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10:19-25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2013. 6. 2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40년간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마중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뉴욕 항에 도착하자마자 하선하는 길에는 붉은 카페트가 깔리고 군악대가의 연주가 울려 퍼지고 많은 군중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그제야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프리카에서 사냥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는 배에 함께 타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뒤에 홀로 배를 내려 어두운 밤길에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탈 수 있었고 다시 한참을 걸어 자신의 숙소에 돌아 올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 선교사는 숙소에 가서 그대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언가 세상은 잘못되었습니다. 대통령은 사냥하고 돌아왔는데도 굉장히 환영을 받고 나는 당신을 위해 40년 동안이나 어려운 선교생활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마중 나오는 사람 한사람 없었습니다. 주님 무엇인가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이때 그에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립니다. "얘야 너는 아직 네 집에 돌아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이 말에 선교사는 크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선교사의 돌아갈 집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금 은, 보석을 귀하다 하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꿈꾸지만 세상의 금 은 보석보다도, 칭찬보다도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십니다. 이 세상의 보석은 이 세상이 불 타 없어 질 때에 모두 불타 없어질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천국과 그 상급은 영원합니다. [벧전 1:4]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 했습니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그 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써 열어 놓으신 <금생>과 <내생>의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길을 얻은 것입니다. 새롭고 산 길이라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환난 중에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모든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혜의 자리가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의 자리인 지성소에 들어가야 합니다.

■ 지금 이 땅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업이 안 되어 가슴 치는 사람, 취직이 안 되어 한숨 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제가 곤두박질치면서 사업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 수십 명에 이릅니다. 삶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많은 사람이,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예수님 앞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불신이 있습니다.

○ 재물을 따라가는 것이, 좋은 학벌과 재능을 얻는 것이, 세상의 멋으로 자신을 가꾸는 것이 자신의 인생을 더 행복하게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탐심과 이기심으로 눈이 먼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들이 보기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별로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톨스토이의 글 중에 어떤 청년이 사자에게 쫓기다가 우물 안으로 들어가 칡넝쿨을 잡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우물 밑에는 구렁이들이 우글우글한 것입니다. 그리고 때마침 흰쥐와 검은 쥐가 교대로 나타나 자신의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위기에 가운데에도 청년 마침 우물 벽을 보니 벌집이 있어 맛난 꿀을 흘려내는 것입니다. 청년은 꿀맛에 빠져 세상의 시름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 흰쥐는 낮이 고 검은 쥐는 밤입니다. 세상이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허무한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히 10:22-23]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는 것은 피 뿌림을 말합니다.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 함은 진리를 배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마음(진실한, 가식 없고 변함없는 마음)온전한 믿음(확실한 믿음, 의심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믿는 도리(주님만 의지)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잡느냐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됩니다. 세상의 허망한 것,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붙들면 그 대가를 받게 됩니다. 굳게 잡아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시편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 중앙대 공예학과를 졸업한 박은희 집사는 자신도 working mom이 되고 싶었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좀 여유가 생겨서 두 아이를 앞에 두고 물었답니다. 큰 딸이 말하기를 ‘주위에 일하는 엄마들 보니까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아! 그러니 엄마가 집에 있어주어야 해!’ 반대하고, 동생 현영은 ‘내가 돈 벌어서 엄마 다 줄게 일하지마!’ 하더랍니다. 박은희 집사는 어린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의 책을 접하는 것이 생각의 혼란을 가져올까 두려웠답니다. 대신에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답니다. 공부, 공부 하지 않았답니다.

[신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사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 박은희집사는 기도로 섬기고 재물로 섬겼습니다. 딸 趙鉉이는 피바디 음대를 마치고 하버드 박사과정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趙鉉榮은 중학교1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지만 영어는 0점이었습니다. 고등학생 과정 중에도 진로를 정하지 못해 방황하던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간구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었던 것입니다. 스탠포드라 하면 경제학으로 미국 최고의 학부입니다. 그리고 ‘ 나는 하나님의 가능성이고 싶다.’ 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working mom 이든 아니든 부모의 과제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결단을 이끌고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 재물이 있는 자는 재물을 자랑하고 재능이 있는 자는 재능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이 헛된 줄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와 귀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재물을 건강을 가져가시기도 합니다. ▷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지 못하고 사람의 방식으로 취한 재물과 지위 명예는 허망한 것이고 부끄러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아브라함처럼 시험을 통과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예와 재물은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2]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는 “함께 나님께 나아가자”라는 권면의 말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주님께서 임하시는 날입니다. 우리는 '그 날' 이 다가오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서로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야 합니다.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나 혼자만 잘하면 되지' 라고 하는 생각은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생각입니다. 혼자 신앙생활 잘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석탄 난로에 석탄이 함께 있음으로 뜨겁듯이 우리는 함께 하여야 합니다. ○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도 교회에 자주 빠지면 신앙이 식어집니다. 교회에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가운데 믿음이 약한 자라도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그리 강한 새가 아닙니다. 날개도 약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러기는 새 가운데 가장 멀리 날아가는 철새입니다. 일 년에 수천 km의 머나먼 장거리를 왕복해서 날아야 합니다. 기러기는 날아갈 때에 언제나 V자 형으로 날아갑니다. 그 까닭은 먼저 날아가는 새가 공기의 저항을 뚫어주기 위함입니다. 앞서가는 기러기가 힘이 들어 지치면 교대하면서 날아갑니다. 조류학자들에 의해 기러기의 대형처럼 날아가는 것이 혼자 날 때보다 71%나 더 많이 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 개인이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은 무기력합니다.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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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2:1-13  <그리스도의 정병>    2013. 5. 26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입니다. 종종 신문을 보면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무릎의 연골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거나, 손가락 혹은 발가락을 절단한 사람들이 보도되곤 합니다.

심지어 전과자는 병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악용하여 일부러 죄를 짓는 인간도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에게 두 가지 정치적 약점이 있는데 하나는 여자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병역을 기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남자는 좋으나 싫으나 한 번은 군에 가야 합니다. 백만 가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강인함과 용기가 없다면 소인배 졸장부일 뿐입니다. 국방은 하나님이 이 나라에 세우신 귀중한 조직입니다. 

[딤후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출애굽기 12:40-4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애굽 당시 그들은 노예였고 농민이었습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유명 연예인의 딸이 엄마의 얼굴을 볼 시간도 많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자기를 위하여 별로 해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딸은 자신의 어머니가 유명 연예인인 것을 자랑스럽다 했습니다. 어머니가 유명 연예인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몸가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란 고귀한 직책입니다. 대통령이나 재벌이나 지식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 증인으로 군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왔으니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영적전쟁 없이 싸움이 없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우리  하기에 달려있습니다.


▶ 그리스도 정병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인이 일단 국가로부터 부름을 받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집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야 합니다. 개인적인 자기의 생활습관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길었던 머리도 잘라야 하고, 좋아하던 옷도 벗어야 합니다. 늦잠도 자지 못합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보고 싶은 것 마음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친구도 마음대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앞에 와서 열매를 구한 적이 있습니다. 열매가 없었습니다. 사실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 했습니다. 모든 시간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한 까닭에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 아무 것도 내 놓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드릴 시간을 비워 두어야 합니다. 바울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사적인 일에 분주해서 하나님에게 드릴 아무것도 없다.”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직장을 통하여서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고, 가정에서 삶의 휴식과 안정을 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직장도 가정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감에 있어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직장을 주신 것입니다.


● 나 자신을 위해서, 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것도 중요하고 ○ 아내를 기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 아담이 하와의 마음을 맞추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세상의 기쁨, 아내의 기쁨을 구하다가 낙원에서 쫓겨나고 수고하고 땀 흘려야 먹고사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을 위하여, 세상에 한 푼 더 벌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나의 일을 감당치 않는 사람을 우리는 에서와 같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다니엘은 많은 왕족과 귀인들과 함께 바벨론 포로로 끌고 갔는데,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뜻을 정하였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 사소한 문제 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엄청난 일입니다. 그들은 뜻을 정하고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노력을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결심을 하면 실천하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하나님만 가까이 두려워하였습니다.


1.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네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까닭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사실을 다 아는데  ♠ 예배를 소홀히 하고, 약속을 어기고, 이기적이고 싸우는 것. 이것이 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업신여기고 교회를 업신여기고 함부로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 다윗은 골리앗과 블레셋 군대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소리에 분해서 싸우기를 자청했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님의 군사는 고난을 통해 훈련받아야 합니다.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했습니다. 청년들이 군의 부름을 받게 되면 먼저 훈련소에 들어갑니다. 훈련소에서의 훈련은 참으로 힘이 듭니다. 하루 종일 고된 훈련을 받습니다. 전투훈련, 극기 훈련, 유격훈련, 사격훈련, 정신훈련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훈련을 받습니다. 힘들어도 이런 훈련을 받아야만 좋은 군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적과 더불어서 싸워서 승리하는 군사가 될 수가 있습니다. 머릿속에 얼마나 들었느냐 보다도 더 힘 있는 것은 자신을 이기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각오해야 됩니다.

[로마서 8:17]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

[디모데후서 1:8]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쫓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4:8]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군사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한 줄로 받아들이면 넉넉하게 이기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습니다.전천후의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면 먹고 사는 일로 고난을 당하는 일을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것이 좋습니다. 갚으심이 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 했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위한 고난을 피하지 마십시오!

[신 20:5-8] 유사들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새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치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여자와 약혼하고 그를 취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취할까 하노라 하고 유사들은 오히려 또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떨어질까 하노라 하여

썩은 군사는 자기 맘대로 합니다. 고향 생각이나 하고, 애인 생각이나 하고, 자기 사업이나 공부나 하고, 마음을 다른데 둡니다. 충성심이 없습니다. 상관에게 항명하고, 질서가 없고, 오합지졸입니다. 사고뭉치입니다. 안전사고가 자주 일어납니다. 심하면 동료들에게 총을 들이대고, 나중에는 아군과 적군의 분별을 못해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강한 군사, 용맹 있는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일, 이 모두가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한 훈련인 것입니다. 좋은 군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딤후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경기자에 비유했습니다. 경기하는 사람이 이일 저일 다른데 관심 두고 한 눈 팔면서 곧바로 달리지 않으면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선물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죽음 앞에 겁을 내는 사람은 아직 예수님의 생명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 전쟁터에서 군마 불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휘관이 명령하는 대로 칼과 창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 나갑니다. 말이 두려움으로 돌이킨다면 이미 전쟁은 진 것입니다. 화랑정신에 임전무퇴라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죽을지언정 지고 돌아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 67년에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6일 전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이스라엘 학생도 아랍의 학생들도 기숙사에서 짐을 싸서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학생들은 국가를 위하여 싸우기 위하여 돌아갔고, 아랍의 학생들은 징집될까 두려워서 어디론가 피신했습니다.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기드온의 300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장차 가게 될 영원한 처소를 준비해 두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세상의 먹고 사는 일에 초월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늘에 상급을 쌓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딤후 2:8-10]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를 군사로 부르신 분이 누구십니까?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주님께서 우리를 군사로 불러주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신 분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充滿이니라.


[딤후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은혜 속에서 강하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충성되다 이름을 얻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충성된 증인이었고 그리고 또 충성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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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12-20  <충성되이 여기심을 입은 자>                   2013. 5. 19

[요엘 2:28]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야할 길, 해야 할 소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관심과 열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난한 자를 보고, 병든 자를 보고, 억울한 자를 보고 어찌할꼬!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십니까? 내 마음에 뜨겁게 일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거룩한 부름 (calling)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에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사명을 발견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느 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그는 조국 예루살렘성이 다 허물어져 황폐화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합니다. 동족들이 하나 되지 못한 것, 고난 받는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합니다. 그는 자신이 백성과 민족을 위하여 도움이 되기를 구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성 수축을 위한 일을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이 됩니다. 유태인의 혈통으로 태어나 포로 된 이방나라에서 왕의 최측근에서 일하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높은 관직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건축자로 그를 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술 맡은 관원이 되어 열심히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느 2:1-3]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그는 4개월이라는 기간을  여느 때나 다름없이 아닥사스닥 왕에게 술을 올리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술을 올리는 생활로 4개월이 되는 어느 날 왕이 묻습니다. ○“그대의 얼굴에 왜  수심이 있는가?” 그 날 갑자기 수심이 생긴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그 동안 그는 자신의 수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그의 수심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기도를 시작하고 술 관원이 되고 4개월 동안 그는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그는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날도 그는 기도를 마치고 왕 앞에 왔습니다. 4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그는 아닥사스닥 왕에게 자신의 소원과 문제를 말할 많은 만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자신의 내면의 소원을 말할 기회가 왕의 입에서 나오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만이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지금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용기를 내어 자신을 예루살렘 지역 총독으로 보내어 성을 다시 수축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간청합니다. 왕은 느헤미야를 신임하였기 때문에 허락하여 그 일을 감당케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요셉은 17세의 나이에 자신의 형제자매들이 부모가 자신을 향하여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자신의 가족을 기아에서 구출하는 사명이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는 형제간의 불신과 불화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고, 생면부지의 땅에서 아무도 의지할 이 없고 소망이 보이지 않는 땅에서 감옥살이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 사람들을 위하여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로하고 돌보는 주인 앞에 충성된 삶을 삽니다. 거기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혀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때가 되니 하나님은 요셉을 옥에서 불러내어 애굽의 총리대신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형제들, 동족들을 살려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직임을 맡기시기 위해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요셉에게 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나에게 주어진 나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보다는  불만족스러워 하며 √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지 않았다. √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생각합니다. 더 좋아 보이는 것, 멀리 있는 것, 새로운 것을 찾아 자신의 상황을 벗어나려 애를 씁니다.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하셨습니다. ○ 지금 가능한 예배의 시간들과 봉사를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이 더 좋은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위치, 직임, 재능, 이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순종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께서 무엇을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이 3년이 자신을 새롭게 정립하는 기도의 시간이었다고 보여 집니다. ○분명한 것은


1. 충성되다 인정받고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린 사람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그의 삶의 제1가치로 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두 가지로 다시 구분해 보면 하나는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세계수준의 그리스도인' 이 있습니다. 하나는 (Worldly Christian)이고, 하나는 (World-Class Christian)입니다.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언제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본인의 필요, 축복 그리고 행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나 우선’(me-first)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보다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다른 많은 종교와 구분 되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구하는 데 있습니다. 깨달음, 복을 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알리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첫째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이웃 사랑, 선행도 아니요, 사회봉사도 아니요. 헌물도 아닙니다. 모든 축복에 앞서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입니다.


▶ 예수를 만나기 전 바울은 세상으로 말하면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빌 3:5-6]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①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② 공회원이었고, ③ 당시 최고의 학파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가 가진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 모든 것들이 복음의 가치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가 가졌던 모든 것들이 배설물과 같더라  말합니다.


유정란과 무정란은 겉으로 보기에 구별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므로 새 사람이 되어지고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기독교인은 아직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모든 것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 아브라함은 제사를 위하여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삼일 길을 가면서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전체를 원하십니다. 나의 95%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의 100%를 원하십니다. 물론 저의 친구교회 성도님들은 힘써 주님을 믿으려 애쓰시는 것을 압니다. 이것을 우리는 95%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겨둔 나머지 5%가 있습니다. 나만의 여유로운 시간들, 나의 꿈, 나의 성공, 아니면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나쁜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드리지 못한 5%. 그것은 실제로는 나의 삶에 가장 귀한 한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드리지 못한 그 5%가 평생에 나의 신앙을 붙들고 자라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 제가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가야 했습니다. 저의 학업을 인도해주고 진로를 상담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부끄럽게 살지 않기 위하여 대학을 가야 했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병들었습니다.  6개월을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제가 믿음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았고나의 인생의 제1 가치는 나 자신의 명예와 성공이었습니다. 제가 침상에서 일어나 교회에 나올 때 저는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주일날 공부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나의 명예를 드립니다. 나의 성공을 주님께 드립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삶이 내 인생에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십니까? ◉ 주 5일 근무제가 되면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토요일 쉬게 되었습니다. 토요일 마음 놓고 쉴 수 있으니 우리는 <금요 심야 기도회>가 늦게 끝나도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의 열심이 20-30년 전 과거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열심이 식은 이유가, 충실한 예배 참여와 봉사를 못하는 이유 √ 교회가 멀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토요일도 주일도 자신은 자신을 위하여 할 일 다 하면서  √주일 날 교회에 오가는 시간이 아깝고,  √토요일은 텅 빈 여가시간인데 금요일 심야기도에 나오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말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저의 청년시절에는 청년들이 목요일 철야집회를 가졌습니다. 당시에는 토요일까지 출근해야 했습니다. 철야는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도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먼 곳에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집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으며 늦게 잠자리에 드는 사람도 교회에 나오는 시간은 아까와 합니다.


 바울은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했습니다. 

◎ 미국의 미시간 호수에서 배 한척이 침몰된 일이 있었습니다.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배의 침몰과 함께 호수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북서부 대학의 한 학생이었던 수영선수 한 사람이 사력을 다하여 23명을 구출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R.A.토레이 박사가 로스엔젤레스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래 전 미시간 호수에서 있었던 배의 침몰 사고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그때 젊은 대학생이었던 수영 선수의 용기와 인간애를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그 젊은이가 노인이 된 채 앉아서 그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토레이 박사는 그 장본인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사건을 통하여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단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은 일이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스스로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요" 라고 말합니다. 본래 예수를 만나기 전에 교회를 핍박하고, 다른 사람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죽이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독생자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어, 악하고 악한 그에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주셨습니다. 또 그를 충성되이 여기사 직분을 맡기기까지 하셨습니다.


2. 충성되이 여김을 받는다 함은 변치 않는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재주 있고, 시간도 많고, 재물이 있어서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입니다. ○ 능력을 주십니다. 충성되지 못한 자는 좀 지나면 주신 것도 다 거두어 가십니다.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딤전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하나님은 "만세의 왕" 이십니다. 변함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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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3:6-13    <성도의 교제> 2013. 5. 12

* 어미 새와 아기 새 : 평강(Peace)을 주제로 그림 컨테스트가 있었습니다. 최종 결선에 두 그림이 후보로 올라왔습니다. 하나는 고요하고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 있는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바람이 치고 풍랑이 이는 바닷가의 가파른 절벽이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자! 어떤 그림이 평강이라는 주제를 가장 잘 나타내었을까요? 대상은 폭풍 속 가파른 절벽이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절벽 안쪽 움푹 파인 곳에 조그만 새둥지가 있고 비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어미 새의 품 안에서 고요히 잠자고 있는 아기 새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평강은 아무 어려움이나 문제가 없는 고요한 푸른 초원과 같은 평화가 아니라 거친 파도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속에서도 어미 새로 인해 평강을 누리는 아기 새처럼,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보호를 받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 마음의 평강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평강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구원하십니다. 신앙은 3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신앙- 청년신앙- 아비신앙입니다. 어린아이 신앙은 늘 연약해서 잘 넘어지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단계입니다. 청년신앙은 죄를 깨닫고 배우는 단계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자녀를 낳고 기르는 아비의 신앙입니다. 전도는 귀한 활동이지만 전도에 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년 말에 보면 열매가 없습니다. 자녀를 낳고 양육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는 단계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살전 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바울은 무엇 때문에 그리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섰다는 것입니다. 환란이 와도, 그들이 바라는 소망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원하시는 하나님이고, 열매는 좋은 것이지만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하여서는 나무가 건강해야 합니다.

√시류에 흔들리고, √작은 유혹에 √환란 가운데 연약해 넘어지는 신앙은 좋은 열매를 맺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 안에 굳게 선 신앙인으로 자라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바울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일꾼인 디모데를 파송하였습니다. ▶ 신앙은 말씀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살전 3:2-3]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좋은 열매 맺는 나무를 얻기 위하여서는 가지치기를 해 주고, 소독을 하여 나무를 깨끗하게 하여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신자의 신앙을 정결하게 하고 세우는 일이 말씀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요17:17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 이다"

○ 내가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 영적인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 위에 세워지지 않은 신앙은 결국은 환란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넘어질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유혹이 올 때에 짓눌려 자라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많은 씨를 뿌렸다 하더라도 헛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낳는 아비의 신앙이 되려면 우리 모두는 말씀을 질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은혜의 강물>이 있습니다. TV를 키면 수많은 기독교 방송이 나옵니다. 수많은 기독 서적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말씀들이 <생명의 물>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지만 그 모두가 나를 건강하게 하는 좋은 음식은 아닙니다.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은 말씀을 들을 때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감사하게도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은 말씀을 받을 때 헛되이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 말씀을 전하는 자가 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며 준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더라도 - 다 좋은 말인데 나는 나요 - 하고 듣지 않는 다면‘밑 빠진 독에 물 붙기’가 될 것입니다. 열매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은 다 부드러운 겸손한 밭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 결단하는 자세로 들어야 합니다.

▶ 덧붙여, 우리의 영적 성숙은 말씀만 잘 전하고 듣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기는 말씀과 성령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은 기도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에 바울은 열정적인 전도자이며 모든 일에 거침없이 돌진하는 탱크 같은 사람입니다.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눈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행 20: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고후 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딤후 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살전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 교회의 부흥도 한 사람의 변화도 모두 성령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바울의 눈물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위하여, 우리의 형제자매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 자녀와 이웃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형제자매를 위하여 가장 귀한 선물은 기도입니다.

○ 만약 내가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 나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는 까닭입니다. <둘> 나에게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는 까닭입니다. 중보기도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귀한 것입니다.

▶ 세 번째로 있어야 하는 것은 교제의 시간입니다.

[살전 3:12-13]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도들이 그 받은 은혜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과 교제하며 위로를 받고 경험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늘 세상의 먹고 사는 일 육체의 즐거움을 이야기 할 뿐입니다.

● 우리는 나눔을 통하여 나는 오히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동일하게 다른 이들의 삶속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중국의 많은 가정교회에서는 예배를 다 마치고 다음 순서가 더 이상 없는데도 사람들은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교회에 남아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함께 있고 싶어요 : D. L. 무디가 하루는 서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5살 먹은 그의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무디는 그 아들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얼 원하니, 얘야?'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서 들어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루에 앉아서 조용히 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그는 아버지와의 교제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자녀들과 교제하고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 사람들이 “교회가 무슨 기업 같아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사랑을 베풀며, 서로를 더 이해하고, 더 품어주고 안아주는 곳이 되어야 할 터인데, 교회 안에서 조차도 인격적인 나눔이 없는 생존 경쟁의 모습, 교회가 자신의 사이즈가 키우면서 물질화된 모습을 보면서 하는 조롱하는 말입니다. 우선 교회 지도자의 잘 못일 것입니다. * 익명의 그리스도인, 부담 없는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예배드리는 일이 마치 사무실에 사무를 보듯 잠깐 들리는 장소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형제자매가 함께 화목하며 나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행 2:44-46]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koinonia" {科伊欧尼亚)라는 단어는 '친교, 나눔' 등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입니다.

"koinonia" 는 특별히 물질을 나눔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제를 통하여 형제의 기쁨과 슬픔, 아픔과 어려움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용서를 배우고, 낮아짐을 배우고, 존경을 배우는 것입니다. 성도 간에 친밀한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로하기 위하여 디모데를 보냅니다. 그들이 환난가운데서도 배교하지 아니하고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그러한 교인이 되도록 믿음을 굳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저들이 믿음 위에서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또한 자신이 위로를 받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빅토르 프랑클 弗兰克尔 (Frankl)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때의 체험담인 "밤과 안개"라는 책에 이런 경험을 고백하였습니다. ‘ 수용소의 유태인들은 병으로 죽어가고 차례차례 가스실로 보내져 학살되고 있다. 나 자신도 영양실조로 몹시 쇠약해졌으며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 죽음의 날만 기다리는 형편이다. 이때 나는 체포되는 날 뿔뿔이 헤어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내를 생각하였다. 나 자신도 고통스럽지만 여자의 몸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며 날마다 기도를 할 때, 이상하게도 나 자신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고 약한 몸을 일으켜 노동을 감수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계속하여 프랑클 교수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누구든지 좋으니까 그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르며, 그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 가지면서 살아 보라. 그대는 예상치도 않았던 힘이 어디선가 솟아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오늘 누군가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이 시간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귀한 시간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타고 있고, 국가 부도에 닥쳤을 때 다 같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있던 8명과 그 배에 함께 있던 택함 받은 동물들만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방주는 그들의 공동 운명체입니다. ○ 가족의 구성원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역할이 있습니다. ● 가정이나 회사나 나라는 이와 같은 건강한 정신과 믿음을 가진 신실한 이들에 의하여 가정을 사랑하고 회사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안정되고 발전되어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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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6:1-4  <예수 믿는 가정>           2013. 5. 5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어버이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하실까요?” 그러자 아이들의 대답은 거의 같았습니다.  “새벽 어두울 때 일어나 식구들을 위해 밥 짓고 우리들을 학교 보내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저녁 늦게까지 수고하신 후에 제일 늦게 잠드십니다.”  선생님은 다시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남을 위해서 일하시는데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한참 침묵이 흐른 후에 한 어린이가 흐느껴 울면서 “선생님, 우리 어머니가 너무 불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아이들도 울기 시작해서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순박한 시절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십계명입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 이라는 말씀에 십계명에서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여섯 가지의 계명 중에 첫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계명 중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십계명 중에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 계명이 있는데, 약속이 첨부되어 있는 계명은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까?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축복받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함입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를 과하게 마시고 술에 취했습니다. 술 먹고 난 다음에 술주정하는 형태가 여러 가지인데 노아는 옷을 벗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옷을 훌렁 벗고 드러누워서 잠들었습니다. 함이 그 모습을 먼저 보고 나가서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취해서 옷을 발가벗고 있다고 와서 한번 보라고 사람들에게 그 추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늦게 들었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옷을 뒷걸음으로 들고 가서 아버지에게 덮어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술에서 깨었습니다. 보니까 그 모양입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에게는 노아의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야벳은 창대하게 되었지만 함의 후손은 노예가 되어 대대로 불행해졌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이 얼마나 사랑한 자식이었는지 모릅니다. 

[삼하 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왕상 1:6]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압살롬이 얼마나 다윗의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양을 받지 않았습니다. 권력욕에 눈이 멀어 압살롬은 장성하여 아버지를 몰아내어 죽이고 자기가 임금이 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군대를 모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있는 아버지를 잡아 죽이고 임금 되기 위해서 들어오니까 다윗은 머리를 풀고 신발도 벗고 울면서 예루살렘 성을 떠납니다. 그런데 미처 데려가지 못했던 후궁들이 성에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들어 와서 왕궁을 차지하고 내가 왕이라고 하며 아버지의 후궁들을 다 겁탈하지 않습니까? 그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아버지에게 그렇게 불효하더니 어떻게 죽었습니까?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요압이 창 셋을 가지고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주변에 있던 군사들이 칼로 난도질을 해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우리가 아는 대로 효자 중에 효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이삭을 아버지가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 당시 이삭이 이미 장성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기까지 순종했던 이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얼마나 축복하십니까? 다른 사람은 아무리 파도 물이 안 나오는데 이삭은 파기만 하면 우물이 나옵니다. 그 당시 우물은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거부로 살았는지 모릅니다.



미국 조지 워싱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어렸을 때 그의 꿈은 뱃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멋진 배를 타고, 선원이 되고 마침내 선장이 되고 바다를 헤쳐 가는 그런 사람, 바다의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짐을 다 꾸려가지고 하인들과 같이 이제 배를 타러 나가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큰 뜻을 품고 집을 나가는 아들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들의 손을 잡고 그대로 울기만 합니다.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워싱턴은 그 때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어머니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내 꿈을 좇을 수는 없다.” 꿈을 포기하고 짐을 풀어놓고 어머니에게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미국에 유명한 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머니를 떠났더라면 잘해야 선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큰 뜻을 품고 다 준비했던 것도 버리고 어머니를 따랐습니다. 왜요? 어머니가 나보다 지혜로우니까. 어머니는 나보다 경륜이 있으니까.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꿈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심을 얻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는데 물론 이 세상의 교육도 잘 시켜야 됩니다. 삶을 살아가는 도구가 교육이고,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도구가 직장이기 때문에 그 자녀에게 적절한 교육과 직업을 잘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됩니다. 그러나 좋은 성적 좋은 직장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배움은 <주의 교양과 훈련>입니다. 자녀를 가르칠 때 내 경험이나 내 방법이 아닌 주의 교양으로 훈련을 통해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집도 재산도 주식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 육신의 부모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의 아버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키워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부모로써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상상할 수 없이 악해져가고 있어요. 우리가 겪지 못했던 일을 우리 아이들이 이제 겪을 것입니다. 가정은 대단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우리 아이를 건져내는 것이 부모의 기도에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하고 좋은 믿음을 심어주고 신앙훈련을 해 줄 수 있는 기회는 슬하에 자식일 때 가능한 일입니다.


웨슬레의 어머니가 자녀를 19명 낳았습니다. 수백 년 전 그 당시에는 낳은 자식의 반만 키워도 잘 키운 것인데 19명 다 키워서 다 국가적인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자녀들을 잘 키웠느냐고 물었습니다. 웨슬레의 어머니는 “나는 우리 아이가 그들의 머리가 커지기 전에, 정확하게 말하면 다섯 살을 넘기기 전에 그들의 의지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도록 가르쳤다.”고 고백했습니다.

머리가 커지면 교육이 잘 안 됩니다. <주의 교양과 훈련>은 가능하면 어린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다섯 살 전에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치 입이 좁은 큰 병과 같습니다. 입이 좁은 병 안에 사과를 집어넣으려고 하면 어릴 때 집어넣어서 키우면 잘 자랄 수 있습니다.


●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도록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교양은 가르침이고 훈련은 아는 것을 계속 연습해서 몸에 배게 하는 것입니다. 훈련을 다른 번역에서는 <징계>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부모는 날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평생 기도해야 합니다. 어릴 때 훈련을 시키지 못했더라도 자녀가 부모의 품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명심해야 하는 하나는 ● 자녀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잔소리를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매를 들어서는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아이 바로 잡아 주세요.” 기도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 아이를 변화시키기 전에, 부모인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날마다 기도해라. 성경을 보아라. 주일날 교회에 나가라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성경을 읽는 생활 습관, 기도하는 습관을 갖지 않았다면 제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부모가 스스로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취임 연설을 다음과 시작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결코 직면해 있는 이 큰 어려움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노예해방과 미국통합을 이루어 낼 때에는 늘 읽고 묵상하던 소중한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 성경은 어머니가 내게 유일하게 유산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날마다 읽어 주신 성경구절이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어머니는 부자나 위인이 되기보다 성경 읽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되라.” 고 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두신 단체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 또 하나는 [교회]입니다. 가정은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 가정에서 좋은 신앙인, ○ 좋은 사회인이 되도록 하나님은 부모에게 자녀를 맡기신 것입니다. ○ 가정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격려가 끊이지 않는 가정은 포근한 안식처와 같고,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가정은 들어가고 싶지 않은 감옥과 같습니다. 가정이 따듯한 안식처의 역할을 해주지 못하면 아이들은 거리로 뛰쳐나오고, 가출을 일삼게 될 것입니다. ○ 요즘 학교에서는 폭력이 끊이지 않고, 청소년 범죄가 날로 흉포해 지고 있습니다. 왕따 현상도 실제로는 가정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생활을 배우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단순히 학교에 맡기고, 법의 힘을 빌려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 탈선의 근본적인 문제는 가정에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의 단절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어떤 집에서는 부부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고 핸드폰 문자로 자신의 필요만을 의사표시 한다는 [비극적인 가정]의 모습을 본적도 있습니다. ○ 부모의 맞벌이 생활은 자녀들과 대화할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방에서 나오기를 거부하고 컴퓨터나 폰을 친구삼아 지납니다. ○ 많은 가정의 자녀들이 더 이상 부모와 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함께 손잡고 놀이 공원에, 산과 들로, 야외로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기성세대는 유교 사회 속에서 권위주위에 익숙해 있어서 순종을 요구하는데 익숙하지만 자녀들은 부모가 다니는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부모의 간섭과 제재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미국에서 공부시킨다는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미국의 문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와 함께 교회에 가고 함께 켐핑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친밀감과 신뢰가 쌓이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제가 중학교 어린 시기에 새벽신문을 돌린 일이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의 집에서는 가족이 찬송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무 부러웠습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배하는 가정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의 주인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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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5:15-21   <성령 충만을 받으라.>       2013.4. 28

[에베소서5:16,17]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시32: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아니하면 헛된 수고와 경제적인 낭비를 하게 됩니다. 부끄러운 일들 당하게 됩니다.○ 요즈음 집 가진 거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평생 노동하여 돈을 벌어 집을 사고 나서 빚쟁이가 된 것입니다. ○ 돈 벌어 오라고 중국에 보냈더니 딴 사람 만나 이혼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 기러기 아빠가 정말 기러기가 됩니다. ○ 한 때 금값은 떨어지지 않는다. 금에 투자하라 한국은행에서 금을 많이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세월을 아끼라.’했습니다 시간이 소중합니다. 시간은 물질보다 귀합니다. 잃어버린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 물론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을 배웁니다. 그러나 이 성경 역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도 제대로 모르고 제 생각대로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옳음이 하나님의 옮음이 아니고 나의 최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장님과도 같습니다.

 연길에 300개의 교회를 건축하며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절반의 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많은 성도를 전도했다 큰 교회를 세운다. 말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수평이동입니다. 건축을 마치고 쓰러지는 분을 보았습니다. 무리하게 건축을 했으나 결국 지금 대출을 상환 하지 못하여 경매에 넘어가게 된 것을 봅니다. 

김하중 대사는 아들을 결혼 시키는데 성령의 말씀에 따라 축의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명박 대통령초기에 통일부 장관 청문회를 거칠 때  그가 얼마나 청렴한 사람이었는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①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하셨습니다.  ②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 믿었고 율법을 외우고 성전이 멸망할 때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않고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다.”했습니다.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세월을 아끼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보호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환난이 있습니까? 위기가 있습니까? 자녀 문제입니까? 건강 문제입니까? 앞날 문제입니까? 결혼 문제입니까? 성령은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어떤 위기와 어떤 어려움에도, 재능도 힘이 없어도 알지 못하는 일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기 위해, 가장 귀한 것을 위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 처음 소양강 댐이 만들어지고 얼마 안 되어 먼 길을 돌아 춘천 시내에 가야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버스가 많지 않았고 아무 장소에서나 세워 주던 시기였습니다. 집 문을 나서니 이미 버스가 이미 출발했는데 이 아주머니 달려오며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기사가 차를 세우고 아주머니를 태웠는데 이 아주머니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더니 갑자기 얼마 안 가 버스를 세워 달라 애걸하였답니다. 조금 후 사고로 버스가 소양호에 빠져 모져 모두 죽었습니다. 아주머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 이희돈 세계무역 센타 금융담당 부총재가 9.11 당시 주스 한 잔 잘 못 마시고 설사와 복통으로 그날 회의에 참여하지 못하고 늦게 빌딩에 도착하였을 때는 납치된 비행기가 두 번째 빌딩에 부딪치는 시간이었고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때도 그는 맨해튼의 지하통로를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을 홀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 간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을 받습니다. 처음 성령을 받는 것을 성령세례라 합니다.  한번 성령이 우리 심령에 오시면 성령은 떠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 심령에 내주하십니다. 성령의 인침이나 성령의 內住는 일회입니다. 반복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성령 充滿해야 합니다. ● 삼손이 성령 충만할 때는 권능이 나타나 나귀턱뼈 하나로 적들을 1000명을 죽이고 승리 하지만, 성령이 떠났을 때에는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혀서 눈이 뽑히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 제자들도 성령이 충만하지 못할 때에는 두려워서 골방에 숨었지만 성령이 충만할 때에는 담대하게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 그런데 성령의 충만은 반복적 충전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을 경험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일시적으로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內住만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얻어 살수 없습니다. 충만해야 합니다. ○ 겨울철에 빈집의 난방 보일러는 동파를 방지하기 위하여 작은 불만 유지합니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들어와서 생활 하려면 장작이나 석유 가스를 활활 때야 합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자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목사님부터 평신도까지 다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만으로 어리석고 죄악된 삶에서 벗어나고 새생명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은 다 압니다. 문제는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사탄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독버섯이 아름답다고 했습니까? 하와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달콤하다 할지라도 결단코 버려야 했습니다.


정선에 가면 카지노가 있습니다. 한 두 번의 호기심으로 도박에 손을 댔다가 혹시나 이번에는 한탕으로 회복할까 매달리다 쪽박 차고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不知之數입니다. 어찌 믿지 않는 자들의 문제이겠습니까? ○ 기독교인 연예인이 자살하고, ○ 고3 학생이 게임중독에 빠집니다, 젊은이가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심으로 사탄 마귀의 유혹에서 이기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받으라.’이는 수동형이며 동시에 명령형으로 적극적인 구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아니하면 우리 속에 더럽고 추한 욕망을 이기지 못합니다.


☞ 성령 충만은 어둠의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분노가 있을 수 있고, 미움과 상처가 있을 수 있고 슬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만이 있습니까? 성령 충만하지 않은 증거입니다.

대장간에서 철을 두드릴 때 쇠의 불순물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풀무불의 온도가 1200c 라고 합니다. 그보다 낮은 온도에서는 불순물이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잭 하일스 목사님은 어린 시절, 겁쟁이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대단히 불행했습니다. 몹시 가난했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는데 식구들을 버리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졸업하여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는 나이가 21세였습니다. 그의 시골 목회는 너무나 한심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으나 전혀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 열매도 없는 채 일년이 지나갔습니다. 그의 영혼은 너무나 곤고했습니다.

그 때부터 잭 하일스 목사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며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밤마다 교회 부근 숲에 나가 능력을 얻기 위해 울면서 간구했습니다. 소나무 숲과 모래 언덕을 오르내리며 수많은 밤을 능력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능력을 사모한 나머지 몸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먹으면 토하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은 밤새워 기도하며 솔밭에 엎드리어 해가 뜰 때까지 기도하기를 ‘주여, 어떤 값이라도, 무슨 대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위해서라며 치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목회에 능력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서 변화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교회는 새신자가 늘어가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열심히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점점 저를 강하게 사용하셔서 미국에서 가장 큰 주일학교가 있는 인디아나주 해몬드 제일 침례교회를 맡기셨고 수만 명의 영혼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고 살아갑니까? 자신과 자녀와 가정을 우선순위에 놓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보다 나의 일만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보다 가정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나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십일조를 내면 당신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입니까? 당신이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시간을 간구하였다고 당신의 사업에 손해가 가게 하겠습니까?


◎ 현대인의 특징 중 하나는 바쁘고 급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에 대하여 아주 조급해 합니다. 운전 중에 차가 막혔을 때,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릴 때, 심지어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들을 때도 조급해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바쁘거나 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느긋합니다. 아주 천천히 가려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 느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데 얼마의 시간을 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헌신입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10%만을, 50%만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100%를 원하십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거룩한 영에 이끌림을 받아 사는 삶 이어야 합니다.


‘열매’는 결과입니다. 성령의 열매란 성령의 ‘충만한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충성됨, 부드러움, 절제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열매를 충실히 맺고 있다면 성령이 충만한 삶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성령이 충만한 모습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5:19-20]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에드워드 모트는 영국인입니다. 그는 37세가 되도록 캐비넷 제조공으로 철공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남은 부모 잘 만나서 화려하게 잘만 사는데 나는 뭔가? 이렇게 매일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앞으로 내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단 말인가?"

어느 날 울적한 마음으로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마음이 끌려 작은 교회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그는 거듭나는 체험을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그는 영안이 열렸습니다. 과거에는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늘에 속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변화된 삶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 환경 조건을 그대로였지만 자신이 변화됨으로 그는 행복한 철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인생은 점점 풍성하게 되었고, 자기가 일하는 철공소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큰 사업가가 되었고, 55세 되던 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곰곰이 생각하여 자신의 온 재산으로 교회를 지어 봉헌합니다. 그날 찬송시를 하나 지었는데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성령님이 충만한 삶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사람의 고상한 인격도 귀하지만, 성령이 주시는 열매는 세상의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입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인해 다리를 다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수도사가 되고 싶었지만 학력 부족으로 입회 자격이 되지 않았다. 수도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간청 끝에 수도원의 요리사로 들어갔다. 그는 비록 수도사가 아닌 요리사로 수도원에 들어왔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는 수도사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수도를 하는 동안에 그들을 위하여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를 만들었다.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그가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수도사가 될 수 없었던 그가 어떻게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을까? 그는 그의 모든 이론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높아지려는 자기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켰다.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장을 보러 나갈 때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좋은 식품을 싸게 구입하게 하셔 수도사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설거지를 하면서는 “주님, 제가 그릇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제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씻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방에 불을 지피면서도 “주님이시여, 이처럼 성령의 불이 제 마음속에도 활활 타오르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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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5:13-26   <성령을 좇아 행하라>     2013. 4. 21


어떤 집에 앞뒷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앞집에 새로 시집 온 며느리가 부뚜막에 기름병을 떨어뜨려 깨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집에 아까운 기름을 버리고 눈물짓는데 시어머니가 그럽니다. 내가 좀 전에 쓰고서 치우지 않았구나. 내 잘못이다. 시아버지가 글쎄 말이다 나도 떨어질까 위험하다 생각했는데 깊이 밀어둘 껄 내 잘못이다. 아들이 들어오면서 보고 말합니다. 제가 미리 미리 선반을 매야 하는데 게을러서 그랬어요. 내 잘못이예요.

뒷집은 양조장을 하는 집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술밥을 솥에 잔뜩 앉히고 새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했습니다. 경험이 없는 새댁이 솥이 깨지는 것도 모르고 불을 땠습니다. 시어머니가 달려와 욕을 해댑니다. "도대체 넌 시집오기 전에 뭘 배웠니 솥이 백 개라도 못 당해 내겠다." "제가 일부러 그랬습니까?" 그러자 시아버지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어디라고 시어머니한테 말대꾸냐?"라고 호통 치자 며느리는 "사람이 말도 못하고 살아야합니까"라고 대꾸하자 신랑이"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귀야?" 하며 따귀를 올려 부쳤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악을 쓰며 "날 죽여라" 소리 지르며 덤비고 신랑은 신부를 두들겨 팼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1)사랑 2)희락 3)화평 4)오래 참음 5)자비 6)양선 7)충성 8)온유 9)절제 [지.정.의]로 되어진 전인격 변화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정]: 사랑 희락 화평 양선 온유  [지]: 오래 참음  [의]: 자비 충성 절제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본이 사랑입니다. 열매가 있으면 인격의 변화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받고 존중받고, 이해받으며 살고 싶어 합니다. 세익스피어는 “사랑이 시작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으며 사랑에 대한 순수한 기쁨만으로 충만해 있다. 사랑의 첫째 조건은 그 마음의 순결함이다.”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그렇게 내 마음과 생각과 삶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입니다. 천국은 사랑으로 충만한 곳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나 사람은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탐심과 시기 질투, 분노와 허영, 교만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나라와 대통령은 나에게 전쟁과 배고픔에서 자유를 줄 수 있겠으나 [탐심과 시기 질투, 분노와 허영, 교만] 이라는 ‘죄’의 속박에서 나을 자유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 사람들은 본성으로 그 마음속에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사람은 그 마음속에 더 많이 갖고 싶어 하고, 남의 말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살기 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을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탐욕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바라보면 탐욕이 생깁니다. 유혹을 받을 만한 장소에 가서 자꾸 유혹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유혹에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 놀랍게도 사람의 본성은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배우지 않아도 쉽게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 사람은 자신의 욕심과 무지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해지고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된 존재입니다.


●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한 대만 더 피고. 내일부터는‥” 그 다음 내일이 오면 “아이고~ 내일부터‥다음에는‥” 술에 빠져 술잔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술을 안마시겠다고 각오를 하면서도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친구의 손에 끌려가면서 “조금만 마셔야지‥ 오늘 하루만” 그리고 들어가 만취되어 나옵니다. <내일은‥> 이 말은 사탄이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유혹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고민거리는, 우리의 죄 된 본성에 따라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을 좇아서, 살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탐욕을 이기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참 자유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가 온 것은 우리로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갈 5:16]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24-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시편 119:101-102]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이는명령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인간의 의지를 말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살아가는 이 땅이 어두움입니다내 안에 있는 잘못된 악한 의지를 제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원하십니까? 우리 다 연약해요. 본성을 거부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육체의 욕망과 세상 유혹을 의지적으로 버리기로 마음 먹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십시오! 선한의지를 지니고 좋은 것을 취하여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령이 도우실 것입니다. 

기드온의 300용사가 질그릇 항아리와 횃불을 가지고 전장에 참여하였습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입니다. 나라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깨어질 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300 용사사 용기있는 선택을 하였을 때 성령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 김유신이 후회를 하고 기생집 출입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오랫동안 가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고된 훈련을 하고 말위에 타고 그만 잠이 들었는데 말이 제 발로 기생집으로 갔어요. 기생이 버선발로 뛰어 나와서 “아이고~ 서방님 오십니까?” 하는데 정신을 바짝 차려 보니까 기생집에 와있는 겁니다. 그때 김유신은 말에서 내려서 칼을 뽑아 가지고서 자기 사랑하는 말의 목을 쳤습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김유신은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한 결단을 가졌기 때문에 그가 유혹을 이기고 삼국을 통일하는 위대한 유업을 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을 성령이 돕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유혹을 물리치려면 마음에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 이용규 선교사의 책에 몽골의 한 자매는 소를 잃고 온종일 뛰어다녔지만 저녁 예배시간이 되자 소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교회 마당에 잃어버린 소를 데려다 놓으셨습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① 바라봄의 법칙이 있습니다. 복잡한 세상의 신문잡지 전자기기 불신앙의 사람들을, 그리고 분주함에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주의 전을 가까이 하여 주이 말씀을 성도들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② 따름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좇아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의 방식, 사람의 말과 정보를 따르지 마시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존재를 인정하고 환영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를 의지하며 성령이여 육체를 대적하여 이기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아람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러 엘리사 선지자에게 갔을 때 선지자는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하기를 명령했습니다. 그때 그는 엘리사가 자신의 상처에 안수해 줄 것으로 알았는데 목욕만 할 것을 명하니까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 생각을 고집했으면 문둥병을 고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을 버리고 목욕했더니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지위도 내려놓고 자존심도 내려놓고 부끄러움도 내려놓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한다 함은 곧 성령 하나님께 순종해야함을 말합니다. 성도는 성령님께 순종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도우심을 구하면 기뻐하십니다.

성령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십니다. 옛 습관, 더러운 것, 무익한 것 그것이 ‘나’인줄 알고 그것이 ‘자유’인줄 알고 놓기를 두려워하는 까닭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즐거움과 행복인줄 알고 붙들고 있는 까닭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면 끊임없이 다가오는 정욕을 극복하며 성결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충만히 계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 저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십시오. 성령님, 저로 하여금 성령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성령님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한 기독교인 농부가 논에 물이 가득하게 채워있음으로 보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 이웃 논의 사람이 물을 빼 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웃 사람에게 따졌습니다. 그는 당연한 자기 권리를 주장하여 다시 물을 빼왔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에 논에 나가보면 또다시 물은 빠져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러면 또 가서 다시 빼오고 빼나가고 하기를 몇 번 거듭하다가 결국 그는 평안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제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까?”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언제나 너는 정당한 일만 해왔느냐?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은 할 수 없겠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크게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웃집 농부가 자신의 논에서 물을 빼내어가기 전에, 물을 빼어 이웃 논에 대어 주었습니다. 그제야 그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은 항상 자신의 생각만이 바르고 언제나 자신의 일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는 귀합니다. 사랑과 이해와 용서는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는데 친구와 싸운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친구를 가룟유다의 모델로 생각하고 그리기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림에서 누구나 갸룟유다의 얼굴이 친구를 닮았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려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더 이상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가룟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나서야 예수님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성간의 사랑, 친구의 사랑, 가족의 사랑은 인간 본성으로서의 사랑, 자연인으로서의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내생각 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1)사랑 2)희락 3)화평 4)오래 참음 5)자비 6)양선 7)충성 8)온유 9)절제 예수님을 꼭 빼 닮는 것입니다. 그 근본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다워집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면 이 세상이 천국으로 변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열매를 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꽃은 화려하고 누구나 좋아합니다.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농부가 원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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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8:13-14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2013. 4. 14

구약 시대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으나 초대교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님의 날'로 표현했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또한 자신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보이신 날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사도요한이 주일날 계시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초대교회가 안식일도 지키고 또 안식후 첫날에 성만찬을 나누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이날은 예수 부활 승천 이후에는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그 은총을 찬양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그 은혜를 확인하며 새롭게 경험하면서 영적 안식을 누리는 날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최초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역사를 찬양하며 기뻐하는 날이었습니다.

[창 2:2-3]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그리고 너희들도 일곱째 날에 안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보낸 안식일은 애굽에서 구원하여 해방시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이었습니다.

●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첫 번째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사 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주일은 성일입니다. 거룩한 날입니다. 구별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1. “네 발을 금하여” 이 말은 주일에 비즈니스를 삼가라는 말입니다. 아모스 당시에 사람들은 안식일에 돈벌이 할 수 없는 것을 큰 부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얼른 지나가기를 바랐습니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이것을 무섭게 꾸짖고 이에 따르는 징벌을 선포했습니다.

[아모스서 8:5-8]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 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시되 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이로 말미암아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주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강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2. 안식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반복해 말합니다.

<오락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자신의 쾌락을 좇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 주일에 성도들이 교제를 위해서 운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을 내 취미를 위해서, 나의 즐거움을 위하여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근심 염려, 먹고 마시는 일, 음담패설, 정치 경제와 같은 일들을 말합니다.

● 물론 조직 사회에서 피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손님과 외식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 주일에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여행을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발로 나의 유익을 위하는 일이라면 피하셔야 합니다.


○ 중국에서는 문화가 없습니다. 학생들이 PC방에 갑니다. ○ 술마시고 밤늦게 게임하고 주일에 일어나지 못합니다. 주일날 낚시하러, 주일날 골프치러, 때로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을 쇼핑하는 날로 정한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는 것입니다.

○ 교회 문을 들어서는 시간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시간이 나면 예배를 드리고 일이 생기면 가장 후순위에 두지 마세요. ○ 예배 뒤에 다른 일을 두지 마세요. ○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만 후딱 드리고 나서 자기 마음대로 갈 곳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사업한면서 참예배를 드렸다 할수 없습니다. ● 하나님은 온전한 것을 기뻐 받으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을 잘 아시고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는 모든 일에 내 뜻을 구하는 사람이 아닌 주님의 마음을 알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언제까지 어린아이로 살겠습니까? 언제까지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롬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한 연예인이 진정으로 주님의 기쁨만 구하여 주일날 야구 중개를 보는 것도 미안해서 안 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김하중 대사는 골프를 배우고 싶었고 골프를 칠 기회가 많이 있었으나 기도시간을 얻기 위하여 골프를 배우지 않았다 했습니다. 여행을 다니고 싶었으나 주일과 기도시간을 지킬수가 없어서 포기했답니다. 주를 위하여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드리십시다. 주일에는 식당에 가는 일도, 장을 보는 일도 가능한한 멀리해야 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더 즐거운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려지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 주일은 주님의 기쁘심을 위하여 성별된 날입니다. 주일은 존귀한 날입니다. 주일은 즐거운 날입니다.

○ 혹시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 생각을 얼른 바꾸시기 바랍니다. 참된 휴식은 예배드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날 주일을 잘 지키면 개인과 교회뿐만 아니라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지 않으면 개인과 교회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눅 6:5]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2.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율법과 계명을 두신 것은 나에게 축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 비행기를 발견한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형제가 비행기를 보여주기 위해 구라파로 갔을 때, 스페인에서는 왕이 주일날 비행해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이를 정중히 거절 했습니다. 주일을 성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 스페인 왕은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그 형제를 존경하고 확신에 찬 믿음을 존귀히 여기면서 그 형제가 원하는 날짜에 비행하게 했다고 합니다.

● 프랑스 혁명가들은 10일 일하고 하루 쉬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 보니까 40%의 생산량이 떨어졌습니다. 레닌이 기독교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 7일 동안 일하고 하루 쉬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생산성이 30% 떨어졌습니다. 할 수 없이 성경의 원리대로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원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주일을 주일로 지키지 아니하면 영혼이 망합니다. 영혼이 망하면 다 따라서 망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주일을 주일로 지키면 영혼이 삽니다. 건강도 좋아집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야곱의 축복을 주십니다. 신앙의 기본이 주일성수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2일의 만나를 주셨습니다.


[예레미야서 17:24-27]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겝으로부터 와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오려니와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일을 잘 지키면 나라가 복을 받고 잘 지키지 않으면 나라가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습니다.

[느 13:16-19]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느헤미야는‘왜 우리나라가 바벨론에 멸망되었느냐, 안식일을 제대로 안 지켜서 그렇게 되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 아웅산 참사 때에 죽은 대부분의 각료들이 기독교계 장로와 집사들이었습니다. 아웅산 묘소 참배시간이 주일 11시였습니다.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각하! 오늘은 주일입니다. 다음날로 미루십시다.”했더라고 하면 그런 참사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육상선수인 '에릭 리델'(Eric Liddle)은 1924년 파리올림픽의 100미터 달리기 종목에서 강력한 우승후보자였습니다. 그는 우승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연습하였으며 많은 스포츠 기자들도 그의 우승을 확실한 것으로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1백 미터 달리기가 일요일인 주일에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게된 에릭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일날에 경기를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경기를 거부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를 칭찬했던 사람들까지도 실망하여 그를 바보라고 비웃었습니다. 영국 전체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를 가리켜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조국의 명예를 버린 위선자" 라고 비난하였다. 에릭 리들은 예선경기를 하던 주일에는 경기장에 나가지 않고 장로교회에서 간증 설교를 하였다. 감사하게도 그날 100m 경기에서는 영국의 헤롤드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에릭 리들은 자신의 주종목이 아닌 200 m에서 동메달을 땄고, 400 m 에도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예선에서만도 스위스의 '임바흐', 미국의 '피치' 같은 세계적인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결승전에 출전할 때 담당 코치가 쪽지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구약에 이런 글이 있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 최선의 영광이 있기를 빌면서‥ > 에릭이 뛸 때 해설자는 "에릭이 저런 속도를 유지하다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고 불안함을 표현하였습니다. 에릭 리들은 우승후보인 임바흐, 피치 등를 제치고 47.6초 이라는 세계신기록까지 세우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처음 400 m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처음 200 m 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했고, 나머지 200 m 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빨리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 24세의 젊은 나이로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갔습니다. 리들은 12년 간 톈진에서 교사로 봉사하며 복음을 전했으며, 그 후 7년 동안 산둥 반도의 곳곳을 다니며 농촌 지역에서 전도를 전도를 하다가 2차 세계대전 이 끝나기 전 몇 년 간 1,800명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일본군 수용소에 갇혀 사람들을 격려하며 지내다가 그의 나이 44세 1945년 뇌출혈으로 사망했습니다.

 

[사58:14]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땅의 높은 곳에 올리겠다”는 것은 세상에서 이름을 얻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여 많은 나라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는 말씀은 기업과 자손을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개인도, 가정도, 사업도, 회사도, 나라도 하나님이 크게 하셔야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성수 하는 것은 나와 가정과 나라를 크게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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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2:12- 27 <사랑받는 지체가 되어> 2013. 4. 7

아주 오래전에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들이 나와서 서로 질문하고 답을 맞추는 퀴즈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제시된 단어는 잉꼬부부였던가? 그 곳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당신하고 나하고 사이를 뭐라고 그라지?” 그러자 할머니가 지체 없이 대답했습니다. “웬수” 할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당신과 나의 관계. 네 글자로‥” 할머니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평생 웬수!”

남편이 아내에게 존경받는 남편이 되고 싶어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가 되고 싶어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는 부모의 보호와 사랑을 확인하고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오늘 지금 서로에게 이렇게 말해 봅시다. “당신은 내게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삶은 한 마디로 ‘은혜’ 라 말하고 싶습니다. 한 일은 많지 않은데 주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는 너무도 크고 큰 은혜였습니다. 재주도 없고 배경도 없는 저는 큰 탈 없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부끄럼 없이 살게 하셨습니다.


제가 받은 큰 복과 은혜를 말하라 한다면, 서슴치 않고 좋은 교회, 좋은 교인을 만난 것을 말하겠습니다. 중국에 가기 전에도, 중국에서도,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하나님은 저에게 좋은 교회, 좋은 교인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육체적으로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셨고 또 영의 가정으로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한 가정이란 공동체로서 한 가족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 한 사람사람 세례 받고 거듭남과 함께 즉시 [하나님 집]의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르셨다.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영광 중의 영광입니다. 주님은 미련하고 죄 많은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다 하시며 존귀하신 하나님의 집에 한 지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 성도는 단지 하나님을 믿고 세례만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 공동체에 속함으로 거룩한 무리에 속한 자라는 의미에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

● 지체로 부르실 때 공동체 안에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사람 모두가 몸인 [그리스도 예수의 지체]가 됐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들에 주어지는 각가의 역할은 한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지체되어, 그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한 몸에 손, 발, 눈, 코, 귀, 입이 있듯이 교회 안에서 많고도 다양한 지체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체가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짗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지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간과 심장, 그리고 신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지체인 얼굴도 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지체들이 모두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가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1986년 발사 직후 공중 폭발한 우주선 챌린저호의 폭발 원인이 공기통에서 가스가 새지 않게 하는 0.28인치의 ‘오링O-ring'이라는 정말 작은 부품 때문이었는데, 수백 만 개의 부품 중 하나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링이 잘못되어서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 하나 하나의 부품을 떼 놓고 보면 별거 아니지만 전체를 위하여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지체는 그 기능에 "차이"는 있지만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은사는 다 달라도 그 가치와 중요성에 높고 낮음이 없는 것입니다.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무엇을 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모세가 범한 실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원래 나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너무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 손에는 손가락이 몇 개입니까? 다섯 개가 있습니다. 다섯손가락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한바탕 자랑을 늘어 놓았다고 합니다.

엄지 : 다들 내가 제일 잘났다는데는 이견(異見)들이 없을것이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최고'라고 말할 때, 어느 손가락을 치켜세우느냐 말이여~~!!

검지 : 이 엄지란 친구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나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것', '저것' 가리킬 때 어느 손가락을 쓰는겨? 또 높은 분이 지시하거나, 이리 오라고 할 때 어떤 손가락을 쓰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모르건네~??

중지 : 다~들 눈들이 있는겨, 없는겨? 다들 이리 나란히 서 보더라고! 누가 가운데에 떠~억허니 서 있는겨?

무명지 : 그~려, 다들 잘났어 자~알들났어!! 나는 이름도 없어 (無名指)여! 글치만, 따~악 한마디만 묻겄어! 일생일대 중대사인 결혼식에서 반지는 워디 끼워주남?

새끼손가락 : 그려, 난 너거들보다 짧고 왜소허고 볼품도 없어, 그려 100% 인정혀! 그런데 내가 없이 다른 사람과 악수할 수 있고 주먹자랑을 할 수 있나?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소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신 사람들 가운데는 쓸모없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 앞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땅히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나 하나쯤 빠져도 되겠지 하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돌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한 지체가 되어 봉사할 때 건강하게 자라가는 것입니다.


1. 내가 가진 것으로 - 성령께서는 한 사람 한사람을 몸인 교회 안에 지체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각각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을 찾아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끔씩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은사를 사모해야 하지만 내 보기에 좋은 칭찬받는 은사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겠습니까? 다 선지자가 되겠습니까? 사도가 되겠습니까? 눈이 보기에 입이 좋으니 입을 구하겠습니까? 입이 보기에 눈이 좋으니 눈을 구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고전 12:17-19]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 전쟁이 일어난 전쟁터에 나가 있는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러 갔습니다. 가서 보니 이스라엘은 전쟁할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에는 엄청나게 큰 골리앗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다윗은 골리앗과 대결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기의 군복을 입히고, 놋 투구를 씌우고 갑옷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갑옷이 익숙지 않은 그 갑옷들을 벗었습니다. 다윗은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5개를 골라 물매를 만들어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라고 말하며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남이 쓴 투구, 남이 입은 갑옷을 가지지 못해서 안타까워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와 재능를 부러워하며 정작 자신의 은사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다윗은 평상시에 목동으로 살면서 물맷돌을 던지고 들에서 찬송하며 악기를 연주하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던 삶이 그의 남에게 없는 귀한 은사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에게 맞는 일, 익숙한 일, 분명 작은 것 같지만 남에게 없는 귀한 은사가 내게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은사와 사역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기는 내가 많은 크든 작든 내 할 수 있는 바를 감당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

●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일 때 그 보리떡과 물고기를 내놓은 어린아이의 이름은 없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내가 많은 물질로 큰 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 구약에서 레위인들에게 각각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이는 장막을 담당하고 어떤 이는 제사도구인 불삽과 집게 그릇을 맡아, 어떤 이는 성전 문지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장소에서 평생 귀한 일로 여겨 두려움을 담당했습니다. 사실 우리같이 죄인된 사람들이 주님의 지체라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감히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동등하시고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 노릇을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다른 사람의 영광도 은사도 부러워 하지 맙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드리는 것입니다.

☞ 봉사란 보잘 것 없는 것, 작은 것을 드린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싶지만 사실 하나님 앞에 무엇이 귀하다 말하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돌아보면 다 부족한 존재들입니다. 실수 많고 문제 많고, 늘 넘어지고 상처 많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부끄러운 것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헌금을 다른 사람보다 많이 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제가 “주님 앞에 더 많이 드릴 수 있는데 이것 밖에 드리지 못합니다.” 봉사를 하여 피곤한 사람도 “주님 내가 주를 위하여 한 일이 얼마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다 갚을 길 없습니다.”


2.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 자신을 드림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 육체의 가정이고 우리에게 가장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자녀, 나의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남편, 이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구속합니다.

○ 다윗이 골리앗을 보고 분해하며 전쟁터에 나왔을 때 장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노를 발하며 양 떼게게 돌아가라고 합니다. 부모 형제는 사랑과 보호라는 명분으로 말하지만 내가 주를 위한 헌신을 하고자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 가정의 식구들입니다. 사탄은 늘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나를 시험하고 약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 베드로에게 커다란 짐은 처와 자식이었습니다. ○ 한번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어머니와 동생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집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에게 가장 큰 짐은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었을 것입니다.

● 자녀와 가정의 식구들을 사랑하신다면 더욱더 주를 위하여 헌신하시고 봉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내, 남편 당신의 자녀를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3. 형제 자매를 불쌍히 여김으로

저는 짧은 인생을 살아 왔지만 나이가 들수록 놀라운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긍휼이 여기심이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 많은 세상 불의한 세상을 하나님은 길이 참으십니다. 그리고 도저히 구원받을 것 같지 않은 사람도 구원받게 하시고 변할 수 없는 사람을 변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죄인과 병든자 슬픈자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 저도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

○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비판하고 상처 주는 말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 우리는 영적으로 가정이며 식구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인 다른 지체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먹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다른 지체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함께 느낄 때, 우리가 세상의 고통을 보고 마음 아파할 때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거기에 능력이 있고 기적이 있습니다.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 우리는 한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요. 영광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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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4:7-9  <산 자의 주>           2013. 3. 31

교회에 4대 절기가 있습니다.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세상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날이 되었는데 부활절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절기 성탄절보다도 부활절은 기독인에게 의미가 있는 절기입니다. 예수의 부활 신앙과 증거 때문에 기독교는 세상의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도전을 받는 신앙이 부활신앙입니다.

안식 후 첫 날 부활하신 날 저녁에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었습니다. 도마는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의심 많은 사람입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 후 예수께서 8일만에 다시 도마가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 때 도마가 고백하는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베델 성경 연구를 소개하고 보급한 지원상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목사님이 인도를 여행할 기회가 주어져서 선교여행을 하는 가운데‘성 도마 교회’를 방문했답니다. ‘성 도마 교회’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안내원이 성 도마 교회를 소개하면서 지하실로 안내하더니 쇠문 앞에 서서 성 도마의 손가락뼈가 이 창고 안에 잘 보관되어 있노라고 아주 열을 올리면서 설명하더랍니다. 목사님 너무 호기심이 들어 일행이 거의 나간 다음에 안내원에게 ‘내가 그 도마의 손가락을 한번 볼 수 있느냐’고 했더니 안내원이 깜짝 놀라며 거절하며 만약에 문 열어 줘서 보였다가 잘못하여 잊어버리면 내 목이 달아난다고, 그러니 절대로 그럴 수 없노라고 고개를 흔들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안내원에게 굉장히 많은 돈을 쥐어 주었답니다. 그러니까 이 안내원이 돈을 보고 마음이 바뀌어 가지고 내가 문 열어 줄 테니까 빨리 보고 나오라며 그 문을 열어 주었대요. 지 목사님이 들어가서 보니까 정말 손가락 마디만한 뼈마디가 거기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본 것만 가지고는 들인 돈이 아까워서 실제로 가서 만져보았다. 그 뼈가 화석처럼 돼 있는데 그걸 만졌더래요. 

그리고 나와서 인도의 신학교에 와서 설교를 했답니다. “내 이 손이 얼마나 대단한 손인고 하면 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던 도마의 손가락을 만진 손”이라고 열변을 토하며 자랑을 했답니다. 설교를 다하고 나니까 학생들이 줄을 쭉 서서 악수를 자꾸 하자고 하더래요. 그래서 “왜 악수를 하자고 하느냐고” 하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은 도마의 손가락을 만진 그 목사님의 손과 악수를 하면 나도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옆구리에 이 손을 넣어본 것과 같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제발 좀 악수를 하자고 해서 아주 길게 늘어선 이 신학생들의 손을 다 일일이 잡아 주었답니다.              ♥♥♥♥

하여튼 이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복음을 들고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인도에 와서 전도를 하는데 ‘쿤다포라스’ 라고 하는 왕이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인줄 들어 알고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니까 그의 제자도 좋은 목수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의 왕궁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돈을 주었대요. 도마는 얼떨결에 거절도 못하고 그것을 받았지만 자기는 그 왕궁을 지을만한 그런 실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고심하다가 그것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다 나눠주었습니다. 어느 날 왕이 도마를 불렀습니다. “자네 나를 위해서 집을 잘 지어가고 있는가?” “예, 지금 잘 지어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마 돈이 좀더 필요할 것인데 가지라며 건축비를 두둑하게 더 주더래요. 도마는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또 병든 자,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주었답니다. 결국 왕은 도마가 왕궁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건축비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눠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알아보니 사실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를 죽이기 위해서 감옥에 가두었지요. 그 때 쿤다포라스 왕의 형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왕의 형이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휘황찬란한 집들이 많이 있는데 한곳에 어마어마한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물었다. 이 집이 누구의 집이냐고. 천사가 대답하기를 ‘그 집은 도마가 당신의 동생 쿤다포라스를 위해서 짓는 집이다, 그리고 너는 가서 이 사실을 너의 동생에게 전하라’며 세상으로 보내더랍니다. 그 형이 다시 살아 돌아와 그의 동생 왕에게 그의 본 바를 이야기했답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보니까 도마가 너를 위해서 어마어마한 집을 짓고 있는데 그것은 이 땅의 왕궁보다 더 웅장한 것이었다.”고 본대로 전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왕은 도마를 석방해서 계속해서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다. 합니다.


요한복음11장에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고 할 때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의 알고 나서 그는 멀리 파사와 인도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인도인의 창에 피를 뿌려 순교하므로 인도 교회의 터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도교회는 7월 1일을 도마의 순교의 날로 지킨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첫 열매라 함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여 천국의 복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 중 최고의 은혜입니다. 부활신앙이 귀합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나서 스스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만 빼놓고 [모든 제자]가 다 순교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부활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극복했습니다. 장차 나타날 부활의 영광과는 비교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치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해서 반드시 천국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땅의 것을 더 중시하며 구하여 사는 사람은 천국이라는 큰 선물을 업신여기는 삶입니다. 천국을 뭐 있으면 가고 없으면 말고 생각하지 마세요. 힘써 천국에 상급을 쌓으며 칭찬받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씀은 우리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 권리가 없고 죽을 권리도 없음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은 더 이상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드려진 것입니다. 성도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 '자기를 위한 삶'이 뭡니까?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를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 욕심에 따라서 사는 삶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한 삶을 살아가면서 선행을 말하고, 자선을 말하고, 구제를 말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탐욕이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일 뿐입니다.

[골로새서 3:4-5]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와 더불어 고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의 세력들, 죄로 물든 성품을, 나쁜 습관, 불만 불평, 분냄, 의심, 주님의 뜻과 관계없는 욕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기까지 깨어지고 녹아져야 합니다. 나 자신이 깨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 모진 고통을 치루 듯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고 잠 못 자며 몸부림쳐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자신을 깨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내야 할 때도 있고, 어떤 때에는 경제적인 고통을 겪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


[로마서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살아있는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되신 분입니다. 부활은 미래 천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한 자가 강해지고, 상처받은 자가 치유되고, 소망이 없는 자가, 낙담한 자가가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 산 소망입니다.

왜 믿는 자들이 낙담하고 연약하여지는 것입니까? 왜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내가 여전히 짐을 지고 힘들어 합니까? 왜 주를 위한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주님 앞에 자신이 드려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짐을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도, 나의 방식도, 나의 꿈도‥‥그리고 주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뜻을 구하여 그 분에게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주님도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어 못 박히는 사실이 너무 힘드셨던 일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계속하여 기도하십니다. “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은 일어나서 고난의 잔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철저한 단절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구원될 어떤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이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외에는 아무런 삶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약속 하나를 믿고 엄청난 결정을 하는 것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을 아는 것. 그 약속에 나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막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李舜臣은 玉浦海戰에서 13척의 배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죽기로 다짐하면 다시 삽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부활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영원한 부활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을 모르면 절망과 실패와 죽음만 있습니다. 부활신앙의 능력은 환경(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갖지 못할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결박당하여 대제사장과 총독에게로 다니면서 심문을 받을 때 다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이희돈 장로님이 세계무역센터 부총재가 되고 옥스퍼드 대학의 종신교수가 되었어도 집 한 칸 없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는 친구가 오랜지 카운티에 자신을 초청했답니다. 가장 좋은 집을 찍어서 40일 기도를 작정하고 여리고 작전을 시작했답니다. 주인에게 미안하니 날마다 밤에 돌았습니다. 응답이 없었지요. 40일 째 날에 보니 불빛이 나갔더랍니다. 은행 압류에 들어간 겁니다. 돈도 없으면서 은행을 찾아갔죠. 500불 밖에 없는 사람이. 액수를 말하랍니다. 낮게 부르니 당연히 말도 하지 말고 나가라 해요. 1주일 뒤에 연락이 왔는데 은행장이 전출을 가야하는데 시장에 내놓을 시간도 없고 좋은 매물을 미결재로 회사를 옮기면 자신의 경력에 문제가 되니 은행에서 론을 내주어 사게 되었답니다. 캘리포니아 집값이 이때부터 오르기 시작하는데 하루하루가 너무 기뻤답니다. 그리고 워싱톤으로 이사할 때 큰 부자가 되었지요. 그런데 아내가 모두 헌금하자 하여 10만 불을 헌금했는데 너무 미웠답니다.  IMF 당시 한국의 은행 업무를 도와주고 수고비로 받은 돈이 정확히 10만 불이더랍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부는 워싱톤 집마저 팔아 선교헌금으로 드렸답니다.


[마태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 2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의 풍요하심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하나님과의 최선의 bussiness는 하나님을 위한 나의 최선을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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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5:1-8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

[롬15:1-3]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짊어져야 한다. "우리 강한 자가‥" 진실로 강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나의 자유를 나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은혜와 감사가 있는 사람, 주의 도우심을 아는 사람, 날마다 깨어 기도하는 사람. 넉넉히 나누는 사람‥


이기적이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모든 아픔을 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이런 사람은 속이 편한 사람일 것입니다. 길거리 노숙자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 마음 편하고 장애인의 불편함을 모르는 것이 마음 편한 일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아픔을 알면 알수록 나의 마음은 무겁고 힘이 듭니다.

그러니 “ 마땅이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라는 이 말이 부담스럽습니다. 집없는 사람, 병든 사람, 세상에 무시 당하고 짐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속상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사실 주변에는 우리에게 기쁨을 더해 주는 것보다 기쁨을 빼앗아가려는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내가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운다” 하더라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 고거에는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길에서 사람들을 동승했습니다. ○ 전화기를 빌려 주기도 못합니다. ○ 의료봉사도 구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 사람이 착하기 때문에 무시당하고,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살다보면 애매하게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1) 요셉은 아버지의 편애하는 사랑 때문에 형들이 그를 미워 애굽에 팔립니다. 노예 생활을 합니다. 그 자신은 조금도 형들에 대한 미움이 없었고, 도시락을 싸들고 갔던 길입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합니다. 그 결과 그는 치한으로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2) 다윗은 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이유로 도망자의 신분이 됩니다. 그는 10 년여를 광야에서 이방에서 노숙자로 방랑을 하면서 살아 갑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억울함과 애매한 고난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는 지도자로, 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됩니다.

3)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주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십니다.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자들을 고치시고, 상처 받은자를 위로하시며,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그분이 이땅에서 하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고난과 시련을 당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인류 역사상 가장 극악한 사형 방법인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요셉이, 다윗이, 욥이 애매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고 사랑을 믿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신다. 허락하신 일이다.’라고 믿었습니다.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이사야서 53:7-9]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에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도다.


♥♥♥♥♥

[롬 15:5-7]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 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 하나님은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가득 찬 우리를 길이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고 자비로 받아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뜻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봉사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살 소망이 끝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과 십자가를 생각하여 용서해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고집이나 자만, 그리고 자존심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구하고 인정받기를 바란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로마서15:8-9]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는 언약의 표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표징인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신 것입니다. 죄 많고 반역한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그 일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 있던 칠십오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창12:1]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며 주신 약속입니다.

[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네 구절을 인용합니다(시 18:49, 신 32:43, 시 117:1, 사 11:10).

[신 32:43]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사 11:10]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모세의 글에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시가서를 통하여 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고  예수님은‘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유대인은 거역하고 배반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구원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한 자매가 한 말입니다. “사람은 이적을 보고 싶어하고 신앙이 커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이적을 행하는 믿음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습니다. “ 내가 돈벌고 부자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직하게 사는 것이고 돈 때문에 교회의 일을 그르치지 않는 것이다.”

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감정보다도, 우리의 만족보다도, 우리의 부요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1) 스스로 고난을 취하시므로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을 받으셨습니다. 2)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방인들까지 받으셨습니다.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 사랑이 없는 세상입니다. 상처받은 심령들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 부부가 서로 상처를 주고 친척이 상처를 주고, ○ 부모가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자녀가 부모에게 상처를 주고, ○ 교회 안에서 직장에서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여야 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이 땅에, 죄인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여, 직접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영어에서 “이해하다”란 단어는, “understand”입니다. 이 단어는, ‘아래’라는 뜻의 under와, ‘서다’는 뜻의 stand가, 결합된 합성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아래에 서서, 바라보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위에 서서, 자꾸만 판단하고, 평가하려고만 들지 말고, 반대로, 상대의 아래에 서서, 눈 높이를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며 받아들이게 될 때, 모든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음악회- 한 가난한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팔을 휘두르며 열심히 지휘를 하느라 지휘자의 낡은 예복이 그만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지휘자는 한 곡이 끝나자 얼른 예복을 벗어버리고 셔츠 바람으로 지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때, 앞좌석에 앉아 있던 귀족 한 사람이 입고 있던 웃옷을 소리 없이 벗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웃옷을 벗었고, 그날 음악회가 감격적이고 성공적으로 끝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고 탓하거나 조롱하기보다 감싸줄 수 있는 마음 아름답지 않습니까?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소망의 출발점은 기쁨과 평강에서 시작합니다. 새시대 새 가정, 새 교회를 열기를 원하십니까? 미움과 분열 다툼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하나됨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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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2:1-8   <창조주를 기억하라>       2013. 3. 17

전도서가 한자로 傳道書라 하는데 명칭만 보아서는 복음을 전하는 책이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 번역이나 다른 번역서에서는 집회서라고 한 곳도 있습니다. 이 말은 ‘모았다’란 뜻입니다. 무엇을 모았을까요? 예, 인생의 지혜를 모았습니다.

● 솔로몬은 인생들이 누구나 환상하고 소원하는 바를 다 경험해 본 사람입니다. 세상의 가장 좋은 것, 세상의 전무후무한 지혜, 지위와 명예 모든 것을 마음껏 누려 보았지만 이젠 이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2:3]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비록 그는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으나 마음 안에 육신의 정욕을 다스리지 못했고, 그의 지혜가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한 나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의 지혜는 다만 인간의 지혜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 사람들은 로마를 Eternal City(영원한 도시)라고 부르며 자랑했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오늘날에도 어디를 가더라도 옛 로마제국의 유적을 볼 수 있고, 아무 곳을 파더라도 옛 제국의 유적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다 지난날일 뿐입니다. 고대의 콜로세움, 중세의 바티칸도 인간의 자랑일 뿐 그들에게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탈리아는 과거의 폐허라는 유적을 이용해 관광 사업하고, 많은 이태리 명품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사기꾼과 소매치기 허풍쟁이로 가득한 나라 아닙니까?

● 영국, 프랑스, 유럽의 교회들은 대리석으로 아름답고 웅장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교회는 그 큰 건물을 유지할 수 없어 무도회장으로 극장으로 팔려 나가고, 이슬람 교인들에게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명품이 좋고, 페허의 유적들을 보고 싶고, 먹고 마시고, 하고 싶은 것하고, 누리고.‥ 소위 ‘WELLBING’의 삶을 추구하합니까?  삶의 목표입니까?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사마리아에 여름 궁과 겨울 궁, 상아 궁을 만들고 영화를 자랑했지만, 실제로 이 궁전들과 그의 영화는 백성의 고혈을 짜서 얻어진 것으로 사람들과 하나님의 미움을 샀습니다. 결국 그 왕국은 4대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헤롯이 재건한 성전이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보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전 돌 위에 돌이 남지 않게 부수어 버렸습니다.

제가 중국에 선교지에 가서 배운 것 한가지! "재물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2년 지난 신혼살림이 사방에 흩어졌습니다. 중국에서 새로 구입한 전자제품은 좋은 것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 두고 와야 하는 것들입니다. 

○ 누가복음 12장에 한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탐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서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습니다. 열심히 모으고 쌓고, 자랑하지만, 우리의 쌓은 재물은 남이 가져갈 것이며,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빈손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전도서 12:1-2]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 청년의 때가 언제입니까? 할 수 있는 때, 가능성이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 없는 값진 시간입니다. 모든 기회가 사라져 버리고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는 주님을 기억하여 돌아와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고 싶어도, 더 봉사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이 귀한 시간들을 헛되이 사용한다면 인생의 겨울이 되었을 때에, 종말을 시간이 다 되어서 세상에 물을 구하나 물이 없고 세상에 기름을 구하나 기름이 없을 때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여 일하고 싶으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없습니다.

○  어떤 분이 노년기를 맞으면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나의 젊은 시절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전연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밤마다 잠자리에 들어 그 다음날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내 귀는 서랍 안에, 내 이는 컵 속에, 내 눈은 책상 위에 놓여져 있곤 한다.” 

○ 마음은 아직 젊은데 몸은 이미 노인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장인어른 교회 나가시지요." 하면 “안 들려!” 말씀하십니다. 제 아버지는 "눈이 흐려 보기도 성경을 보기도 쉽지 않고 조금만 보아도 눈이 피로하다." 하십니다. 시간은 내 사정을 보아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의 종착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세월은 쏜살처럼 나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고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갔느냐?” “청춘을 돌려다오!” 지나간 날들을 후회하며 아쉬워 해도 소용없습니다.

[시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날을 계수하는 사람, 이것이 지혜입니다. 내일 무엇을 하리라 맹세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내일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끝나기 전에 기억하라

○ 공직자 중에 한 분이 은퇴하고 나서 예수 믿고 세례 받은 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생 앞만 보고 살다가 이제 멈춰서 나를 돌아보니 아, 내가 세 가지를 몰랐구나." 그 첫 번째가 인생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했습니다. ' 철없이 평생을 뛰어 왔구나. 인생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좀 알아야겠다. 신을 알아야 나를 알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아내가 누구인지 알아야겠다고 했습니다. 평생 아내와 대화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는 거죠. 아내와 여행도 하고, 애써 대화도 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베풂을 알아야겠다. 모든 사람이 경쟁자였고 진급하기 위해 짓밟고 올라가다 보니 베풂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 가지를 통해 바른 어른으로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이거든요      - 지성과 영성의 만남 중에서 -

[전 12:5-7]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살구꽃이 핀다는 것은 약속의 시간이 다 되었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장례식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살아생전에 우리가 애지중지하면서 쓰던 것들이 다 쓸모없이 버려지거나 나뒹굴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아끼던 옷도 태워지고, 내가 보던 성경책도 조만간 재생용 종이를 위해 고물상으로 갈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 우리의 시신이 땅에 묻히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했습니다. 육체는 다시 흙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왔던 곳으로 육체도 왔던 곳으로 되돌려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하라. 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사랑을 표현이 예배를 드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일주일 내내 다투고 분내고 먹고 마시는 일고 분주하다가 주일날은 거룩한 성도의 모습으로 예배드린다면 하나님의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닐 것입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늘 기도하는 삶을 살 때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서도 기쁨과 감동이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2.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의 주중의 모든 시간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도 재물도 1/10條 외에 9/10이 주님의 기쁘신 일에 쓰이는 생활이 되어야 참 예배하는 자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 함은 단지 주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전 삶이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적인 삶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힘써 내가 할 수 있는 지체로써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찬양으로, 혹은 식당에서, 새 가족부에서,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신자의 본분입니다.

 3.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게 믿음직한 진실한 청년이 되어야 합니다.

○  중국에서 유능하고 재주 많은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다. 생기기도 잘생기고, 머리도 비상합니다. 한마디 하면 10을 알아챕니다. 운동도 잘합니다. 경북에서 이름 있는 고등학교 top을 다투었고,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왔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심양에 있는 모든 사람, 상사주재원, 한인교회 사람들, 기업인 다 아는 것 같습니다. 교회 일에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원래는 중국광주 남방에서 여행사를 했는데 불황으로 실패하고 심양에 와서 그는 의욕적으로 출발했습니다. 여행사도 하고 무역회사도 차렸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 일 저 일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돈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일을 꾸준히 하지는 못했습니다. 교회일도 한 부서에 꾸준히 있지 못했습니다. 이부서 저 부서를 옮겨 다니며, 끊임없이 돈과 명예를 추구하였지만 그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고 결국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 재주가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한 가지도 꾸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 5:7]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잠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나라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나라는 없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지구의 반대편에도 오지에도 하루에 갈수 있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미국인의 소원은 노년에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것이랍니다. 많은 재물을 쌓아 놓고 인생의 염려 없이 마음껏 누리며 사는 것이 보통 사람의 소원입니다.

○ 우리 주님도 두벌 옷과 두벌 신을 신었더라면 길을 다니실 때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아마 고향집에 큰 집짓고 사셨더라면 아픔과 고통도 이웃들의 손가락질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주님도 더운 사막에서 금식 기도하는 것이 좋아서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탄의 유혹을 떨쳐내고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를 좆을 때, 많은 고난이 뒤따릅니다. 또한 자신을 부인하며 따르는 길은 참으로 험난한 길입니다. 우리는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고 저 세상에 집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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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2:1-12       <기도하는 교회 공동체>     2013.3. 10

[1] 헤롯대왕(B.C.37-4).

[2] 헤롯 안디바(B.C.3-A.D39) 세례요한 살해하였습니다. 빌라도가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심문하였다. 유배지에서 죽었습니다.

[3] 헤롯 아그립바 1세(A.D.37-44)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4] 헤롯 아그립바 2세(A.D.50-100) 바울을 심문하였습니다.


[행12:1-4]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인데, 주후 10년경에 로마에서 태어났고  로마에서 양육을 받았고 주후 37년 티베리우스 가이사 황제가 서거하고 새 황제 칼리굴라가 등위할 때 유대의 분봉 왕이 됩니다. 주후 41년 칼리굴라 황제가 서거하고 글라우디오 황제가 등위함에 도운 공으로 전에 대 헤롯의 전 영토를 전부 영유하여 주후 44년까지 왕으로 통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기독교를 박해하였습니다. 먼저 야고보의 목을 베어 죽입니다. 교회는 헤롯의 폭력 앞에 무기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헤롯은 이 일로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베드로까지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이 끝나면 그도 죽이려고 합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아니라, 세베대의 아들 중 한 명으로 요한의 형제인 제자 야고보입니다. 원래 갈릴리의 어부였으나 예수의 부름 받은 제자로서 예수를 가장 가까이 동행한 제자였습니다. ○ 예수님은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에게 ' 보아너게 ', 즉 ' 우뢰의 아들 ' 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시기도 하셨다. ○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베드로, 요한과 함께 참예하였고, ○ 나사로를 살릴 때, ○ 그리고 변화산상에서 주님께서 변화하실 때, ○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따로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합께 있었습니다, 이런 야고보가 제자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하였으니 주님의 일을 좀 더 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 한때 야고보는 그의 형제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께 그의 나라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자신들에게 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라는 답변을 주셨다. 이는 부활 후에 제자들이 순교의 잔과 고난의 세례를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들 중에서 야고보가  처음으로 순교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 스데반의 순교가 그리스도교 역사상 첫 순교였다면 야고보의 순교는 열두 사도 가운데 첫 번째 순교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야고보의 순교를 아주 짤막하게 기록했을 뿐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스데반의 죽음의 영향력보다 야고보의 죽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큰 효과를 거두기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과연 야고보의 죽음의 영향력이 스데반의 죽음에 비하여 영향력이 적었을까요? 진실로 예수의 사랑받은 제자 야고보의 죽음이 무의미한 허무한 죽음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왜 야고보인가?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의 죽음이 그가 믿음이 적어서도 아니고, 베드로를 구출하심이 그가 더 의로워서도 아닙니다. ○ 야고보가 헤롯에게 잡혔을 때도 교회는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교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입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  만을 보고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일찍이 사도행전8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으로 - AD. 32년경에 -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 박해로 사도들 외에 많은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됩니다. 결과로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왜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지속적으로 커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교회박해가 전반적인 박해가 아니라 군중들에 의한 부분적인 박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는 핍박을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고 누구는 예루살렘에 남아 신앙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스데반의 순교가 1차 핍박이라 할 때 그 대상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기를 바랐고, 율법을 지키는 限에 있어서는 기독교를 용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분파가 있었으니 하나는 율법을 여전히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유대파 기독교인]과 구약의 제사율법을 부정하는 [헬라파 기독교인]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7제자들의 이름을 자세히 보면 모두 헬라식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은 구약의 제사율법 준수하는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반면에 유대기독교인들은 [헬라파 기독교인]들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좋은 것이 좋은 것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헬라어를 구사할 만한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선교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태생의 제자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안전하게 자신의 나라 안에서 율법을 지키며 신앙생활 하기를 원했습니다.

○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이제 기독교에 대한 국가적인 박해가 시작 되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제2차 박해]는 헬라파 기독교인, 유대 기독교인을 가리지 않은 기독교에 대한 전반적인 박해였습니다. 첫 번째 순교의 제물로 잡힌 사람이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와 베드로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핍박한 사람은 헤롯이었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없었더라면 세계 선교는 바울 이후로 왕성하게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고보를 위한 교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응답은 하나님은 세계 선교를 위여 야고보를 희생의 제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으나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기도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바 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아사셀이 생각납니다.


[레 16:8-10]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구속을 위하여서는 희생이 따르게 됨을 말합니다. 야고보를 죽인 사람은 실제로 헤롯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아사셀 즉, 이방의 구속을 위하여 하나님은  야고보를 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 헤롯은 이제는 베드로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작은 집에 모여 주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 중보의 삶에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중보의 삶을 기뻐하십니다. 은혜이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나에게 귀중한 사람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많은 것을 해 줄지라도 기도를 해주지 않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을 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여서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그들은 통성기도를 드렸습니다. 통성기도에 위력이 있습니다. 통성기도는 목소리가 하나된 것이 아니고 마음이 하나 되어 하는 기도입니다. 너와 나의 문제 다른 사람의 문제 모두의 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내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묵상의 기도가 조용히 주님과 만남의 기도라면 통성기도는 강한 폭발력을 내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온 몸으로 집중하여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행 12:6-7]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하나님의 때는 절묘합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내어 죽이려고 한 전날 밤이라고 했습니다. 그 전에도 아니고 그 후도 아닙니다. 바로 그날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그 밤에 옥중에서 기적 일어난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것과 ○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과 ○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기독교를 황당한 미신처럼 여기고 “뻥이다. 거짓말이다. 사기이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후에 천국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하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 베드로가 나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행12:13-15]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그들은 지금까지 기도했으면서도 자기들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감옥입니다. 유월절에 헤롯이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죽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나는 믿음이 보잘 것 없구나 생각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기도할 때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헤롯의 부귀영화가 극에 달하였는데 당시 헤롯은 두로와 시돈 사람에 대하여 노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2:20]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절에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두로와 시돈은 옛날부터 세계 곡물 무역을 하는 길목인데 그들이 헤롯의 비유를 거슬려 노엽게 한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곡물을 무역해야 하겠기에 헤롯과 국교가 단절되어서는 아니 되었던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의 시종 블라스도를 설득시켜 헤롯에게 화평을 청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날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생일 축하경기가 8월 둘째 날에 있었다고 합니다. 헤롯은 은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귀빈석에 앉아 아침 햇빛을 받아 찬란하여 바라 볼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헤롯이 날을 정하여이 왕의 옷을 갖추어 입고 왕좌에 앉아 그들에게 (효유)연설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신이라고 했습니다. * 효유: 널리 알리다


[사도행전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음은 야고보가 순교한 그해 AD 44년, 헤롯은 잔인하여 의인의 피를 흘리게 한 큰 죄를 지었을 뿐 아니라 헤롯에게는 그보다 더 큰 죄가 있으니 곧 신으로 찬미를 받은 죄입니다. 교회는 다시 평화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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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3:1-3  < 예수의 이름으로 >             2013. 3. 3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 기도하기위하여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걸인을 보았습니다. 날마다 보던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갈 때마다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를 주목하여 보고 이르기를 “우리를 보라 합니다.” 베드로가 부르니 걸인은 당연히 얼마나 돈을 주려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대단히 실망스러운 말입니다. 저희 교회가 화요밥집을 하면서 돈을 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단지 몇 백 원이라도 주면 멀리서도 몰려옵니다. 아마 한 끼 식사보다 더 원하는 것은 돈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한 끼 식사야 라면을 먹든 국수를 먹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돈을 주면 자신이 원하는 담배도 사필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지요. 그러니 실제로 돈을 주는 것은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행 3:6-7]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가 일어나라고 명령하며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뛸 수도 있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국 교회사에 위대한 부흥사 중 한 사람이었던 金益斗 목사님이 전도사였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어느 날 심방을 다녀오던 金益斗 전도사님이 시장에서 거지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쳐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과수원 돌담 밑으로 거지를 업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이름으로 일어나라"하면서 손을 잡고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워 그 자리를 도망쳐 나온 김 전도사는 자신의 무능함을 탄식하다가 이불을 싸들고 산으로 올라가 금식과 철야를 하며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불 같은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김 전도사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산을 내려오다가 전도사님은 예전의 그 앉은뱅이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제 부끄러움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않은뱅이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金益斗 목사님의 첫 번 기적이었습니다.


 ●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향해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 합니다. 기독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은 예수님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길이 많다고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품에 가는 길인데 이리 가든 저리 가든 천국만 가면 되지 않는가? 말합니다.

유대교도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이슬람교도 알라 하나님을 믿습니다. 중국인들도 天帝를 믿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하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모든 세상의 많은 종교와 다른 것은 “예수이름 외에 구원받을 다른 길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예수의 이름만으로 구원받는 사실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매우 기뻐하며 대화하자고 할 것입니다. 불교 신자들도 좋아하며 기독교는 좋은 종교라고 말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예수 이름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사실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기독교를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전쟁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까? 


한 젊은이가 출장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좌석에 앉아 옆 좌석의 사람을 보니 분명 마더 테레사였습니다. 일평생 존경하고 보기를 원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테레사수녀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힘을 내어 물었습니다. “테레사 수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은 교인이 아니지만 무척 존경한다.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테레사수녀도 반갑게 그러냐고 응답하였습니다. 젊은이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을 물었습니다. 인도에서의 사역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더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긴 시간을 자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짧은 시간의 만남이 아쉬웠습니다. 그는 마더 테레사가 묵주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연 기도를 많이 하였음을 알수있었습니다. 내리기 전에 용기를 내어 마더에게 작은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얻을 수 없는가 물었습니다. 마더는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어 묵주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늘 이 묵주를 가지고 다니면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그의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그의 가정은 화목하며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말을 친구에게 하였더니 친구가 그 묵주를 좀 빌릴 수 없겠느냐 청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10日만 그 묵주를 빌려서 마찬가지고 늘 묵상하며 지냈습니다. 그도 역시 큰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묵주에 어떤 효험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면 이들의 기도가 효험이 있었던 것입니까? 저는 그 묵주에 효험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하 13:20-21]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성경에는 참 이상한 일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의 무덤에 모압 적당의 시체를 던지매 적당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영적인 능력은 알겠는데, 그의 무덤에 시체가 닿았더니 살아났다는 것은 신기한 일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성인의 유물을 신성시합니다. 성인들의 쓰던 유물에 신비한 효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쓰시던 잔을 [성배]라 합니다. 오늘 엘리사의 무덤을 보니 분명 무슨 영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영험이 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영험이 있다면 아마 오늘도 엘리사의 무덤에 사람들이 시체를 던지기 위해 길게 줄서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모압 적당이 살아난 사건을 하나님이 엘리사가 하나님의 존귀한 일꾼임을 일깨우는 〔한 번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묵주가 한 때 효험이 한 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정말 두고두고 놀라운 효험을 낸다면 아마 세상의 가장 크고 비싼 다이아몬드보다도 비싼 물건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공로를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것을 기억하고 솔로몬의 罪惡된 일생에 큰 재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공로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심판받고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공로는 영원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 사람들이 나면서 앉은뱅이가 걷고 뛰고 찬양하는 것을 보고 심히 놀랐습니다. 솔로몬 행각에 몰려듭니다. 베드로를 神처럼 바라봅니다.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가 앉은뱅이 걸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경건이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십시다. 분명 베드로의 기도생활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합니다. “제구 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 갈 새 ” 베드로는 좋은 기도의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3시(오전 9시), 제6시( 정오), 제9시(오후 3시) 세 번입니다.  베드로의 경건과 기도생활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삶이 없었더라면 그는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하기를 기도 외에는 이런 類가 즉 귀신이 나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


사도행전10장에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일하신 하나님만 알던 사람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제9시 기도시간에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네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그의 기도와 구제가 중요하였습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많았으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 그런데 지금 그는 왜 자신의 경건과 능력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억 하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기도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경건의 양과 경건의 시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오래했느냐. 오랜 기도를 했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경건을 많이 쌓아서 하늘에서 마음대로 비를 내리게도 하고, 그치게도 하고, 원하는 대로 온갖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주의 원 대로 될지이다.”기도하잖아요. 저는 다만 주님의 쓰시는 통로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본래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분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거한다면 그래서, 그 분의 뜻을 알고, 그 분의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십시오. 아무리 연약한 나라도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요 16;23]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 엄마, 아빠 불러줄 때 자식 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한 방에 있어봐야 제 관심 있는 일이나 하고, 사람이 들어가도 나가도 인사도 안하고 말 한 마디 없이 지나는 가정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 아빠가 믿는 종교를 나도 따르고 엄마 아빠가 친척을 찾아갈 때 자녀도 따라 다니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칠 때마다 “네가 이 일을 할 줄 믿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향에서 저들의 믿음 없음을 이상히 여기시고 아무 일도 행하시지 않고 떠나셨습니다. 오늘 그 앉은뱅이 걸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몇푼 쥐어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기도하는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였고,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나의 아이들이 믿음이 작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남편이 믿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나 역시 믿음이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간절한 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사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한얼산 기도원 傷痍軍人 출신 이천석 목사님은 원래 깡패였는데 이 분이 하루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 안에 목발을 집고 있는 사람을 보고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그분을 붙잡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낫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너무 창피해서 그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느 집회를 가서 보니까 그 집회에 간증하러 나온 사람이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내가 옛날에 다리를 절었는데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떤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어서 내가 나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이더래요. 여러분 내가 기도하는 것이 당장 어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듣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몫입니다. 고치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만 구하는 몫은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는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여기십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이는 참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들고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할 때 많은 사람이 무시했습니다. 믿지 못했습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게에 손님이 떨어졌다고 한탄합니다. 젊은이가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삶에 희망이 없이 실망과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도움을 힘입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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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21:1-8 <눈을 들어 산을 보라>               2013. 2. 24

○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는 독일의 국경을 따라 철저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습니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마지노에 의해 구축되었다고 해서 이 방어선을 마지노선이라 합니다. 프랑스는 이 요새를 6년 이상에 걸쳐 세웠습니다. 전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골로 된 직경 6m의 콘크리트 벽을 이중으로 세웠고, 보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조망 지대를 설치했으며, 발전실과 탄약고 그리고 작전실은 전부 70m 지하에 설치했고 통신선도 전부 지하에 묻었습니다. 거기에다 모든 화력을 집중 배치했습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2차 대전이 터졌을 때 독일은 벨기에지역의 삼림지방인 아르덴으로 침공했습니다. 마지노선은 한 번도 써보지도 못하고 프랑스는 무너졌습니다.

○ 중국의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한 번도 北方 흉노을 막는데 써 보지 못했고 그의 무리한 만리장성의 축조는 나라가 短命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간 만사 塞翁之馬라 합니다. 사람이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말하지만 우리는 공의 하나님, 섭리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시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우리 인생이 도움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은 시온 성을 의미합니다. 시온 성은 하나님의 도성이며,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산을 향하여 눈을 들겠다는 말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 가나안 땅에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얼마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지 얼마나 풍성한 땅인지 감탄했습니다. 포도송이를 따서 들고 오는데 두 사람이 메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크고 장대한 사람들인지 보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 떨며 우리는 그들과 비교해보면 메뚜기와 같다 하며 우리는 그들의 적이 되지 못한다. 참패할 것이다 말했습니다.


1) 이 세상에는 땅만 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땅의 것으로 만족하고 땅의 것을 자랑하고 울고 웃다가 한세상 다 보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에 가더라고 부끄러운 천국이 될 것입니다.

2)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한없이 무능하게 생각합니다. 메뚜기 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삶에 자신감을 잃고 살아갑니다. 그 반대로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계명과 뜻을 구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이루겠노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한 없이 낮게 평가하거나 자신을 과대하게 평가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합니다. 늘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나?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잘 보이나? 하면서 고민하고, 신경 쓰고, 불안으로 병이 생깁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조금 일이 잘 되면 웃고 자랑하며 기뻐하다가 조그만 어려움이 닥치면 인생 살맛을 잃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습니다.

3) 환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책임을 부모에 돌리고 사회에 돌리고 남에게 돌립니다. 사람이 환경만 보면 不平不滿 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환경은 늘 우리에게 그렇게 녹녹하지 않습니다. 저는 산에 자주 가는데 1년 365일 제 마음에 쏙 드는 그런 날은 몇 날 되지 않습니다. 바람 부는 날이 아니면 흐린 날, 비 오는 날, 더운 날, 추운 날들의 연속입니다.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환경을 이기고 극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람의 방향을 바꾸시고,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시기도 하고 비를 내리게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육지같이 말리고 자신의 백성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고,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시고 자기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

[시편 34 :8]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다.”


우주 비행사 중에 어윈대령이 있습니다. 그는 30년 전에 달나라 비행을 하였는데, 그 당시는 달에 가는 것도 어려웠지만 돌아오는 것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어윈 대령일행이 우주선에서 이탈한 캡슐을 타고 지구로 귀환할 때였습니다. 낙하도중에 캡슐에 있는 낙하산 두 개가 펴져야 하는데 한 개가 펴지지 않는 것입니다. 휴스턴 본부에서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캡슐 안에서도 아무런 방법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어윈 대령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우리 기도하자!". 캡슐 안의 사람들은 모든 작업을 중지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휴스턴 본부에서도 "우리도 기도하자!" 하며 그 짧은 시간에 다같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지켜주시옵소서" 그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불어 캡슐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캡슐을 밀어 올렸습니다. 그 바람의 세기는 나머지 하나의 낙하산이 펴질 만큼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누구도 상하지 않고 캡슐은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그 날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하나님의 기적이다! " 하며 외쳤습니다. 그 날 이후 어윈은 우주선 조종을 포기하고 세계를 다니며 이 일을 간증하고 다녔습니다.

[시편 121:3-6절]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 하나님의 성도들의 一擧手一投足을 일일이 감찰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태양 아래서 타지 않게 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어둠의 밤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중에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돕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찌 이런 일이 있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만큼 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런데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 요한은 감옥에 갇히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말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증거 하던 사람이 세례요한 아닙니까? 세례요한이 의심하면 누가 예수를 믿으란 말입니까? 예수님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믿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깊은 뜻을 누가 알겠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입니까?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영국인 윌리엄 캐리라는 인도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타밀어 활자를 만들고, 중국어 활자도 제작했습니다. 인도 문법책을 만들고 산스크리트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뱅갈어 사전과 신약성경을 번역했고 텔르구어로 문법책을 만들었습니다. 정말이지 위대한 윌리엄 캐리였습니다.  그런데 1812년 3월 12일, 윌리엄 캐리의 처소에 불이 났습니다.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공허했겠습니까? 저도 토요일 밤새 애써 정리한 설교원고가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저장이 안 되고 날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황당했습니다. 윌리엄 케리 그의 손실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손실이었습니다. 20년 동안 해놓은 일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는 잿더미 가운데서 선교사들과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성경 본문이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후에 인도 선교사 윌리엄 캐리의 놀라운 선교의 성과와 가슴 아픈 일들이 영국에까지 전해져, 윌리엄 캐리의 마음속에 있던 성령의 불길은 런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도 전달되었습니다. 수많은 영국 젊은이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3천 명 이상이 선교에 헌신하였고 그 중 인도에 간 사람만 5백 명이 넘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11제자가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열심히 전도하다 살았는데, 그들이 만년에 好衣好食하며 살았다면 아무도 그들이 전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 2008년 중국 사천城 지진으로 파괴된 교회와 죽은 신자들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지켜주신 교회와 신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결과적으로 이 지역에 폭발적으로 신자의 수가 늘고,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이 세상은 마귀가 공중권세 잡고 있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으면 언제나 위험에 노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은혜 가운데 거하여야 합니다.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은 교회생활 잘하고 봉사생활 열심히 하는 것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 삶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님이 주인 되시고, 깨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남다른 도우심을 구하여 날마다 경성하여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121:7-8절]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내가 너를 업고 걸었기에 ; 어떤 사람이 밤에 꿈을 꾸었다. 그는 꿈속에서 주님과 함께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기쁨에 차고 또 살아가는 것 또한 행복하였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그가 걸어온 날들이 혼자가 아닌 둘임이 분명하였다. 네 개의 발자국, 즉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모래위에 남겨져있었다.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 또 하나는 그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인생에 고통이 시작되었다. 힘들고 괴로워 서 견디어 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막상 뒤를 돌아보니 같이 걸어오던 주님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그 혼자만의 발자국이 모래위에 남아 있었다. 이 사실은 그를 더욱 괴롭게 하여 그는 결국 주님께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는 따르기만 하면 항상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는 왜 저를 버려두셨습니까?" 주님이 대답하였다. "나의 귀하고 착한 아들아!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너를 결코 버려둔 적이 없단다. "그런데 왜 발자국이 한 사람 것이었나요?" "그것은 네가 시련과 고통의 순간을 당할 때에 내가 너를 업고 다녔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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