성에 속하는 판단능력으로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양심은 자기나 남의 행위에 대하여 선하고 악함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이 있는 데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될 때 일어나는 감정이 양심의 가책입니다. 그런데 양심에 부끄럼 없이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사람이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데도 하나님의 기쁘심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양심에 어긋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자신은 착하다. 사람들이 자기 양심의 소리를 신뢰하고 산다 하며, 자기의 옳음을 말하지만 죄에 빠진 인간은 이 양심까지도 죄에 물들어서 자신의 의식에 대하여 항상 옳게 여기는 극히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 하겠느뇨.

 

인간의 양심에 따른 삶도 율법에 따른 삶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 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다른 한 길이 열렸습니다.

[롬3:23-25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

◎ 프랑스 혁명당시 정치는 공포 정치였습니다. 조금만 눈에 나면 숙청하며 죽일 때였습니다. 수많은 사형수를 사형시키는 날이었습니다. 귀족의 아들 로와즈르유도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고 사형장으로 나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나와 있었습니다. 감옥 문이 열리면서 사형 집행관이 나와서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며 단두대에 눕히고 목을 자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드디어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로와즈르유!" 이 때 관중 속에서 "네"라는 대답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단두대위로 한 사람이 뛰어 올라 갔습니다. 사형 집행관은 그를 단두대에 눕혔습니다. 로와즈르유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려고 단두대쪽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사형집행관은 확인도 하지 않고 목을 내리쳤습니다. 로와즈르유가 이상하여 달려가 보았습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로와즈르유를 사랑하기에 대신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을 위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강도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수고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옷 입는 처방을 하나님이 스스로 가지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화목제물로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속죄제입니다. 제물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원입니다.

⁋ 로마서 본문이 전하는 말씀은 

1) 이 구원에 대한 은혜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2) 온전한 사랑과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이고 영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용서받고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축복의 출발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랑 하고 기뻐해야 할 것은 값없이 얻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그 다음입니다.


● 종교인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모든 선행과 예배에 참석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없는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는 자신의 양심을 믿고 자신의 판단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구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자기 스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의>를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종교인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인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종교인은 강도 만난 자를 버리고 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처럼 내가 가진 일부분만을 드리고 만족하는 자기만족을 구하는 신앙에 불과합니다. 종교인에게 사람에게 온전한 헌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선행 자체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복을 받고 능력을 받고 희망과 기쁨을 갖게 하는 삶은 율법적인 삶이 아니고 그 분 안에 거함으로 거저 얻어지는 것입니다.

⁋ 기독교의 신앙은 종교행위가 아닌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 지금의 삼성가의 아버지는 이병철입니다. 50~60년 전부터 그는 돈을 모으기 위하여 온갖 술수와 탐욕스런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그의 가족은 불교인입니다. 그의 자녀들은 늘 재산가지고 다툽니다. 당시에 이병철과 동등하게 돈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홍은주 사모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을 드려 고아원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홍은주 사모는 고아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홍은주 사모는 돈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고아로 여겨지는 불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가문에 목사가 13명이 배출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모든 것을 드려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습니다. 언젠가는 지금까지 내가 재산도 업적도 지위도 주를 위하여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잘하고 봉사를 잘하고 교회 출석을 잘하고, 성경을 잘 안다고 하나님의 사랑과 기쁘심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1) 은혜 가운데 거하며 2)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 3) 하늘의 위로를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입니다.

믿음은 일회성이 아닙니다. 어제 믿은 사람은 오늘도 믿고 내일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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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10:12-16   <행복을 위하여>   2012. 8. 12

[신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기서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의 도를 행하라 이는 모두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 이것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는 것도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에 지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이 기독교를 좋게 생각하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고 아이들이 주일학교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때는 비록 가난하여도 정신적으로 건강하여 학교를 자랑스러워하고 사회생활에 문제없는 사람으로 자랐지만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멀어졌을 때는 자살하는 학생이 많아지고, 서로를 배척하고, 학교폭력 횡횡하여 학교가 갈 길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일찍이 기독교 정신을 제일로 했던 영국, 독일, 미국 등은 번영하였으나 그 요구를 외면하고 하나님을 떠난 나라는 어김없이 고통이 왔습니다. 북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암 5: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경제적인 어려움과 고통이 올 것입니다. 모든 국가와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 이 모든 것은 믿음이 없다면 행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믿을 수 있습니까? 날마다 잘 때나 누울 때나 거리에서나 주의 말씀을 사랑하여 지키고 가르치라고 했지만/ 날마다 묵상의 시간을 가지라 했지만/ 안식일을 지키라 했지만/ 십일조를 구별하여 드리라. 차고 넘치게 하리라. 채울 곳이 없도록 채워 줄 것이다. 했지만 ……

하나님의 법대로 지키면 손해 볼 것 같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지키고 나면 나중에는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 안식일에 가게 문을 열고 십일조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내 힘대로 내 방법대로 하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사랑 축복에 대한 믿음과 규례와 명령에 대한 순종을 요구할 때는 그런 믿을 만한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신 10:14-15]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 본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세상 만물이 모두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아쉬울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하실 때는 참 보기에 좋았던 세상입니다. 죄로 물든 세상이면 다 멸하시고 다시 지으시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참으시고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택하여 구원하십니다. 만일 이 자리에 자신이 한 나라의 총리의 친구라면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이명박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장관이 되면 집안의 큰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 삼아 주시었습니다.

◯ 우리를 애굽의 종 되었던 데서 택하시고 자기 백성을 삼으셨다. 했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고아가 아닙니다. 의지할 대상 나를 사랑하시는 분 하나님이 나의 보장과 피난처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저는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멀리 계신 분이었습니다. 내 딴에는 주님을 사랑하노라 생각했는데 실로 조금도 내려놓지 않은 나를 보았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하고 말했습니다. 두려운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내 생각하기를 바람 불고 눈 비오는 춘절에도 전도하러 나가고,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는데, 왜 나는 이런 고생을 하는가? 다른 사람은 나보다 쉽게 출세하여 사는 것 같았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 많은 고통을 허락 하신다 생각했습니다. 

◯ 실로 나의 때는 이르지 않았고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주님이셨습니다나는 내가 의로운 줄 알았습니다. 나는 믿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했고, 성경 시험경시에 나가면 늘 일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하나님은 지적인 하나님 이성적인 하나님이었습니다. ○ 하나님은 병자를 위한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데 응답해 주시지 않는가하고 생각할 때면 나 자신이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연약해지는 인간 의심과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 ◇금방 12광주리를 남기고서도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인간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

<이 넓고 넓은 세상, 높고 높은 우주, 많고 많은 사람가운데> 만약 나의 존재를 표시한다면 한 점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의 말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티끌과 같고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나를 아신다고 말합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며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기에 스펄전이나, 위대한 설교의 대가들이 나서서 온갖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더라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세계를 일주한 사람이 모든 나라에서 체험한 것들을 5분 만에 한마디로 설명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 독생자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 우리가 죄를 알기도 전에 용서하시었습니다.

다시 12절에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며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여기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라 했는데 이는 우리의 전인격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이 나의 고집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꿈, 나의 재능, 나의 재산, 나의 시간, 일생을 드리면 혹시나 모든 것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고 내 인생은 내가 살리라 하고 짐 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이 전인격을 드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풍성함, 그 평안의 생각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월요일 종양을 수술하였을 때 수요일에 두 군데 교회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제게 걱정이 있었습니다. 나 혼자 참여하는 보고와 말씀, 그리고 나 혼자 부르는 중국 찬양이 저들에게 무슨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아내도 그렇게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 나의 힘이 되시고 숨소리에도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사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길에서 나와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 보좌를 내놓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온갖 능욕과 고통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그 분을 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배워 머리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힘대로 제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적과 기사를 많이 보고, 또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온전히 드린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사는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믿음이고,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입니다.

◯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니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습니다.


[16절]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마음에 행하는 할례는 우리 안에 욕심들 내가 주인 되어 내 마음대로 행하는 불신의 모습들 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할례가 고통이 따르듯이 마음의 할례도 역시 그만한 고통이 따릅니다만 진정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죄를 잘라내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걷게 됩니다.

◯ 신앙인을 보면, 그 목적 하는 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자기를 위하여 신앙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자신이 경영하는 바가 성취되기를 바라고, 자기의 욕구가 원만히 충족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서 예배하고 이를 위해서 성경을 봅니다. 이런 사람은 만약 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내가 섬기는 신을 언제든지 바꿀 수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팔고 자살하여 죽게 된 것은 예수를 위한 섬김과 진실 된 믿음과 사랑이 없고, 나의 목표와 생각을 가지고 나온 까닭입니다.

◯ 하나님을 위하여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신앙의 전체인 사람입니다.

[요한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희망이 있고,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참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면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배웁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배우기 위해 불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던져진 것 같습니다.

◯ 사랑을 받지 못한 자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알기까지 인간의 영혼은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사랑을 찾아 헤매나 무엇이 참 사랑이며, 어디에서도 참 사랑을 찾지 못합니다. 불과 같은 남녀 간의 사랑도 영원하지 못하며, 혈연의 사랑도 물질 앞에서 쉽게 깨져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갈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1)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2) 하나님이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는 온 정성과 혼과 힘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 폴리갑을 재판하던 재판관은 황제를 숭배하면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회유합니다. 그러자 폴리갑은 감동적인 말씀을 남깁니다. “86년 동안 내가 주님을 섬겼고 그분이 나에게 해롭게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을 배워가는 곳입니다. 온 맘과 온 몸으로 드리는 믿음 생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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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17:1-11 <아론의 지팡이>

고라는 레위 자손입니다. 고라를 중심으로 250 명의 족장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민수기 16:3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이스라엘 백성들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모세와 아론의 지도권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14700명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오늘 17장은 모든 지파 중에서 왜 모세와 아론이 종교, 정치의 지도자로 일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과 자격을 말하면서 지도권에 대한 부정과 불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12지파의 족장의 두령에게 지도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가져오라 하십니다. 그리고 지팡이에 족장들의 이름을 각각 썼습니다. 레위 지파의 대표자로서 아론의 이름도 지팡이에 기록하였습니다.

[민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민17: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12개의 지팡이 가운데 레위 지파를 대표한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난 것입니다. 바싹 말라 버린 나무 막대기에서 하루 만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열매가 열리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론을 선택하셨고 열매 맺는 신앙으로 인정하셨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아론에게 대한 권위의 인치심입니다.

하나님은 하루 사이에 이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오 창조자이십니다. 생명과 사망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 생명이 있으므로 소망이 있고 거기에 기쁨이 따르고 그 곳에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있고 많은 일을 할지라도 나의 삶에 기쁨이 없고 변화가 없고 활력이 없다면  마른 나무지팡이와 같은 신앙이라 할 것입니다.

나는 마른 지팡이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지팡이인가? 여러분은 생명이 꽃피는 나무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정받을 만한 사람인가요? 내가 마른 지팡이를 들고 이것이 하나님의 지팡이다 하나님의 지팡이다 외친다고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함께 하시므로 생명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겨울이 지나고 봄철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은 살구꽃입니다. 살구꽃은 <부활의 생명>을 예표 합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자에게,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변화가 있고,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은 믿음이 있다 말하지만 실제로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정받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날 때는 믿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지신은 믿음이 좋은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믿음으로 살리라!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말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잠자고, 배반하고, 내 뜻대로 하는 때가 많습니다. 반석 같은 믿음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뿌리 없는 믿음 열매 없는 믿음입니다.

고라는 자신이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쓸 만한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는 제 욕심대로 행하는 사람이었고 머리만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고 발람이 그랬습니다. 억지로 시키는 대로 하였지만 잘난 그가 결국에는 물질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지식과 열심히 있었으나 하나가 되지 못했고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믿음이 되려면 자기 안에 < 쬐깐한 믿음이 있다고, 은사가 있다고,  내가 하나님을 좀 안다고 >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생명이 이 있고, 결실까지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일군 쓰임 받는 일군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모두에게 존경받을 만한 흠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가족의 지지를 받는 가정이라야 할 것입니다.거기다가 하나님의 세우심을 입어야 합니다. 쓰임 받지 못한다면 소용없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왕과 제사장 선지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에는 누구나 <만민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각자 기도하고 예배하며 봉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만민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고, 모두가 훌륭한 사람이고, 자유인이 되어 시대에 살고 있는데 슬픈 사실은 자신을 주장하고 자기 스스로를 추천하고, 제 마음대로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나아닌 아무도 다른 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합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고 내가 노력한다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권위에 속하여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왕이고 제사장이고 선지자이지만 동시에 이 조직 사회 안에는 질서가 있고 권위가 있습니다. 나라에는 위정자가 있고, 가정에는 부모가, 학교에는 교사가 있습니다. 이는 모두 위로부터 온 권위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모두의 권위가 상실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모, 교사, 지도자, 어른, 모두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권위 있는 일꾼이 되려면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 정치하는 자의 권위, 부모의 권위,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진정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국가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교회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 내가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할 때 자식이 나를 공경하듯이 교회 지도자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정과 권위를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

교회 안에도 직분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목회를 하자면 교인들 가운데 세상에서 존경받고 더 많은 학식을 가지고 지위를 가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모든 사람에게 설교를 시키고 교회의 직무를 맡기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다고 모든 사람에게 모든 직무를 맡기는 것은 아닙니다. 택정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 초대교회는 12번째 제자로 맛디아를 기도하고 제비뽑았고

●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 7제자를 선출하여 봉사의 직무를 맡겼습니다.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고 가르쳤습니다. 배나 존경하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 권위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공경의 갑절로 공경하라는 뜻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라의 법을 존중하고 위정자를 공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였지만 교회의 질서를 알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존중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바닷가에서 만남을 가졌습니다. 행20:18-19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눈물과 겸손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진정한 권위는 자기 스스로를 세우고 높여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높이고 낮추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등경위에 두나니 라고 했습니다. 등불을 켜서 높이 매다는 것은 주인이 하는 일입니다. 내가 밝은 등불이 되어 빛을 발할 때 주인이 나를 등경위에 매달 것입니다.

◎ 한국에서는 장로를 선출할 때마다 교회가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장로로 뽑힌 사람은 영광스럽게 생각하지만 되지 못한 사람은 부끄럽게 여기고 교회를 떠나버린다든가 아니면 무수한 원망과 많은 이유를 들어 교회분규를 일으킵니다.

전북 김제에 위치한 금산교회를 최초에 세웠던 조덕삼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이자익은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김제에 도착하여 최고 부자였던 조덕삼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머슴에게도 쌀밥 주는 것을 보고 감동한 그는 머슴으로 일하기로 했습니다. 이자익은 자신보다 15살이 많은 주인 조덕삼의 마부(馬夫)가 되어 성심성의껏 일했습니다. 그러던 중 테이트(L.B.Tate)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주인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교회에서 조덕삼과 이자익은 함께 집사로 임명받아 섬기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여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머슴 이자익이 선출되었습니다. 사실 조덕삼은 지역의 부자일뿐 아니라 금산교회의 설립자요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흠이 없고 존경받는 자였으며, 더구나 이자익을 키워준 사람이나 다름없고 나이도 더 많았습니다. 당시 교인들 가운데 여인이나 천민들이 많았기에 머슴 이자익에게 더 표를 주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장로는 교회를 책임질 뿐 아니라 설교도 하는 자였기에, 집사 조덕삼은 장로 이자익에게 함부로 하대할 수가 없고 그의 설교를 들어야 하며 머슴을 도와 교회 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투표결과가 발표되자 교인들은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 걱정하며 술렁거렸습니다. 그 때 조덕삼 집사가 일어나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조덕삼 집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오히려 이자익 장로를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머슴이 먼저 장로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첫째가 되었습니다. 후에 장로가 된 조덕삼은 이자익 장로를 평양으로 보내 목사가 되게 하였고, 1915년 금산교회로 청빙하여 담임목사로 깍듯이 섬겼습니다. 후손들이 계속하여 장로가 되어 그 교회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이 손자가 바로 국회의원을 지냈던 조세형장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실족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그의 누이를 알고 아버지를 안다. 그가 난 곳을 알고 어떻게 살았는가도 다 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듣는 말씀으로 그리 중요하게 귀담아 듣지 않지는 않았는지, 마땅히 공경 받아야 할 사람 목회자의 말을 소홀히 지나치지는 않는가? 부모님의 말을 귀담아 들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왕이면 진정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비비안이 일화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일을 시킵니다. “얘야, 쓰레기 내놓았니?” 매주 어머니는 꼭 프로가 한창 재미있을 때 들어와서는 물으시는 거 같았다. 내 대답은 늘 같았다. “아직요.” “지금 당장 일어나 버리고 와라.” “예, 엄마.”나는 이렇게 대답하며 일어났다. 그러나 속에서는 불만이 끓어올랐다.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순종했지만 즐겨 순종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네 태도는 옳지 않았다. 네가 섬기는 교회에서 네게 공급(供应)이 없는 이유는 네가 순종하긴 하지만 즐겨 하는 태도가 없기 때문이다!”그 후 나는 회개하고 새로이 마음을 먹었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 고라의 사건을 알아보자

2.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싹이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은 일이 내포하는 의미는?

3. 나는 어떤 면에서 권위에 순종하지 않았던가?

4. 내가 마땅히 존경하여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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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1-9   <네 지팡이를 던져라>    2012. 6.10

사람이 자신감 있게 활기차게 소망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은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언제나 무능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네 스스로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느냐? 왜 자신을 무력하다고 말하느냐? 너는 가능한 사람이다. 너에게 무한한 능력이 있다. 너를 믿어라! 말합니다. 이는 거짓입니다. 하나님 없는 자만심은 죄악입니다.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넘어집니다. 원래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위험이 널려 있습니다. 산에도 바다에도 하늘에도 먹거리에도 사람사람 사이에도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남을 피곤하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40세가 되어 애굽으로 도망친 모세는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는 모든 것을 상실했습니다. 젊음을 다 잃었습니다. 그는 바로의 궁궐 속에서 그 당시의 세계의 문화 속에서 학문과 재능을 배웠는데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 그는 바로의 궁궐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았고 그에게는 힘 있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모두가 멀어지고 잊혀 졌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나이 80이 되어 미디안 땅에서 40여 년이 지나도록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는 목동으로 살아갑니다. 이날도 그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쥐고 양을 치러 광야로 나갑니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자신도 모르게 양 무리를 이끌고 멀리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미디안 광야 40여 년간 한 번도 자신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신 하나님! 모세의 열망이 사라지고 하나님은 자신을 버린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결코 모세를 잊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1) '모세야, 모세야'  (2)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출 3:7-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3:11절]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4:1절]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출애굽기 4:10절]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출애굽기 4:13절]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그는 마음 속 깊이 자기비하에 빠져있습니다. 만약에 나의 자녀가 말하기를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불가능합니다.” 말하면 어느 부모가 기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 각 사람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주시고 부요하게 하시고 도우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못한다고 변명하는 모세를 향하여 모세의 어리석음과 불신과 머뭇거림에 대해 참으시고 그에게 세 가지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려 하십니다.

① “지금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모세는, “지팡이 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명하십니다. 모세가 그대로 했더니만, 순식간에 지팡이가 뱀으로 변했습니다. 깜짝 놀라 피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하십니다. 뱀 꼬리를 잡으라. 느닷없이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좀 엉뚱해 보입니다. 상식적으로 뱀을 제압하려면 먼저 머리를 제압해야 하는데. 참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원하시니 그렇게 합니다. ○ 모세가 그대로 했더니만, 다시금, 뱀이 지팡이가 되어,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독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어 잡았습니다. 모세는 이제 놀라운 표적을 보았습니다. ○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능력의 지팡이'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 행위를 통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오직 믿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실제로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을 때, 마른 막대기와 같은 나라도…

○ 주일 날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신앙으로 삶의 힘을 얻지 못합니다. 잡으라면 뱀의 꼬리도 잡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능력있는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구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기도하여 구하기를 "손을 내밀어 병이 낫게 하옵시고, 이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기드온이 이적을 구했고, 아브라함이 이적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확증을 위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나의 행하는 이적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적과 기사가 없으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얻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얻은 즉 나으리라.

[마가복음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

그리고 이적은 말씀에 순종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침에 묵상을 하라고 하니 묵상하고 기도하라고 하니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묵상하며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말씀을 100% 순종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법입니다.

평범한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쥔 지팡이가 주님의 손에 붙들리어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무능한 존재라고 스스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 없고, 부족하고, 연약하고, 말을 더듬고, 나는 무일푼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붙드시면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됩니다.

[출애굽기 4: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어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 [출애굽기 14:16절]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 [출애굽기 17:6절]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이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물이 나왔습니다. 백성이 마셨습니다.

◯ [출애굽기 17:9절]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아말렉이 공격해 올 때 높은 곳에 올라가 그 지팡이를 두 손으로 높이 들어 기도할 때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였고,

○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면서 그는 깨어지고 또 깨져야 합니다. 사십 년 전에는 “내가 하겠다. 내가 하겠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십 년 후에는 “나는 못합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는 낮아졌습니다. 그때 모세는 주님께서 쓰시는 지팡이가 된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 김용의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 김용의 선교사님은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다음에 완전히 180도 달라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섯 자녀를 다 선교사로 키워내고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귀한 선교사님이 되었는데요,

사실 본인은 태어날 때 술집 사장님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밤낮 술에 취해가지고 온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욕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입을 열면 처음부터 끝까지 욕을 하는 그러한 바닥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다닐 때 그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긴 재산도 없이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거지가 되었습니다. “집 한 칸 없이 주민등록증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뒷골목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는 사람을 증오했고, 세상을 불 지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사는 곳은 술, 살인, 마약, 음란이 전혀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매일 일상이 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긴 시간을 깡패가 되어 살았습니다.

술집 아들이라는 부끄러운 혈통, 지긋지긋한 가난, 중학교 중퇴라는 학력 등 이 전부는 그에게는 자살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고, 그는 몇 차례의 자살도 시도했지만 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고 볼품없는 마른 막대기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큰 충격과 감동과 은혜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대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면서까지 날 사랑했다고? 그는 이 말만 가지고도 평생 감동하다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그에게 이렇게 들렸습니다. ‘너는 재수 없이 태어난 망한 술집 아들놈이 아니다. 너는 내가 널 대신하여 죽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홀랑 미쳤습니다.”

마른 막대기보다도 못한 인생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온 세계를 다니며 주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니 비참했던 존재가 귀한 존재가 되고, 선교하는 주님의 일꾼이 되고, 자기처럼 절망에 처해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귀한 목사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이 되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쥐고 있으나 내 마음대로 쓰는 지팡이도 아니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어야 합니다.

1. 공부를 해도 주님과 함께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열심히 공부할 때 더 좋은 성적을 낼 것입니다. 비즈니스를 해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비즈니스가 되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 사업이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혼자 하면 여러분은 그냥 평범한 마른 지팡이, 마른 막대기가 되고 맙니다.

2. 설교에서도 윤리를 말하고 의무를 말하고 정의를 말하면 다 좋은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해야 합니다.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음

[마가복음 10장]에는 부자청년이 주님 앞에 나오는 기사가 있습니다. 나와서 묻습니다. 내가 어찌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부모를 공경하라. 이는 누구나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 말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너에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모든 것을 드리라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재능과 많은 재산, 배경과 지위가 오히려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시밭에 뿌려진 씨가 짓눌려 죽는 것과 같습니다.

② 하나님은 두 번째 기적까지 보여주십니다. 모세와 애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모세의 손을 나병 환자의 손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회복시키는 기적이었다. 여기에 언급된 나병은 불치의 병으로 죄인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능력 하고 죄인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복된 손은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창조자 하나님,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이다. 첫째 이적은 믿지 않더라도 내게 일어난 일, 하나님 앞에 죄인된 나를 무능한 나를 보는 순간에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이적은 나일 강 물을 조금 퍼 땅에 쏟으니 피가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벌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나일 강은 애굽인들에게 생명줄과 같았다. 나일 강은 애굽의 경제생활에 대동맥 역할을 한다. 나일 강이 피가 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물이 죽음의 징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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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27-38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012. 6. 2

[마가복음 8:27-29]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 선지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의 고백을 듣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는 말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책임이 있고, 자신을 밝히는 것입니다. 말에 힘이 있고, 인간관계가 시작하는 것이고, 책임이 따는 것입니다. 몰라요! 할 때마다 화가 납니다. 오늘날 제자된 나의 마음과 결단을 알기 원하십니다. ○ 그러자 베드로가 앞장서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베드로는 훌륭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물어보실 때 누구보다도 먼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백은 마음 속에서 나온 자신의 확인이고 결단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는 말은 그 사람의 진실이고,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발견, 나의 체험을 듣고 싶어합니다. 안드레가 요한의 증거에 의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형제 시몬을 찾아가 말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이 말은 스스로 경험과 체험 구약의 예언의 확증에서 나온 고백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을 최초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한 고백 "당신은 그리스도시니이다" 라는 이 고백 위에 교회에 세워집니다. 귀중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난 예수님은 그의 고백을 덧붙여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8:31-33]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나는 인자이다" 말로 시작하여 예수는 이런 베드로의 고백에서 나타난 그의 생각을 수정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란 칭호를 사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기다리던 그리스도 개념이 [구원자, 구속자]라면, 인자는 비록 신적 권위와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반드시" 고난받고, 죽고, 부활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 사람들이 말하고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 "그리스도"의 像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대중들과 제자들이 이해하는 단순한 [능력의 예언자]나 온 세상을 [지배하는 메시야]가 아닌 [고난 받는 종] "인자"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것은 전통적인 메시야의 모습과는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투쟁으로 얻어지는 메시야 왕국도 아니며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왕국도 아닙니다. 오히려 냉혹한 현실 세상에서 타자를 위하여 "고난받아 죽는" 지난한 産苦를 통하여 얻어지는 나라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상상할 수 없었던 어려움이 닥칠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철저한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주님은 더 이상 자신을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이제는 고난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다. 라는 말로 제자들에게 참 주님의 모습에 알려 주십니다.

예수는 베드로의 "간하매(꾸짖음)" 즉 "예수, 당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인자적 삶을 산다면 이제까지 따랐던 우리들은 무엇이 됩니까? 당신은 '반드시' 그리스도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는 요구입니다. 주님이 말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 이는 "사탄"의 행위인 것이다. 사망의 길입니다.

○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천국은 가고싶고, 또 하나님의 복은 받고 싶고, 성령은 받고 싶은데, 십자가 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목사와 교회도 많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주님께서 부여한 사명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명입니다.

○ 유명한 영국의 저술가 러스킨(罗斯金)은 '나는 사명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할 일은 할 수가 없다. 마치 내 다리를 다른 사람이 대신 붙여서 다닐 수가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서 "인자"로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면서 그 길로 나설 것을 요구하십니다. 너무도 분명하게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를 알려주시면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이 길로 과감히 동참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마가복음 8:34-3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가복음 9:23]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누가복음은 구체적으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말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상적인 삶 가운데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해야할 기도의 사명, 헌신의 사명, 물질의 사명이 있습니다. 때로는 여러분의 가운데 자신이 크게 멋지게 주님 앞에 쓰임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먼 날의 위대한 사역을 꿈을 꾸는 것도 좋지만 오늘 충성하는 사람 작은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큰 일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느 곳이 아닌 교회 안에서 주님 앞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러분 음성과 손과 발 등 온 몸 과 여러분의 지식과 생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전체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에게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지체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팔다리와 이목구비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사명을 다할 때 교회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의 사명을 다할 줄로 믿습니다.

  주일학교 교사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교사는 수시로 빠집니다. 다른 교사에게 합반시켜서 대신 가르치라고 하고 자기는 자기 일에 빠빠 못하게 되면 결국 아이들은 열심과 애정을 잃게 됩니다. 다른 교사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속상해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이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거나 빼앗기면 안됩니다. 이것이 날마다의 십자가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것을 맡겨주시고, 작은 일도 큰 일처럼 여길 때 하나님이 가장 가치있는 것을 부여해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 5달란트, 두달란트, 한달란트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취리하는 자가 누구냐? 교회에라도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으면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고생하라. 고생을 해보아야 돈의 소중함을 알듯이 주님을 위하여 고생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땀을 흘려 보아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받게 해야 될 사명이 있고, 내가 만난 예수를 다른 사람에게도 만나게 해야 될 사명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8:36-37]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지금 ‘나는 누구인가?’ 생각해봅시다. 얼굴과 몸을 보면 나인지 알게 되니 얼굴과 몸이 바로 ‘나’인 것 같지요? 그러나 교통사고로 팔 다리가 하나씩 없어질 수도 있고, 나이가 들어 머리나 이가 빠질 수도 있습니다. 머리가 희어져도 ‘나’라는 존재는 계속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존재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내가 소중하듯이 또 다른 사람도 소중합니다. 저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신 분이고, 이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신 소중한 사람입니다.

◉ “너는 죽을 준비가 되었느냐?” 서울 구치소 보안계장 박효진 장로가 한 사형수에게 묻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의 얼굴은 금방 굳어집니다. 사형수들은 죽는다는 소리에 대해서 참 민감합니다. 참으로 강하고 무자비하고 아주 징그러운 냉혈한이라고 알려져 있던 이 친구도 간수의 목을 껴안고 많이 울다가“이제는 알겠습니다. 이제는 죽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늘 성경책을 가슴에 끼고 다녔습니다. 운동을 가도 면회를 나가도 늘 끼고 다니다가 만나는 사형수에게 마다 “너 죽을 준비해라”했습니다. 많은 사형수들의 마음이 도형이의 눈물의 한마디 앞에 변화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역사가 일어났지요. 보통 사형수들은 자기 이름을 부르면 갑자기 혼이 나가버려요. 혼이 나가서 자기 문 앞에서 나와 사형장까지 가는 동안 5-6분정도 걸리는데 자기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끌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미 밧줄을 보는 순간에 혼이 나가 버려요. 놀라는 사람, 주저앉는 사람, 오줌을 싸는 사람, 저주하는 사람, 욕설을 내뱉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기껏 내뱉는 소리가 “담배 한 대만 피우게 해 주십시오” 그 담배 한대 입에 물고 연기가 다 빠져나가기 전에 결국 목매달려 그냥 그렇게 죽습니다.

1991년 어느 날 아침 서울 구치소 보안계장 박효진 장로를 비롯한 서울구치소 신우회원들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사형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배드리는 일, 사형수 도형이를 데리고 나오는 일과 특히 사람들이 하기 꺼리는 시신치우는 일을 신우회원들이 맡기로 뜻을 모았던 것입니다. 신우회원들은 임종예배를 드리고 마지막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집행하는 날 박효진 장로가 “너는 죽을 준비되었냐?” 물었더니, 그 소리를 듣자마자 “지금 소장님께서 읽으실 그 죄를 제가 다 지었습니다. 제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죄는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지었던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주시고 기억도 아니하시는 그 더러운 죄를 또 제 귀로 듣고 가기가 싫습니다. 용서받은 영혼 깨끗한 그대로 아버지나라에 갈 수 있도록 제발 그 더러운 죄를 읽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계속 말합니다. “저는 과거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여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나고 나니 지금까지 제 손에 죽은 억울한 피해자들을 위해 남몰래 기도해왔습니다. 오늘 천국에 갑니다. 거기서는 그분들의 유가족들을 위해서도 역시 기도하겠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한번 저를 만나 주십시오. 천국에서는 사형수가 아니라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여러분들을 만날 겁니다.” 저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눈 뿐만이 아니라 장기와 몸을 모두 내놓겠습니다” 그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 본디오 빌라도가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하실 때 “네 말이 옳도다!”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늘 천국을 예비하셨고 자신의 나라가 이 땅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기를 원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온갖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언젠가 죽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는 진실한 증인만이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천국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문을 들어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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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1-11 <꿈꾸는 요셉>             2012. 5. 27

어떤 목사님이 어려서 교회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때에 자신의 집 옆에 큰 집을 짓는 목수들을 보았습니다. 물었지요. "아저씨 이 집에는 누가 살아요?" " 이 집에는 하나님이 사신 단다." 그래서 하나님은 굉장히 크고 위대하시고 큰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하고 함께 살아봤으면 좋겠다.' 그것이 나중에 예배당이요 교회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의 가슴 속에는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에 대한 꿈이 꾸었답니다. 그는 어릴 때에 목사가 되기로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나면, 부흥사님들이 와서 설교를 하고 나면, 자신도 뒷동산에 올라가서 설교하였습니다. 솔잎가지를 꺾어서 세워놓고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모아 놓고 그것이 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설교를 했답니다. 그 분은 지금 훌륭한 목사님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1) 예수님은 꿈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었습니다. 인류의 꿈이 되시었습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탄생 시부터 어려서부터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내내 이 꿈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었고 인류의 구원의 꿈이 되셨습니다.

2) 성령도 꿈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도행전 2:17]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은 지금도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건강한 자나, 병든 자나, 찾아오는 모두에게 꿈을 주십니다.

3) 교회는 성도들에게 꿈을 파는 가게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절망과 좌절과 낙망에 부딪혀 허덕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 오실 때마다 꿈을 얻어 가야 합니다. 만약 교회에서 꿈을 얻지 못한다면 사망의 길, 어둠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을 가져야 하고, 교회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없으면 개인도 교회도 망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꿈을 가지고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던 안 믿던 꿈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정복했습니다. 꿈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육신은 살았으나 실제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늙어도 젊은이요 꿈을 갖지 못한 사람은 젊어도 늙은이입니다.

 

○ 요셉은 열두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레아의 아들들 속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을 터인데 전혀 성격이 왜곡된 모습이 없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입히고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는데, 이러한 특별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의 확신이 평생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신뢰를 갖게 한 듯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무한히 사랑하였고, 무한한 사랑을 독차지한 아이였습니다. 요셉은 한없이 착하기만 합니다. 요셉은 누구를 미워할 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나이 10살이 넘어 17살이 되도록 자신이 따돌림 당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니 참 철도 없고, 단순합니다. 그는 형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는 데도 불구하고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찾아갑니다.

요셉은 정직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 (분명 형들은 때때로 아버지의 양을 장사꾼들에게 팔아먹고 잡아먹고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나쁜 짓에 가담하기 보다는 언제나 바른 말을 아버지에게 했습니다. 형들은 어째든 요셉이 싫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사랑과 칭찬을 받고 싶어 했지만, 형들은 그를 고자질(打小报告) 장이이고, 자기들과 한 통속이 되지 않는 놈이고, 모든 것을 독차지한 아이였습니다.

[ 저의 육신의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老夫子를 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큰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 일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저의 큰 아버지의 소원이 무거운 지게(背架)질 안 하고, 평생 보리가 섞이지 않은 따듯한 백반을 먹어보는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저의 둘째인 아버지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글을 좋아하는 둘째에게 날마다 집에서 글을 읽게 하였습니다. 나이 많은 형은 늘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저의 사촌형들에게도 너희는 학교에 갈 필요 없다. 학교에 가면 무엇 하냐? 열심히 일해서 배불리 밥을 먹는 것이 최고다. ]

○ 요셉을 향한 형들의 미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유일한 꿈과 희망은 요셉이었습니다. 야곱은 귀여운 요셉을 늘 품에 두고 이런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 정직해야 한다. / 참을 줄 알아야 한다. / 분노해서는 안 된다. /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방 땅에서 유리하며 하루하루를 위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요셉이 하루는 꿈을 꾸고 그 꿈을 말합니다. “추수를 하는데 형들의 나락 단이 나의 나락 단을 보고서 절을 하더라.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을 향하여 절하더라.”

11절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고 합니다. 사실 아버지 야곱은 겉으로 화를 내었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의 비전이 그에게 있음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꾼 꿈은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고 창고를 채우고 행복하게 세상을 누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다운 세상, 사랑이 가득한 세상,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십니까?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꿈은 결국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세상을 망하게 하고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저도 하나님의 좋은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 하는 말이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이 말은 요셉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형용사가 되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먼 이국땅에 팔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와 함께 계시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노릇을 할 때도 많은 종들 중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고, 애굽 땅에서 총리가 되어서도 요셉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까?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1: 37-38]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합니까? 대통령이 되고 싶으면 대통령이 되겠다고 수단 방법을 가지지 않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비전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비전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비전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의와 진리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비전을 보여 주시고 비전을 이루게 하십니다. 부와 귀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를 천하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귀하게 높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룩한 꿈을 가진 사람은 외롭습니다. 꿈은 새로운 시대와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현실에 익숙한 사람들, 현실의 수많은 기존 세력이 장애가 되어 가로 막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들은 극복해야할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꿈을 갖은 사람은 행복합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어 인간을 구원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바다에 방주를 지으면 누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산에다 방주를 지으니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노아만이 그 꿈을 가지고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떠나는 아픔을 치러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창 37: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다가, 나중에는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꿈은 꾼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자는 그 시작부터 방해를 받고 미움을 받습니다.

비전과 몽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비전을 꿈꾸어 가는 사람은 고난과 한계 앞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상가는 막연하게 꿈을 꾸다가 가는 길이 힘들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요셉이 처음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갈 때는 아버지 집에서 꾸었던 모든 꿈을 한 때 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향한 꿈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적당한 시기에 꾸게 했던 그 꿈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꿈을 가지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꿈꾸는 사람이었고, 그 꿈을 이루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꿈을 내가 노력한 이상으로 더 크게 이루어주십니다 공교롭게도 요셉의 이름은 “하나님이 더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요셉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크게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고 꿈꾸는 자에게 백 배, 천배 만 배로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꿈을 가진 요셉으로 말미암아 보디발의 집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였고, ○요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애굽 땅에 복이 임하였습니다. ○요셉의 온 가족에게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 창세기 38장에는 보면 다말은 메소보다미아 지방에서 가나안으로 살러온 야곱 집안 유다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 은 경건치 못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 죽임을 당합니다. 히브리 율법에 따라 차남인 오난과 결혼함으로 장자의 대를 잇게 하는 것입니다. 오난은 엘의 후손이 계승되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이들의 악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두 아들이 자식을 생산하기도 전에 거두어가셨습니다. 레위 결혼법에 따라 세째 아들 셀라가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는 셀라가 장성한 후에 결혼시키기로 약속하지만 세월이 흘러 셀라가 성장한 후에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셋째 아들이 두 아들의 전철을 밟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자신의 이름을 그의 계보에서 잊어버리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단지 시아버지라는 한 남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에 버림 받은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正當한 삶을 살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의무를 벗어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하기를 거부합니다. 유다 집안에 남편의 대를 잊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그녀는 친정집에 수절하였습니다. 다말은 유다 집의 후계자를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루는 아내를 잃은 유다가 딤나로 양털 깎는 것을 감독하러 온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부도덕한 방법일지라도) 스스로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를 유혹합니다. 급작스레 돈을 가져오지 못한 유다는 자신의 도장과 끈을 약조물로 주고 그녀와 동침합니다. 석달 후 그녀가 어떤 남자와 행음함으로 임신이 알려지고 그녀는 불태워 죽임을 당해야 하는 위기를 당하지만 시부에게 전에 자신이 받았던 약조물을 보이고 유다의 잘못을 생각나게 하고 긍휼을 입어 목숨을 건집니다. 그녀는 쌍둥이를 낳았고 둘째 베레스는 다윗의 10대조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릅니다. 그녀는 유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근친상간이라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녀를 용서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로 그녀의 죄를 가려주십니다. 유다는 아들들을 제대로 신앙으로 기르지도 못했고 자신도 정결한 삶을 살지도 율법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유다가문을 지켜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 이 세상에 문제없는 가정 문제없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고 부끄러운 나, 부끄러운 나의 집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한없이 쏟아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부모는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꿈을 가지십시다. 용기를 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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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9:1-8 <죄 사함을 받으라>                 2012. 5. 13

최첨단 과학시대입니다. 줄기세포를 통해 암을 고치는 의술이 개발 되었습니다. 암을 고칩니다. 항생제의 개발로 수많은 병을 고치게 되었고, 많은 불치병들이 사라지고 치료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사람들은 훨씬 더 건강의 불안으로 가득합니다. 항생제로 고치지 못하는 병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병원의 첨단 기술과 의약으로 고치지 못하는 수많을 병을 주의 이름으로 고치고 살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의 귀한 이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오늘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 받는 이야기입니다.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1. 친구를 예수님께로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온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왜 교회에 나옵니까?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형제의 기도가 있고 권면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은혜는 성전의 문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저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신 어머니를 잊지 못합니다. 제 어머니는 가난했고, 학력은 무(無)였고, 사회적 지위도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평생 오로지 자식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일 낮과 밤, 수요일 저녁을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그 신앙의 모습이 오늘의 저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저에게 이렇게 많은 힘이 되고 동역해 주는 형제자매가 있어 늘 감사드립니다. 형제자매를 가까이 하여 먼저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을 고치실 능력이 있다는 믿음과, 그를 고쳐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지붕을 걷어내고 친구를 침상 째 내리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인가를 보십니다. 병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라고 했습니다. 그는 전신이나 반신이 마비되어 거동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한 때는 왼팔과 다리를 쓰시지 못하고 누워 계셨습니다. 말이 어눌했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 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느냐? 부끄러워 사람을 보지 못하겠고 사람들에게 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용기를 갖고 나와야 합니다. 사모하는 심령,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나님에 교회에 출석도 안하고 하나님의 일에 관심도 없다가 병만 고치러 나온다면 혹시나 해서 나오는 사람입니다. 구경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고쳐주나 보자! 과연 능력이 있어 고치면 좋고 손해 볼 것 없고‥‥ 침상에 누워서 실려 온 그는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


축복을 즐거운 마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마음을 열고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이기까지 그의 삶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기 때문에 나를 하인중의 한 사람으로 여기소서.’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는 생각하고 머뭇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의 결단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텍사스 주의 재판소에서 한 살인범이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범의 형은 그 주의 공직에 있는 동안 많은 공로를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은 주지사를 찾아가서 자기 동생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며 사면을 간청했습니다. 주 법정은 형의 공로와 그의 보증을 참작하여 그의 동생의 죄를 사면해 주었습니다. 양복 안주머니에 어렵게 주지사의 사면장을 받아 넣은 형은 기쁜 마음으로 동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동생에게는 조금도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형이 물었습니다. “만약 네가 사면을 받고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무엇을 하겠니?” 그랬더니 동생은 얼굴을 찡그리며 주저 없이 말했습니다. “만약 내가 나간다면 첫째로, 내게 사형 언도를 내린 판사를 찾아 죽일 것이고, 다음에는 내 재판에서 증인을 섰던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죽여 버릴 거야.” 형은 두말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형무소 문을 나서는 형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주지사로부터 받은 사면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지 않습니다.


3. 2절에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나 이 중풍병자나 죄 사함을 바라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병은 병이고 죄는 죄라고 생각했지요. 아무런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풍환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은혜는 하나님 안에서 자녀가 되질 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는 건강한 날 동안에 주님을 모른 채 바쁘게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분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돌아왔고 이제는 하나님 안에 하나 됨을 회복하였습니다. 모든 은혜는 진정한 관계회복에 출발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병 고침을 받기 이전에 먼저 죄 사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깨닫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은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우선인지 아십니다.

우리는 먼저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남편, 아내, 이웃, 친척, 정치가들‥‥

1) 세상은 죄를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다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이고 사람이 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민감해야 합니다. 죄를 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2) 현대 심리학도 죄라는 개념 자체를 거론하는 것조차 꺼립니다. 죄 문제를 말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정신건강에 폐를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사실 네 잘못이 아니다, 당신의 환경이 열악해서 그랬다. 모든 것은 환경과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3) 교도소에 가보십시오.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 때문이다. 누구 때문이다. 재수 없어서 그랬다. ‘한순간의 실수로 그랬다.’ 본성은 괜찮은 사람이다. 하며 자신 안에 罪性을 부정합니다.


☞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따라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롬14:23) 우리 자신 안에는 무수한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중단하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가난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못 배워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너희는 죄를 이기고 극복하라고 했습니다. 〕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죄를 깨닫는 것이고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나는 할 만큼 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생각합니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서기관들이 속으로 하고 있었던 악한 생각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불쌍한 이 사람을 고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아니고 오로지 관심사가 예수를 올무에 잡는 것, 시험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지극히 정상적인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가 누구이기에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말하는가? 나도 그 자리에서 아마 똑같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여서는 안 된다.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사랑도 긍휼도 없는 모습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두고 마땅히 나는 하나님의 기대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 가룟 유다가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보고 네가 이렇게 향유를 낭비하니 옳지 않다 생각했습니다.

●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대적하는 사회입니다. 대통령을 대적하고, 어른을 대적하고, 부모를 대적하고, 선생님을 대적하고, 세상풍조가 무엇이든 제 마음대로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서기관들의 속생각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어떤 질병도 다 고치실 권세와 능력을 지니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심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에 그들의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밝히십니다.

[마 9:5-6]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 말씀대로 그 중풍병자는 일어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 이로써 죄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우리에게 평안과 믿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단지 병 낫고, 일이 형통하고, 선물을 얻기 위한 이 땅에서 나의 만족을 구하는 일이 되면 안 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나의 믿음의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수많은 육신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로막고, 축복의 문을 닫게 합니다. 헛된 욕망, 자존심, 나의 성취, 잘못된 생활 방식, 습관일수 있습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오늘의 본문 9장의 이야기는 8장 끝 부분의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 곧 거라사인의 땅이라고도 하는 곳에 가셨을 때 있었던 사건에 연이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엇입니까? 군대라고 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무덤 사이에 거처하며, 밤낮으로 어디서나 소리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상하기도 하며, 고랑이나 쇠사슬로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셀 뿐 아니라 몹시 사나워서 아무도 접근조차 할 수 없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 그에게서 귀신들을 다 내쫓으시고 그를 온전하고 얌전한 사람한 사람이 되어 앉아 있었습니다.

○ 가다라 지방에서의 거라사인들의 반응은 사뭇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너무나 불쌍한 한 인간을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에게 그들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고침 받은 한 생명에 감사 보다는 잃어버린 2000마리 돼지가 더 귀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재물에 대한 욕심이 불쌍한 인간에게 미치는 축복과 사랑에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동네에 그런 사회에 평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하였습니다.

○ 사람들의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능력도 모르고 담이 막혀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삶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에게 지금 하나님의 준비하신 축복을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잘 모릅니다. [ 저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인정하지 않는 것이 내게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날 어른들을 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

 

▶ 하나님은 저의 치명적인 죄와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제 대신 돌아가시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 예수님은 지금 내가 어떤 심정을 가지고 교회에 나왔는가를 잘 아십니다. 사모하여 왔는지 잠간 방문하러 왔는지‥‥

● 예수님은 단지 지금 내 눈 앞에 건강과 가정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와 친구가 되기 위하여, 나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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